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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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국지사국오황만영의열비명(愛國志士菊塢黃萬英義烈碑銘) | + | ===애국지사국오황만영의열비명(愛國志士菊塢黃萬英義烈碑銘)=== |
+ | <WRAP 37em justify> | ||
+ | <typo ff:' | ||
+ | \_**애국지사(愛國志士) 국오(菊塢) 황만영(黃萬英) 의열비명(義烈碑銘)**\\ | ||
+ | \_애국지사(愛國志士) 국오(菊塢) 황만영(黃萬英) 선생(先生)의 관(貫)은 평해(平海)요 | ||
+ | 자(字)는 응칠(應七)이며 원조(遠祖) 유(有) 한학사(漢學士) 휘(諱) 낙(洛)의 후(后)요 | ||
+ | 행(行) 공조참의(工曹參議) 증(贈) <fc # | ||
+ | 10세손(十世孫)이며 휘(諱) 수(洙)의 자(子)라. \\ | ||
- | 愛國志士菊塢黃萬英義烈碑銘 | + | \_단기(檀紀) <fc # |
- | 愛國志士菊塢黃萬英先生의 貫은 平海요 字는 應七이며 遠祖有漢學 | + | 6월(六月) 20일(二十日) 원(元) 평해군(平海郡) 사동(沙銅)에서 |
- | 士諱洛의 后요 行工曹參議贈吏曹判書海月諱汝一의 十世孫이며 諱洙 | + | 속에서 태어나셨다. 관인(寬仁)한 도량(度量)과 강직(剛直)한 지조(志操)는 모든 |
- | 의 子라 | + | 지녔으며 |
- | 속에서 태여나셨다 寬仁한 度量과 剛直한 志操는 모든 信望을 한몸에 | + | 신구(新舊) 병서(兵書)에 조예(造詣)가 |
- | 지녔으며 少年學房時부터 文筆이 雄輝하고 特히 新舊兵書에 造詣가 | + | 깊으시었다. \\ |
- | 깊으시었다 | + | |
- | 韓民族을 餘地없이 壓迫하는 以來 數많은 愛國志士는 抗日救國에 | + | |
- | 生命과 財産을 던저가면서 重疊한 辛苦로 侵略者를 抵抗하여 온其 | + | |
- | 中한 사람이신 菊塢先生님이시다 日帝는 西紀一八九四年 淸日戰爭과 | + | |
- | 一九〇四年露日戰爭에 戰勝을 得한 餘威의 魔手는 韓國을 侵略함이 | + | |
- | 露骨化되여 所謂乙巳保護條約인 恥辱의 勸約을 받게되자 國內의 風 | + | |
- | 雲은 날이 갈수록 險惡一路로 되여갔다 各處에서 義兵이 蜂起하자 | + | |
- | 先生께서 率先的으로 葉錢八百兩을 來屯中인 成益鉉胡佐眞陣에 喜 | + | |
- | 捨激勵하였고 累次上京하여 梁起鐸公外諸士들과 救國의 大義를 論 | + | \_때는 |
- | 하고 獨立協會와 關東學會의 一員이 되였고 爲先救國의 길이 國民 | + | 한민족(韓民族)을 여지(餘地)없이 압박(壓迫)하는 이래(以來) 수(數)많은 애국지사(愛國志士)는 항일구국(抗日救國)에 |
- | 敎育을 新文明開化로 指向하여야 된다 하시고 蔚珍朱鎭壽同志의 梅 | + | 생명(生命)과 재산(財産)을 던져 |
- | 花晩興學校設立과 同時一九○七年 平海郡最初로 沙銅大興學校를 | + | 기중(其中) 한 사람이신 국오선생(菊塢先生)님이시다. \\ |
- | 財로 創設하고 英材를 培養하여 오시다가 一九一○年 庚戌八月二十 | + | |
- | 九日 | + | |
- | 排日의 溫床이라 하여 모두 閉鎖하였다 先生은 失國을 當한 憤恨을 | + | |
- | 坐而待死할때가 않이라 | + | |
- | 聲脈을 相通하여 滿洲西北兩間島를 移民營農과 獨立軍養成根據地로 | + | |
- | 擇定하고 義兵殘餘部隊와 함께 農戶移住가 始作되였다 爲先隣按郡 | + | |
- | 諸同志인 安東石洲李相龍一松金東三寧海晩醒朴慶鐘蔚珍白雲朱鎭壽 | + | |
- | 平海一唔黃炳文白浪安奎源外諸公의 先頭領導로 一擧數數百戶가 渡 | + | |
- | 滿하여 治江諸縣에 定着하면서 | + | |
- | 校도 設立하였다 後力의 | + | |
- | 續하시었으며 그동안 敵憲兵望洋分遣所에 累次呼出當하여 監禁도 | + | \_일제(日帝)는 서기(西紀) 1894년(一八九四年) 청일전쟁(淸日戰爭)과 |
- | 되였었다 一九一二년 柳河縣三源浦에 到着하여 省齋李始榮先生을 | + | 1904년(一九〇四年) 노일전쟁(露日戰爭)에 전승(戰勝)을 득(得)한 여위(餘威)의 마수(魔手)는 한국(韓國)을 침략(侵略)함이 |
- | 도와 新興學校設立에 財政的後援을 하여 가면서 營農周旋에도 心血을 | + | 노골화(露骨化)되어 |
- | 다하시였다. | + | 풍운(風雲)은 날이 갈수록 험악일로(險惡一路)로 되어갔다. \\ |
- | 여 文昌範外諸同志들과 決死救國을 盟約하오니 코키스크에서 李相 | + | |
- | 高先生을 問病한 後東滿歸路에 東淸鐵道로 齊齊哈에 올라가 黑龍江 | + | |
- | 省都에서 張宗昌督軍을 禮訪하고 筆談으로 韓國獨立運動에 關한 心 | + | |
- | 懷를 通한바 張督軍은 筆答으로 朝鮮兄弟一樣的極保韓族이라하고 | + | |
- | 厚待도 받으셨다 | + | |
- | 軍鬪士들과 자주 자리를 같이하면서 弱한 힘이나마 우리는 더욱 鞏 | + | |
- | 固히 하여야 된다하시고 모든 外事에 參與하시었다 敵羅南師團의 | + | |
- | 國境守備隊는 우리 獨立軍의 越江奇襲을 當하여 많은 犧牲을 當하게 | + | |
- | 되여 此의 報復戰으로 沿江獨立軍에게 끊임없는 搜索討伐을 加하여 | + | |
- | 왔으며 그 野戰的蠻行은 僑胞部落에 放火하고 天人이 共怒할 無辜한 | + | |
- | 児女子까지도 銃剣殺傷을 恣行하였다 우리 軍隊는 地利릴 잘 利用하여 | + | |
- | 射殺擊退를 여러차례 하고 있었다 一九一九年三月一日大韓獨立宣言 | + | |
- | 運動이 | + | |
- | 宣揚하고 大韓民國臨時政府를 上海佛租界內에 樹立하게 되였다 滿 | + | |
- | 洲에서는 臨政西路軍政署를 設置하고 李相龍先生이 督辨으로 推戴 | + | |
- | 되여 上海와 滿洲間에 緊密한 紐帶를 가지고 있었다 先生은 此團合에 | + | |
- | 있어서도 朴慶鍾朱鎭壽諸同志와 함께 盡力하시었고 其後上海臨政에 | + | |
- | 가셔서 諸要人을 만나 資金調達의 重任을 分担하고 吉林省으로 도 | + | |
- | 라오셨다 一九二三年柳河縣三源浦에서 密陽人尹弼煥에게 資金調達의 | + | |
- | 任務를 맡겨 | + | |
- | 所期의 目的을 達成하고 梁槿煥은 上海로 具年欽은 寧安縣에서 先生과 | + | |
- | 相逢하고 尹弼煥은 密陽에서 敵警에 逮捕되여 大邱刑務所에서 服役 | + | |
- | 하였다 | + | |
- | 되여 先生은 李石洲丈과 함께 上海로 向하게 되니 모든 일에 淸廉 | + | |
- | 潔白한 菊塢先生에게 負政의 重任을 맡아 보게 한 것이였다 한때 交 | + | \_각처(各處)에서 의병(義兵)이 봉기(蜂起)하자 |
- | 通部次長으로 | + | 선생(先生)께서 |
- | 함에 또 함께 吉林省舒蘭으로 도라오서서 血書로 國內知人과 本宅 | + | 희사(喜捨) 격려(激勵)하였고, 누차(累次) 상경(上京)하여 |
- | 에까지 呼訴文을 發送한後 柳河縣으로 | + | 국민교육(國民敎育)을 신문명개화(新文明開化)로 지향(指向)하여야 된다 하시고, 울진(蔚珍) 주진수(朱鎭壽) 동지(同志)의 |
- | 潛入하여 入手한 資金을 送致한 後에 身病이 因發하여 | + | 매화만흥학교(梅花晩興學校) 설립(設立)과 동시(同時) 1907년(一九○七年) 평해군(平海郡) 최초(最初)로 사동대흥학교(沙銅大興學校)를 |
- | 察의 要視察을 받어가면서 治療하고 게시였다 一九二七年二月十五日 | + | 사재(私財)로 창설(創設)하고 영재(英材)를 배양(培養)하여 오시다가, |
- | 當時全國內各派團體가 모든 分野의 片見에서 活動하든 十五団体를 | + | 九日) 민족(民族) 사상(史上) 최대(最大) 오점(汚点)인 한일합방(韓日合邦)의 국치(國恥)를 당(當)하자 적괴(敵魁)는 양(兩) 학교(學校)를 |
- | 發展的으로 解消하고 | + | 배일(排日)의 온상(溫床)이라 |
- | 會員에 委員長으로 金炳魯辨護士가 推選되고 | + | |
- | 先生이 支部長으로 選任되어 모든 새 事業에 健鬪하여 | + | |
- | 抗日運動은 日帝의 滿洲事變始發의 契機로 一九三一年五月十七日 | + | |
- | 全國的으로 敵警의 强制廢鎖를 當하였다 先生은 其後金剛山에 隱居 | + | |
- | 하여 國際趨勢를 觀望하든中國外風霜十餘載에 病弱되신 몸은 重態 | + | |
- | 로셔 歸家하여 | + | |
- | 紀四一七二年西紀一九三九年 己卯三月七日이고 享年六十六歲이시며 | + | \_선생(先生)은 실국(失國)을 당(當)한 분한(憤恨)을 |
- | 葬禮式은 社會葬으로 | + | 좌이대사(坐而待死)할 때가 아니라 생각(生覺)하시고 1911년(一九一一年) 국내(國內) 항일지사(抗日志士)들과 |
- | 擧行하였는데 警察은 當日私服巡査를 派遣하여 | + | 성맥(聲脈)을 상통(相通)하여 만주(滿洲) 서북(西北) 양(兩) 간도(間島)를 이민(移民) 영농(營農)과 독립군(獨立軍) 양성(養成) 근거지(根據地)로 |
- | 것이다 先生의 崇高하신 救國正氣를 精神的敎訓으로 後人에게 龜鑑 | + | 택정(擇定)하고 의병(義兵) 잔여부대(殘餘部隊)와 함께 농호(農戶) |
- | 삼기 爲하여 本紀念事業委員會委員長 安鎔薰總務安鎔淸南鍾述과 終 | + | 인접군(隣接郡) |
- | 始經紀하여 與金柄斗金盛出朴命岩黃德基黃載憲黃德出安慶錫黃載洪 | + | 제(諸) 동지(同志)인 안동(安東)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
- | 黃奉錫安柄國安柄贊黃志聲黃泰山黃載勳黃允錫黃載烈門中代表黃載 | + | |
- | 宇黃義錫温溪黃氏門中代表黃景坤黃翼欽李萬麒黃大鳳 및 委員諸位와 | + | |
- | 黃氏僉宗으로 半歲勠力에 鳩財伐石하여 蔚珍近古史田永璟撰으로 永 | + | |
- | 記不朽其光云爾라 | + | |
- | 檀紀四三〇九丙辰十月 日菊塢先生紀念事業委員會 | + | |
+ | \_후방(後方)의 이러한 모든 준비(準備)에 선생(先生)은 재정원조(財政援助)를 계속(繼續)하시었으며 그동안 적(敵) 헌병(憲兵) 망양(望洋) 분견소(分遣所)에 누차(累次) 호출(呼出) 당(當)하여 감금(監禁)도 | ||
+ | 되었었다. \\ | ||
+ | \_1912년(一九一二年)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 도착(到着)하여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 선생(先生)을 | ||
+ | 도와 신흥학교(新興學校) 설립(設立)에 재정적(財政的) 후원(後援)을 하여 가면서 영농(營農) 주선(周旋)에도 심혈(心血)을 | ||
+ | 다하시었다. \\ | ||
+ | |||
+ | \_1913년(一九一三年) 춘(春)에 재서비리아(在西比利亞) 대한민국의회(大韓民國議會)에 참석(參席)하시어 | ||
+ | 문창범(文昌範) 외(外) 제(諸) 동지(同志)들과 결사구국(決死救國)을 맹약(盟約)하고 니코리스크에서 | ||
+ | 이상설(李相卨) 선생(先生)을 문병(問病)한 후(後) 동만(東滿) 귀로(歸路)에 동청철도(東淸鐵道)로 제제합이(齊齊哈爾)에 | ||
+ | 올라가 흑룡강성도(黑龍江省都)에서 장종창(張宗昌) 독군(督軍)을 예방(禮訪)하고 필담(筆談)으로 한국독립운동(韓國獨立運動)에 관(關)한 심회(心懷)를 통(通)한 바 장독군(張督軍)은 필답(筆答)으로 | ||
+ | 조선형제일양적극보한족(朝鮮兄弟一樣的極保韓族)이라하고 | ||
+ | 후대(厚待)도 받으셨다. \\ | ||
+ | |||
+ | \_1914년(一九一四年) 1차세계대전(一次世界大戰)이 발발(勃發)함에 선생(先生)은 독립군(獨立軍) | ||
+ | 투사(鬪士)들과 자주 자리를 같이하면서 약(弱)한 힘이나마 우리는 더욱 공고(鞏固)히 하여야 된다 하시고 | ||
+ | 모든 외사(外事)에 참여(參與)하시었다. 적(敵) 나남사단(羅南師團)의 | ||
+ | 국경수비대(國境守備隊)는 우리 독립군(獨立軍)의 월강(越江) 기습(奇襲)을 당(當)하여 많은 희생(犧牲)을 <fc # | ||
+ | 되어</ | ||
+ | 왔으며 그 야전적(野戰的) 만행(蠻行)은 교포(僑胞) 부락(部落)에 방화(放火)하고 천인(天人)이 공노(共怒)할 무고(無辜)한 | ||
+ | 아녀자(兒女子)까지도 총검(銃剣) 살상(殺傷)을 자행(恣行)하였다. 우리 군대(軍隊)는 지리(地利)를 잘 이용(利用)하여 | ||
+ | 사살(射殺) 격퇴(擊退)를 여러차례 하고 있었다. \\ | ||
+ | |||
+ | \_1919년(一九一九年) 3월(三月) 1일(一日) 대한독립선언(大韓獨立宣言) | ||
+ | 운동(運動)이 국내외(國內外)에서 궐기(蹶起)되여 세계(世界) 열강(列强)에게 한민족(韓民族)의 자주독립성(自主獨立性)을 | ||
+ | 선양(宣揚)하고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정부(臨時政府)를 상해(上海) 불조계내(佛租界內)에 수립(樹立)하게 되었다. | ||
+ | 만주(滿洲)에서는 임정(臨政)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설치(設置)하고 이상룡(李相龍) 선생(先生)이 독판(督辦)으로 추대(推戴)되어 상해(上海)와 만주(滿洲) 간(間)에 긴밀(緊密)한 유대(紐帶)를 가지고 있었다. | ||
+ | 선생(先生)은 차(此) 단합(團合)에 | ||
+ | 있어서도 박경종(朴慶鍾) 주진수(朱鎭壽) 제(諸) 동지(同志)와 함께 진력(盡力)하시었고 기후(其後) 상해(上海) 임정(臨政)에 | ||
+ | 가셔서 제(諸) 요인(要人)을 만나 자금조달(資金調達)의 중임(重任)을 분담(分担)하고 길림성(吉林省)으로 | ||
+ | 돌아 오셨다. \\ | ||
+ | |||
+ | \_1923년(一九二三年)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서 밀양인(密陽人) 윤필환(尹弼煥)에게 자금조달(資金調達)의 | ||
+ | 임무(任務)를 맡겨 국내(國內)로 보내었다. 대구(大邱)에서 구연흠(具年欽)과 양근환(梁槿煥)이 합력(合力)하여 | ||
+ | 소기(所期)의 목적(目的)을 달성(達成)하고 양근환(梁槿煥)은 상해(上海)로 구연흠(具年欽)은 영안현(寧安縣)에서 선생(先生)과 | ||
+ | 상봉(相逢)하고 윤필환(尹弼煥)은 밀양(密陽)에서 적경(敵警)에 체포(逮捕)되어 대구형무소(大邱刑務所)에서 | ||
+ | 복역(服役)하였다. \\ | ||
+ | |||
+ | \_1925년(一九二五年) 상해(上海) 임정(臨政)에서 이상룡(李相龍) 선생(先生)을 국무령(國務領)으로 | ||
+ | 기용(起用)하게되어 선생(先生)은 이석주(李石洲) 장(丈)과 함께 상해(上海)로 향(向)하게 되니 모든 일에 | ||
+ | 청렴결백(淸廉潔白)한 국오(菊塢) 선생(先生)에게 재정(財政)의 중임(重任)을 맡아 보게 한 것이었다. | ||
+ | 한때 교통부(交通部) 차장(次長)으로 선생(先生)을 내정(內定)까지 하였으나 석주(石洲) 장(丈)은 3개월(三個月)만에 | ||
+ | 사퇴(辭退)함에 또 함께 길림성(吉林省) 서란(舒蘭)으로 돌아오서서 혈서(血書)로 국내(國內) 지인(知人)과 | ||
+ | 본댁(本宅)에까지 호소문(呼訴文)을 발송(發送)한 후(後) 유하현(柳河縣)으로 가셨다가 동년(同年) 8월(八月)에 | ||
+ | 국내(國內)로 | ||
+ | 잠입(潛入)하여 입수(入手)한 자금(資金)을 송치(送致)< | ||
+ | 경찰(警察)의 요시찰(要視察)을 받아 가면서 치료(治療)하고 계시었다. \\ | ||
+ | |||
+ | \_1927년(一九二七年) 2월(二月) 15일(十五日) | ||
+ | 당시(當時) 전국내(全國內) 각파(各派) 단체(團體)가 모든 분야(分野)의 편견(片見)에서 활동(活動)하던 15단체(十五團体)를 | ||
+ | 발전적(發展的)으로 해소(解消)하고 민족(民族) 단일협동전선(單一協同戰線)인 신간회(新幹會)가 창립(創立)되어 | ||
+ | 3만(三萬) | ||
+ | 회원(會員)에 위원장(委員長)으로 김병로(金炳魯) 변호사(辨護士)가 추선(推選)되고 우리 울진(蔚珍)에서는 국오(菊塢) | ||
+ | 선생(先生)이 지부장(支部長)으로 선임(選任)되어 모든 새 사업(事業)에 건투(健鬪)하여 왔으나 과감(果敢)한 | ||
+ | 항일운동(抗日運動)은 일제(日帝)의 만주사변(滿洲事變) 시발(始發)의 계기(契機)로 1931년(一九三一年) 5월(五月) 17일(十七日) | ||
+ | 전국적(全國的)으로 적경(敵警)의 강제폐쇄(强制廢鎖)를 당(當)하였다. 선생(先生)은 기후(其後) 금강산(金剛山)에 | ||
+ | 은거(隱居)하여 국제(國際) 추세(趨勢)를 관망(觀望)하던 중(中) 국외(國外) 풍상(風霜) 10여재(十餘載)에 병약(病弱)되신 몸은 중태(重態)로서 귀가(歸家)하여 광복(光復)의 기쁨을 못 보시고 차세(此世)를 영별(永別)하시니 때는 | ||
+ | 단기(檀紀) 4172년(四一七二年) 서기(西紀) 1939년(一九三九年) 기묘(己卯) 3월(三月) 7일(七日)이고 | ||
+ | 향년(享年) 66세(六十六歲)이시며 | ||
+ | 장례식(葬禮式)은 사회장(社會葬)으로 하려 하였으나 경찰(警察)의 불허(不許)로 향파임장(鄕派任葬)으로 | ||
+ | 거행(擧行)하였는데 경찰(警察)은 당일(當日) 사복순사(私服巡査)를 파견(派遣)하여 종일(終日)토록 감시(監視)하였던 | ||
+ | 것이다. \\ | ||
+ | |||
+ | \_선생(先生)의 숭고(崇高)하신 구국정기(救國正氣)를 정신적(精神的) 교훈(敎訓)으로 후인(後人)에게 귀감(龜鑑) | ||
+ | 삼기 위(爲)하여 본(本) 기념사업위원회(紀念事業委員會) 위원장(委員長) 안용훈(安鎔薰) 총무(總務) 안용청(安鎔淸) 남종술(南鍾述)과 종시(終始) 경기(經紀)하여 여(與) 김병두(金柄斗) 김성출(金盛出) 박명암(朴命岩) | ||
+ | 황덕기(黃德基) 황재헌(黃載憲) 황덕출(黃德出) 안경석(安慶錫) 황재홍(黃載洪) | ||
+ | 황봉석(黃奉錫) 안병국(安柄國) 안병찬(安柄贊) 황지성(黃志聲) 황태산(黃泰山) | ||
+ | 황재훈(黃載勳) 황윤석(黃允錫) 황재열(黃載烈) 문중대표(門中代表) 황재우(黃載宇) 황의석(黃義錫) | ||
+ | <fc # | ||
+ | <fc # | ||
+ | 및 | ||
+ | 위원(委員) 제위(諸位)와 황씨(黃氏) 첨종(僉宗)으로 반세육력(半歲勠力)에 구재벌석(鳩財伐石)하여 | ||
+ | 울진근고사(蔚珍近古史) 전영경(田永璟) 찬(撰)으로 | ||
+ | 영기불후(永記不朽) 기광운이(其光云爾)라\\ | ||
+ | \_\_단기(檀紀) 4309(四三〇九) 병진(丙辰) 10월(十月)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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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18.1748423060.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28 18:04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