b-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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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선징사대해황선생신도비명(有鮮徵士大海黃先生神道碑銘) | + | ===유선징사대해황선생신도비명(有鮮徵士大海黃先生神道碑銘)=== |
- | + | <WRAP 37em justify>< | |
- | 有鮮徵士大海黃先生神道碑銘 | + | <typo ff:' |
+ | \_**有鮮徵士大海黃先生神道碑銘**\\ | ||
大海先生黃公之歿在萬歷三十三年乙巳也葬于其城虎田壬坐之原而金 | 大海先生黃公之歿在萬歷三十三年乙巳也葬于其城虎田壬坐之原而金 | ||
鶴沙先生爲狀其行李大山先生銘其碣先生之莅官廉退文章德業足以不 | 鶴沙先生爲狀其行李大山先生銘其碣先生之莅官廉退文章德業足以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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謝不獲謹盥手而爲之敍曰先生諱應淸字淸之自號大海籍平海始諱洛有 | 謝不獲謹盥手而爲之敍曰先生諱應淸字淸之自號大海籍平海始諱洛有 | ||
諱溫仁金吾將軍太子檢校諱佑精軍器少尹諱裕中門下侍中諱瑞金紫光 | 諱溫仁金吾將軍太子檢校諱佑精軍器少尹諱裕中門下侍中諱瑞金紫光 | ||
- | 祿大夫知僉議評理門下侍中謚文節公忠烈王朝爲世子三入元朝諱宗亮 | + | 祿大夫知僉議評理門下侍中諡文節公忠烈王朝爲世子三入元朝諱宗亮 |
戶部典書諱世英進士禮賓寺同正諱龍起禮賓寺正諱吉甫兵使諱得載咸 | 戶部典書諱世英進士禮賓寺同正諱龍起禮賓寺正諱吉甫兵使諱得載咸 | ||
豊縣監曾祖諱玉崇漢城判尹祖諱輔坤成均生員考諱瑀星州牧使妣淑夫 | 豊縣監曾祖諱玉崇漢城判尹祖諱輔坤成均生員考諱瑀星州牧使妣淑夫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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未久而辭甲午除掌樂院別坐時大駕還自義州先生自惟分義不安苟延詣 | 未久而辭甲午除掌樂院別坐時大駕還自義州先生自惟分義不安苟延詣 | ||
- | 関疏陳四弊語甚功適上嘉納擢除眞寶縣監撿摩殘民治蹟大著未二程而 | + | 闕疏陳四弊語甚功適上嘉納擢除眞寶縣監撿摩殘民治蹟大著未二<fc #ff0000>程</fc>而 |
- | 棄歸鄕里天性孝友誠敬備至居喪依禮吸粥三年廬墓號呼哀誠勤人方伯 | + | 棄歸鄕里天性孝友誠敬備至居喪依禮<fc #ff0000>吸</fc>粥三年廬墓號呼哀誠勤人方伯 |
啓請旌閭屢徵終不起安貧自遂不睨陋卷之樂奬進後學益捲捲於吾儒文 | 啓請旌閭屢徵終不起安貧自遂不睨陋卷之樂奬進後學益捲捲於吾儒文 | ||
學而窮理精明敬義日深尤競競乎程朱二夫子筆傳旨訣而謹於冠婚喪祭 | 學而窮理精明敬義日深尤競競乎程朱二夫子筆傳旨訣而謹於冠婚喪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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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氏漢輔女祖江界府使伯孫先生十九年卒墓同原在有五男一女男長居 | 張氏漢輔女祖江界府使伯孫先生十九年卒墓同原在有五男一女男長居 | ||
一贈工曹參議次有一號虎谷成均正字游金鶴峯先生門慶一次千一次億 | 一贈工曹參議次有一號虎谷成均正字游金鶴峯先生門慶一次千一次億 | ||
- | 一女白仁鏡居一三男曰中健中信中做有一二男曰中吉中美慶一以中美 | + | 一女白仁鏡居一三男曰中健中信中俶有一二男曰中吉中美慶一以中美 |
後一女適金是相千一二男曰中載中碩億一三男曰中益中尙中實女適朴 | 後一女適金是相千一二男曰中載中碩億一三男曰中益中尙中實女適朴 | ||
- | 文彬中健以鉉後二女適南俶朴智復中信五男曰鋼鏈鋌鎰鎭女適金宏在 | + | 文彬中健以鉉後二女適南俶朴智復中信五男曰𨬔鏸鋌鎰鎭女適金宏在 |
- | 中俶一男曰錢中吉一男曰銑中美四男鈊鉉集録女適南幌南尙仁琴尙素 | + | 中俶一男曰鑌中吉一男曰銑中美四男鈊鉉鏶𨥭女適南幌南尙仁琴尙素 |
中載四男曰暹景曇晟中碩男曰鎬中益以晟後中尙一男曰暻中實以曇後 | 中載四男曰暹景曇晟中碩男曰鎬中益以晟後中尙一男曰暻中實以曇後 | ||
先生搏以學文常致力於春秋庸學之旨與趙月川朴大庵二先生相友善而 | 先生搏以學文常致力於春秋庸學之旨與趙月川朴大庵二先生相友善而 | ||
- | 家貧親老不可遠遊移側而未嘗樞衣於陶山講席爲終身之痛云平居日用制行以古人爲法左圖右書俯讀仰思至總寢食律己自嚴文章典重可見其東海無潮汐賦其有一絶詩曰藜羹栗飯養殘軀晨起城鄕憲序而又衣冠讀典謨莫道書生無用處一身都是一唐虞築自得之樂亦可想見於養德之中鵝溪李相國當謫居平海幕悅德行使問平日工之爲何如先生曰吾不從事於學但吾所致治心粗得動靜得失然譬如隨手散凶益自空虛何莫非靜之力有以制動也鵝溪歎服著正明村記以自警海月虎谷二先生并華於堂廡之間莫非先生勳德之深則家庭授受之訣豈不章章衣哉先生役後鄕人士立祠于明溪書院系以銘曰東海箕城淑氣磅礴種靈毓秀哲人廼作不自師承得于天性善言善行莫非主靜觧紱歸來潜心經籍莊敬日強進修宋篤富貴嬉嬉潤槃適軸棹楔煒煌俎豆靜庸遺風不洙仰止彌屹惟虎之厓松杉蒼欝樂石嵯峨有率其宮敬作銘詩用告無窮\\ | + | 家貧親老不可遠遊移側而未甞樞衣於陶山講席爲終身之痛云平居日用 |
- | 仁同後人張建德謹撰 | + | 制行以古人爲法左圖右書俯讀仰思至㤀寢食律己自嚴文章典重可見其 |
+ | 東海無潮汐賦其有一絶詩曰藜羹栗飯養殘軀晨起城鄕憲序而又衣冠讀 | ||
+ | 典謨莫道書生無用處一身都是一唐虞槩自得之樂亦可想見於養德之中 | ||
+ | 鵝溪李相國甞謫居平海幕悅德行使問平日工之爲何如先生曰吾不從事 | ||
+ | 於學但吾所致治心粗得動靜得失然譬如隨手散凶益自空虛何莫非靜之 | ||
+ | 力有以制動也鵝溪歎服著正明村記以自警海月虎谷二先生并華於堂廡 | ||
+ | 之間莫非先生勳德之深則家庭授受之詇豈不章章衣哉先生役後鄕人士 | ||
+ | 立祠于明溪書院系以銘曰東海箕城淑氣磅礴種靈毓秀哲人迺作不自師 | ||
+ | 承得于天性善言善行莫非主靜解紱歸來潜心經籍莊敬日强進修宋篤富 | ||
+ | 貴嬉嬉潤槃適軸棹楔煒煌俎豆靜庸遺風不洙仰止彌屹惟虎之厓松杉蒼 | ||
+ | 鬱樂石嵯峨有崒其宮敬作銘詩用告無窮\\ | ||
+ | \_\_仁同後人張建德謹撰 | ||
+ | </ | ||
+ | </ | ||
+ | \\ | ||
+ | <typo ff:' | ||
+ | \_**조선(朝鮮)에 있었던 징사(徵士) 대해(大海) 황선생(黃先生)의 신도비명(神道碑) 서문과 함께**\\ | ||
+ | \_대해선생(大海先生) 황공(黃公)이 돌아가신 것은 선조(宣祖) | ||
+ | 38(三十八)(서기 1605(一六○五)) 을사였다. 기성(箕城)의 호전(虎田)에 있는 임좌(壬坐)의 둔덕에 장사를 | ||
+ | 지냈으며 학사(鶴沙) 김선생(金先生)이 그 행장(行狀)을 짓고 대산(大山) | ||
+ | 이선생(李先生)이 그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는데 선생이 벼슬 길에서 청렴(淸廉)하게 | ||
+ | 물러난 일과 문장(文章)과 덕업(德業)은 족히 천추에 없어지지 않고 | ||
+ | 전해질 것이리니 어찌 남겨진 말을 거듭 말하겠는가.\\ | ||
+ | \_주사손(主嗣孫)인 재우(載宇)형이 곧 신도비(神道碑)를 세우지 못한 일 때문에 | ||
+ | 여러 종중(宗中) 사람들과 합의(合議)하여 비석(碑石)을 다듬게 하고 그의 족인(族人)인 | ||
+ | 세명(世明)과 종제(從弟)인 윤곤(允坤)군으로 하여금 행적(行蹟)을 | ||
+ | 적은 글을 가지고 와서 나 건덕(建德)에게 비명(碑銘)을 지어 달라고 청하는지라. | ||
+ | 오직 나와 같은 만생(晩生)도 공(公)이 후세에 남긴 교화(敎化)와 멀리 | ||
+ | 전해오는 덕업(德業)을 들을 수 있어서 높이 앙모(仰慕)하는 마음이 있었으나 | ||
+ | 그러나 스스로 생각해도 식견(識見)이 얕은 내가 감히 높고 큰 묘소에 용두(龍頭)와 | ||
+ | 구질(龜跌)이 빛나는 비명(碑銘)의 글로 부응(副應)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 ||
+ | 곧 사양했으나 받아주지 않았다. 삼가 손을 씻고 서술하노니 선생(先生)의 | ||
+ | 휘(諱)는 응청(應淸)이요 자(字)는 청지(淸之)이며 스스로 호(號)를 대해(大海)라 했다.\\ | ||
- | 조선(朝鮮)에 있었던 징사(徵士) 대해(大海) 황선생(黃先生)의 신 | + | \_평해황씨(平海黃氏)로서 시조(始祖)의 |
- | 도비명(神道碑) 서문과 함께 | + | 벼슬이 금오장군(金吾將軍) 태자검교(太子檢校)였고 휘(諱) 우정(佑精)은 |
- | 대해선생(大海先生) 황공(黃公)이 돌아가신 것은 선조(宣祖) 삼십팔(서기 - | + | 벼슬이 군기소윤(軍器少尹)이었으며 휘(諱) 유중(裕中)은 벼슬이 |
- | 육공오)을사였다. 기성(箕城)의 호전(虎田)에 있는 임좌(壬坐)의 둔덕에 장 | + | 문하시중(門下侍中)이었고 휘(諱) 서(瑞)는 벼슬이 |
- | 사를 지냈으며 학사(鶴沙) 김선생(金先生)이 그 행장(行狀)을 짓고 대산(大山) | + | 지첨의평리(知僉議評理) 문하시중(門下侍中)이며 문절공(文節公)의 시호(諡號)가 |
- | 이선생(李先生)이 그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는데 선생이 | + | 내렸으며 충렬왕(忠烈王) 때에 세자(世子)를 위하여 원(元)나라 조정에 세 번 들어갔다.\\ |
- | 廉)하게 물러난 일과 문장(文章)과 덕업(德業)은 족히 천추에 없어지지 않고 | + | |
- | 전해질 것이리니 어찌 남겨진 말을 거듭 말하겠는가. | + | |
- | 주사손(主嗣孫)인 재우(載宇)형이 곧 신도비(神道碑)를 세우지 못한 일 때문에 | + | |
- | 여러 종중(宗中) 사람들과 합의(合議)하여 비석(碑石)을 다듬게 하고 그의 족 | + | |
- | 인(族人)인 세명(世明)과 종제(從弟)인 윤곤(允坤)군으로 하여금 행적(行蹟)을 | + | |
- | 적은 글을 가지고 와서 나 건덕(建德)에게 비명(碑銘)을 지어 달라고 청하는 | + | |
- | 지라. 오직 나와 같은 만생(晩生)도 공(公)이 후세에 남긴 교회(敎化)와 멀리 | + | |
- | 전해오는 덕업(德業)을 들을 수 있어써 높이 앙모(仰慕)하는 마음이 있었으나 | + | |
- | 그러나 스스로 생각해도 식견(識見)이 얕은 내가 감히 높고 큰 묘소에 용두(龍 | + | |
- | 頭)와 구질(龜跌)이 빛나는 비명(碑銘)의 글로 부응(副應)할 수 있겠는가. 그 | + | |
- | 리하여 곧 사양했으나 받아주지 않았다. 삼가 손을 씻고 서술하노니 선생(先 | + | |
- | 생(生)의 휘(諱)는 응청(應淸)이요 자(字)는 청지(淸之)이며 스스로 호(號)를 대 | + | \_휘(諱) 종량(宗亮)은 벼슬이 호부전서(戶部典書)였으며 휘(諱) 세명(世英)은 |
- | 해(大海)라 했다. | + | |
- | 평해황씨(平海黃氏)로서 시조(始祖)의 휘(諱)는 낙(洛)이며 휘(諱) 온인(溫仁) | + | |
- | 은 벼슬이 금오장군(金吾將軍) 태자검교(太子檢校)였고 휘(諱) 우정(佑精)은 | + | |
- | 벼슬이 군기소윤(軍器少尹)이었으며 휘(諱) 유중(裕中)은 벼슬이 문하시중(門 | + | |
- | 下侍中)이었고 휘(諱) 서(瑞)는 벼슬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지첨의평 | + | |
- | 리(知僉議評理) 문하시중(門下侍中)이며 문절공(文節公)의 시호(諡號)가 내렸 | + | |
- | 으며 충렬왕(忠烈王) 때에 세자(世子)를 위하여 원(元)나라 조정에 세 번 들어 | + | |
- | 갔다. | + | |
- | 휘(諱) 종량(宗亮)은 벼슬이 호부전서(戶部典書)였으며 휘(諱) 세명(世英)은 | + | |
진사(進士)로서 예빈시(禮賓寺)의 동정(同正)벼슬을 했고 휘(諱) 용기(龍起)는 | 진사(進士)로서 예빈시(禮賓寺)의 동정(同正)벼슬을 했고 휘(諱) 용기(龍起)는 | ||
- | 벼슬이 예빈시정(禮賓寺正)이었으며 휘(諱) 길보(吉甫)는 벼슬이 병사(兵使) | + | 벼슬이 예빈시정(禮賓寺正)이었으며 휘(諱) 길보(吉甫)는 벼슬이 병사(兵使)였고 |
- | 였고 휘(諱) 득재(得載)는 벼슬이 함풍현감(咸豐縣監)이었다. | + | 휘(諱) 득재(得載)는 벼슬이 함풍현감(咸豊縣監)이었다.\\ |
- | 증조(曾祖)의 휘(諱)는 옥승(玉崇)이니 벼슬은 한성판윤(漢城判尹)이었고 조 | + | |
- | 부(祖父)의 휘(諱)는 보곤(輔坤)이니 성균생원(成均生員)이었으며 아버지의 휘 | + | |
- | (諱)는 우(瑀)이니 성주목사(星州牧使)를 지냈고 어머니 숙부인(淑夫人) 진주 | + | |
- | 김씨(眞珠金氏)는 참봉(參奉)을 지낸 빈(賓)의 따님이다. | + | |
- | 선생이 선조(宣祖 十칠년(서기 1584) 갑신에 출생하였는데 어릴 때부터 | + | \_증조(曾祖)의 휘(諱)는 옥숭(玉崇)이니 벼슬은 한성판윤(漢城判尹)이었고 |
- | 극한 생실과 특이한 재질(質)을 타고나서 사람의 도리를 익힌 다음 학문을 | + | 조부(祖父)의 휘(諱)는 보곤(輔坤)이니 성균생원(成均生員)이었으며 아버지의 |
- | 배워 광해(光海) 사년(서기 1612) 임자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광 | + | 휘(諱)는 우(瑀)이니 성주목사(星州牧使)를 지냈고 어머니 숙부인(淑夫人) |
- | 해(光해) 십이년(서기 1620) 경신에 별시과거(別試科擧)에 응시(應試)하 | + | 진주김씨(眞珠金氏)는 참봉(參奉)을 지낸 빈(賓)의 따님이다.\\ |
- | 려고 과장(科場)에 들어가서 책문(策問)의 제목을 보고 좋은 말이 아니라고 하여 | + | |
- | 대책(對策)을 하지 않고 나와 버렸다. | + | \_선생이 선조(宣祖) 17(十七)년(서기 1584(一五八四)) 갑신에 출생하였는데 어릴 때부터 |
- | 이런 일이 있고부터는 문을 닫고 행적을 감추었으며 더욱 학문에 힘쓰고 마음을 | + | 지극한 생실과 특이한 재질(才質)을 타고나서 사람의 도리를 익힌 다음 학문을 |
+ | 배워 광해(光海) 사년(서기 1612) 임자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광해(光海) | ||
+ | 12(十二)년(서기 1620(一六二○)) 경신에 별시과거(別試科擧)에 응시(應試)하려고 | ||
+ | 과장(科場)에 들어가서 책문(策問)의 제목을 보고 좋은 말이 아니라고 하여 | ||
+ | 대책(對策)을 하지 않고 나와 버렸다.\\ | ||
+ | |||
+ | \_이런 일이 있고부터는 문을 닫고 행적을 감추었으며 더욱 학문에 힘쓰고 마음을 | ||
길러 고명(高明)한 덕행(德行)이 조정에 알려져서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부름을 | 길러 고명(高明)한 덕행(德行)이 조정에 알려져서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부름을 | ||
받아 예빈시(禮賓寺)의 봉사(奉事) 벼슬이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으니 또 | 받아 예빈시(禮賓寺)의 봉사(奉事) 벼슬이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으니 또 | ||
- | 연사전(延思殿)의 참봉(參奉)이 제수되어 배명(拜命)받고 얼마 안되어 사직했 | + | 연은전(延ㅇ恩殿)의 참봉(參奉)이 제수되어 배명(拜命)받고 얼마 안되어 사직했다. |
- | 다. 갑오년에 장악원(掌樂院)의 별좌(別坐) 벼슬이 제수되었는데 그 때에 상 | + | 갑오년에 장악원(掌樂院)의 별좌(別坐) 벼슬이 제수되었는데 그 때에 상감(上監)이 |
- | 감(上監)이 의주(義州)로부터 환궁(還宮)하였다. | + | 의주(義州)로부터 환궁(還宮)하였다.\\ |
- | 선생이 신하의 직분(職分)으로서 상감의 심기(心氣)가 불안하실 듯하여 예궐 | + | |
- | (請闕)을 미루어 오다가 네가지 폐단(弊端)을 진술한 상소(上疏)를 올렸는데 | + | |
- | 상소의 말이 대단히 적절하여 상감이 기꺼이 받아들이고 발탁(拔擢)하여 진보 | + | |
- | 현감(眞寶縣監)을 제수하니 난리에서 살아남은 백성을 어루만져주는 등 고을을 | + | |
- | 다스리는 공적(功績)이 크게 나타났으나 그년도 못 되었는데 벼슬을 버리고 고 | + | |
- | 향에 돌아왔다. 천성(天性)이 효성스럽고 우애로웠으며 정성과 공경을 다했는데 | + | \_선생이 신하의 직분(職分)으로서 상감의 심기(心氣)가 불안하실 듯하여 예궐(詣闕)을 |
+ | 미루어 오다가 네가지 폐단(弊端)을 진술한 상소(上疏)를 올렸는데 | ||
+ | 상소의 말이 대단히 적절하여 상감이 기꺼이 받아들이고 발탁(拔擢)하여 | ||
+ | 진보현감(眞寶縣監)을 제수하니 난리에서 살아남은 백성을 어루만져주는 등 고을을 | ||
+ | 다스리는 공적(功績)이 크게 나타났으나 2(二)년도 못 되었는데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 ||
+ | 돌아왔다. 천성(天性)이 효성스럽고 우애로웠으며 정성과 공경을 다했는데 | ||
부모상(父母喪)을 당해서는 예법에 의하여 삼년상(三年喪)을 죽을 먹고 살았으며 | 부모상(父母喪)을 당해서는 예법에 의하여 삼년상(三年喪)을 죽을 먹고 살았으며 | ||
묘 옆에 여막(廬幕)을 치고 호곡(號哭)하니 슬퍼하는 효성이 듣는 사람의 마음을 | 묘 옆에 여막(廬幕)을 치고 호곡(號哭)하니 슬퍼하는 효성이 듣는 사람의 마음을 | ||
- | 감동시켰다. | + | 감동시켰다.\\ |
- | 지방장관(地方長官)이 그 효행을 조정에 아뢰어 정려(旌閭)가 내리도록 청원 | + | |
- | (請願)하여 벼슬을 내려 여러 번 불렀으나 끝내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 + | \_지방장관(地方長官)이 그 효행을 조정에 아뢰어 정려(旌閭)가 내리도록 |
- |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스스로 안정을 찾았으며 가난한 농촌생활을 싫어하지 않고 | + | 청원(請願)하여 벼슬을 내려 여러 번 불렀으나 끝내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
+ | |||
+ | \_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스스로 안정을 찾았으며 가난한 농촌생활을 싫어하지 않고 | ||
후학(後學)들의 진학(進學)을 권장하였으며 더욱이 우리 유학(儒學)에 정성을 | 후학(後學)들의 진학(進學)을 권장하였으며 더욱이 우리 유학(儒學)에 정성을 | ||
다하여 사물(事物)의 이치를 정명(精明)하게 궁구(窮究)하고 경(敬)의 도리를 | 다하여 사물(事物)의 이치를 정명(精明)하게 궁구(窮究)하고 경(敬)의 도리를 | ||
- | 말마다 깊게했으며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단전(單傳)과 지결(旨訣)의 | + | 말마다 깊게했으며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단전(單傳)과 지결(旨訣)의 |
- | 구를 굳세게 하면서 관혼상제(冠婚喪祭)에도 근엄(謹嚴)하여 가문과 향중(鄕中)의 풍속순화(風俗淳化)에 앞장서 나간 것은 더욱 빛난 일이니 선생의 교회 | + | 연구를 굳세게 하면서 관혼상제(冠婚喪祭)에도 근엄(謹嚴)하여 가문과 향중(鄕中)의 |
- | (敎化)는 자못 백세(百世)토록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 + | 풍속순화(風俗淳化)에 앞장서 나간 것은 더욱 빛난 일이니 선생의 교화(敎化)는 |
- | 배위(配位)는 숙인(淑人) 울진장씨(蔚珍張氏)이니 한보(漢輔)의 따님이며 | + | 자못 백세(百世)토록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
- | 계부사(江界府使)를 지낸 백(伯)의 손녀로서 선생보다 十九년 먼저 졸(卒)했다. | + | |
+ | \_배위(配位)는 숙인(淑人) 울진장씨(蔚珍張氏)이니 한보(漢輔)의 따님이며 | ||
+ | 강계부사(江界府使)를 지낸 백(伯)의 손녀로서 선생보다 | ||
묘(墓)는 선생과 같은 둔덕에 있으며 아들 다섯과 딸 하나가 있는데 맏아들은 | 묘(墓)는 선생과 같은 둔덕에 있으며 아들 다섯과 딸 하나가 있는데 맏아들은 | ||
- | 거일(居一)이니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으며 다음은 유일(有一) | + | 거일(居一)이니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으며 다음은 유일(有一)이니 |
+ | 호(號)는 호곡(虎谷)이며 성균정자(成均正字) 벼슬을 했고 김학봉(金鶴峯) 선생(先生)의 | ||
+ | 문하(門下)에 유학(遊學)했다. 다음은 경일(慶一)이요 다음은 천일(千一)이며 | ||
+ | 다음은 억일(億一)이고 딸은 백인경(白仁鏡)에게 출가했다.\\ | ||
- | 이니 호(號)는 호곡(虎谷)이며 성균정자(成均正字) 벼슬을 했고 김학봉선생(金 | + | \_거일(居一)은 아들 셋이 있으니 중건(中健)과 중신(中信)과 중숙(中俶)이며 |
- | 鶴峯先生)의 문하(門下)에 유학(遊學)했다. 다음은 경일(慶一)이요 다음은 천 | + | 유일(有一)에게는 |
- | 일(千一)이며 다음은 억일(億一)이고 딸은 백인경(白仁鏡)에게 출가했다. | + | 경일(慶一)은 중미(中美)를 후사(後嗣)로 하였으며 딸은 김시상(金是相)에게 출가했다. |
- | 거일(居一)은 아들 셋이 있으니 중건(中健)과 중신(中信)과 중숙(中俶)이며 | + | |
- | 일(有一)에게는 | + | |
- | 은 중미(中美)를 후사(後嗣)로 하였으며 딸은 김시상(金是相)에게 출가했다. | + | |
천일(千一)의 두 아들은 중재(中載)와 중석(中碩)이며 억일(億一)의 세 아들은 | 천일(千一)의 두 아들은 중재(中載)와 중석(中碩)이며 억일(億一)의 세 아들은 | ||
중익(中益)과 중상(中尙)과 중실(中實)이며 딸은 박문빈(朴文彬)에게 출가했고 | 중익(中益)과 중상(中尙)과 중실(中實)이며 딸은 박문빈(朴文彬)에게 출가했고 | ||
- | 중건(中健)은 현(鉉)을 후사(後嗣)로 하고 두 딸은 남숙(南俶)과 박지복(朴智 | + | 중건(中健)은 현(鉉)을 후사(後嗣)로 하고 두 딸은 남숙(南俶)과 박지복(朴智復)에게 |
- | 復)에게 출가했다. | + | 출가했다.\\ |
- | 중신(中信)의 다섯 아들은 연(鋼)과 혜(鏸)와 정(鋏)과 일(鎰)과 진(鎭)이며 | + | |
- | 딸은 김굉좌(金宏佐)에게 출가했으며 중수(中俶)의 한 아들은 빈(鐵)이요 | + | \_중신(中信)의 다섯 아들은 연(𨬔)과 혜(鏸)와 정(鋌)과 일(鎰)과 진(鎭)이며 |
- | 길(中吉)의 한 아들은 선(鏡)이며 중미(中美)의 네 아들은 심(鉍)과 현(鉉)과 | + | 딸은 김굉좌(金宏佐)에게 출가했으며 중숙(中俶)의 한 아들은 빈(鑌)이요 |
- | 집(鎭)과 영(錄)이고 딸은 남황(南徨)과 남두원(南斗遠)과 남상인(南尙仁)과 | + | 중길(中吉)의 한 아들은 선(銑)이며 중미(中美)의 네 아들은 심(鉍)과 현(鉉)과 |
- | 금삼소(琴尙素)에게 출가했으며 중재(中載)의 네 아들은 섬(暹)과 경(景)과 담 | + | 집(鏶)과 영(𨥭)이고 딸은 남황(南徨)과 남두원(南斗遠)과 남상인(南尙仁)과 |
- | (曇)과 성(晟)이고 중석(中碩)의 아들은 호(鎬)이며 중익(中益)은 성(晟)으로 | + | 금삼소(琴尙素)에게 출가했으며 중재(中載)의 네 아들은 섬(暹)과 경(景)과 담(曇)과 |
+ | 성(晟)이고 중석(中碩)의 아들은 호(鎬)이며 중익(中益)은 성(晟)으로 | ||
후사(後嗣)를 하였고 중상(中尙)의 한 아들은 경(暻)이요 중실(中實)은 담(曇)을 | 후사(後嗣)를 하였고 중상(中尙)의 한 아들은 경(暻)이요 중실(中實)은 담(曇)을 | ||
- | 후사(後嗣)로 하였다. | + | 후사(後嗣)로 하였다.\\ |
- | 선생이 학문(學文)을 넓힘에 있어서는 항상 춘추(春秋)와 중용(中庸)과 대학 | + | |
- | (大學)의 큰 뜻에 힘을 기울였으며 조월천(趙月川) 박대암(朴大庵) 두 선생과 | + | \_선생이 학문(學文)을 넓힘에 있어서는 항상 춘추(春秋)와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의 |
- | 더불어 서로 좋은 교우(交友)관계였고 집이 가난하고 노친(老親)이 계시는 | + | 큰 뜻에 힘을 기울였으며 조월천(趙月川) 박대암(朴大庵) 두 선생과 |
- | 곁을 떠나서 멀리 유학(遊學)할 수 없어서 일찍이 퇴계선생(退溪先生)의 문하 | + | 더불어 서로 좋은 교우(交友)관계였고 집이 가난하고 노친(老親)이 계시는 |
- | (門下)에 나아가지 못한 것을 평생토록 마음 아파했다고 한다. | + | 곁을 떠나서 멀리 유학(遊學)할 수 없어서 일찍이 퇴계선생(退溪先生)의 문하(門下)에 |
- | 평상시의 거처(居處)와 일상생활의 행동을 제약(制約)함에는 옛사람의 법도(法 | + | 나아가지 못한 것을 평생토록 마음 아파했다고 한다.\\ |
- | 度)를 따랐으며 좌우(左右)에 도서(圖書)를 쌓아 놓고 내려다 보며 읽고 우러러 | + | |
+ | \_평상시의 거처(居處)와 일상생활의 행동을 제약(制約)함에는 옛사람의 | ||
+ | 법도(法度)를 따랐으며 좌우(左右)에 도서(圖書)를 쌓아 놓고 내려다 보며 읽고 우러러 | ||
생각하는 가운데 침식(寢食)을 잊어버리며 자신(自身)을 바로잡는 일에 스스로 | 생각하는 가운데 침식(寢食)을 잊어버리며 자신(自身)을 바로잡는 일에 스스로 | ||
- | 엄(嚴)하였으며 문장(文章)이 바르고 무게가 있는 것은 그의 동해무조석(東海 | + | 엄(嚴)하였으며 문장(文章)이 바르고 무게가 있는 것은 그의 |
- | 無潮汐)이란 부(賦)에서 볼 수 있다. 거기에 있는 한 절구시(絶句詩)에 말하기를 | + | 동해무조석(東海無潮汐)이란 부(賦)에서 볼 수 있다. 거기에 있는 한 절구시(絶句詩)에 말하기를 |
- | 명아주 | + | '명아주 |
- | 서이(序而)를 본받는다 했고 또 의관(衣冠)을 갖추어 전모(典謨)를 읽으면의 | + | 서이(序而)를 본받는다' |
- | 시에서 서생(書生)이 쓰일 곳 없다. 말하지 말라 한 몸이 온통 이게 요순세 | + | 시에서 서생(書生)이 쓰일 곳 없다. 말하지 말라 한 몸이 온통 이게 |
- | 계(堯舜世界)이다고 했으니 대체로 덕(德)을 길러가는 가운데 스스로를 만족해 | + | 요순세계(堯舜世界)이다고 했으니 대체로 덕(德)을 길러가는 가운데 스스로를 만족해 |
- | 하는 낙(樂)을 상상해 볼 수 있다. | + | 하는 낙(樂)을 상상해 볼 수 있다.\\ |
- | 아계(鵝溪) 이(李)정승이 일찍이 귀양살이로 평해(平海)에 머물고 있을 때에 | + | |
+ | \_아계(鵝溪) 이(李)정승이 일찍이 귀양살이로 평해(平海)에 머물고 있을 때에 | ||
공의 덕행(德行)을 즐겨 앙모(仰慕)하여 평일에 공부를 어떻게 하십니까라고 | 공의 덕행(德行)을 즐겨 앙모(仰慕)하여 평일에 공부를 어떻게 하십니까라고 | ||
물으니 선생이 말하기를 나는 학문(學問)에 종사하지 않고 다만 내가 마음을 | 물으니 선생이 말하기를 나는 학문(學問)에 종사하지 않고 다만 내가 마음을 | ||
- | 다스려 온 소치(所致)로 동정(動靜)의 득실(得失)을 대강 얻었으나 그러나 | + | 다스려 온 소치(所致)로 동정(動靜)의 득실(得失)을 대강 얻었으나 그러나 |
- | 유(譬喻)하건대 닥치는 대로 흩어 없에 버려서 더욱 자신이 공허(空虛)하니 | + | 비유(譬喻)하건대 닥치는 대로 흩어 없애 버려서 더욱 자신이 공허(空虛)하니 |
- | (靜)의 힘이 동(動)을 억제한 것이 어찌 아니겠는가 하니 아계(鵝溪)이(李) | + | 정(靜)의 힘이 동(動)을 억제한 것이 어찌 아니겠는가 하니 아계(鵝溪) |
- | 정승이 탄복하고 정명촌기(正明村記)를 지어 자신(自身)을 경계했다고 한다. | + | 이(李) 정승이 탄복하고 정명촌기(正明村記)를 지어 자신(自身)을 경계했다고 한다. |
해월(海月)과 호곡(虎谷) 두 선생은 당내(堂內)의 지친(至親) 사이로서 함께 | 해월(海月)과 호곡(虎谷) 두 선생은 당내(堂內)의 지친(至親) 사이로서 함께 | ||
화려한 문장이었으니 선생이 공훈과 덕행(德行)에 깊이 관계되지 않음이 없은 | 화려한 문장이었으니 선생이 공훈과 덕행(德行)에 깊이 관계되지 않음이 없은 | ||
- | 즉 가정교육(家庭敎育)에서 주고 받은 비결(秘訣)이 어찌 아니겠는가. | + | 즉 가정교육(家庭敎育)에서 주고 받은 비결(秘訣)이 어찌 아니겠는가.\\ |
- | 선생이 별세한 뒤에 향중(鄕中) 사람들이 명계서원(明溪書院)에 사우(祠宇)를 | + | |
- | 세웠다. 이어서 명(銘)을 말하노니 동해(東海)가에 자리한 기성(箕城)땅에 | + | \_선생이 별세한 뒤에 향중(鄕中) 사람들이 명계서원(明溪書院)에 사우(祠宇)를 |
- | 기(淑氣)가 서리어 가득하구나영기(靈氣)가 싹트고 빼어나게 걸리지니 철인(哲 | + | 세웠다. 이어서 명(銘)을 말하노니 |
- | 人)이 여기에 나시었도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아도 특출한 재주는 천성 | + | \\ |
- | (天性)으로 얻었다. 말씀이 착하고 행의(行義)가 바른 것은 주정(主靜)으로 | + | 東海箕城 |
- | 수양(修養)함이 아님이 없네。 | + | 淑氣磅礴 숙기(淑氣)가 서리어 가득하구나.\\ |
- |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서 마음을 가다듬어 경적(經籍)을 읽었네。엄숙하고 | + | 種靈毓秀 |
- | 공경함이 날로 더하니 학문(學問)의 나아감이 더욱 깊었다. 부(富)과 귀(貴)를 | + | 哲人迺作 |
+ | 不自師承 | ||
+ | 得于天性 | ||
+ | 善言善行 | ||
+ | 莫非主靜 | ||
+ | 解紱歸來 | ||
+ | 潜心經籍 | ||
+ | 莊敬日强 | ||
+ | 進修宋篤 | ||
+ | 富貴嬉嬉 | ||
+ | 潤槃適軸 시골에서 벼슬 않고 숨어 살았네.\\ | ||
+ | 棹楔煒煌 효자로 내린 정려(旌閭) 세상에 빛나고 \\ | ||
+ | 俎豆靜庸 서원(書院)의 제향은 정숙(靜肅)하도다.\\ | ||
+ | 遺風不洙 후세에 남긴 교회(敎化) 끊임이 없어 \\ | ||
+ | 仰止彌屹 우러러 사모하니 산처럼 높이네. \\ | ||
+ | 惟虎之厓 오직 호전(虎田)에 있는 묘소(墓所) 언덕에 \\ | ||
+ | 松杉蒼鬱 소나무 삼(杉) 나무 울창하구나.\\ | ||
+ | 樂石嵯峨 비갈(碑碣)을 높게 높게 세워 놓으니\\ | ||
+ | 有崒其宮 그 봉분(封墳) 드높게 우뚝하구나.\\ | ||
+ | 敬作銘詩 비명(碑銘)의 시(詩) 공경히 지어 새겨서\\ | ||
+ | 用告無窮 무궁(無窮)토록 후세 사람에 고(告)하노라.\\ | ||
+ | \\ | ||
+ | \_\_인동후인(仁同後人) 장건덕(張建德) 삼가 짓다.\\ | ||
+ | \\ | ||
+ | <WRAP subnote> | ||
+ | 주1. 책문(策問): | ||
+ | |||
+ | 주2. 대책(對策): | ||
+ | |||
+ | 주3. 유일(遺逸): | ||
+ | |||
+ | 주4. 아계(鵝溪): | ||
+ | |||
+ | 주5. 주정(主靜): | ||
+ | |||
+ | 주6. 징사(徵士): | ||
+ | </ | ||
+ | </ | ||
+ | </ | ||
- | 註一。策 | ||
- | 二。對 | ||
- | 三。遺 | ||
- | 四。鵝 | ||
- | 五。主 | ||
- | 六。徵 | ||
- | 실없게 생각하여서시골에서 벼슬 않고 숨어 살았네.효자로 내린 정려(旌閭) | ||
- | 세상에 빛나고 서원(書院)의 제향은 정숙(靜肅)하도다.후세에 남긴 교회(敎化) | ||
- | 끊임이 없어 우러러 사모하니 산처럼 높이네. 오직 호전(虎田)에 있는 묘소(墓所) | ||
- | 언덕에 소나무 삼(杉) 나무 울창하구나.비갈(碑碣)을 높게 높게 세워 놓으니 | ||
- | 그 봉분(封墳) 드높게 우뚝하구나.비명(碑銘)의 시(詩) 공경히 지어 새겨서 | ||
- | 무궁(無窮)토록 후세 사람에 고(告)하노라。 | ||
- | 인동후인(仁同後人) 장건덕(張建德)삼가 짓다. | ||
- | 問: | ||
- | 策: | ||
- | 逸: 세상을 숨어살며 學德이 높은 사람 | ||
- | 溪: | ||
- | 刑曹判書에 승진하고 吏曹判書와 大司成을 지낸 뒤 一五八八에 領議政이 되었다. 鵝 | ||
- | 溪府院君에 封해졌으며 文章과 書畫에 뛰어났고 특히 文章에 능하여 宣朝때에 文章八 | ||
- | 大家의 한 사람。 | ||
- | 靜: | ||
- | 士: |
b-116.1748569961.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30 10:52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