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국오황만영의열비명(愛國志士菊塢黃萬英義烈碑銘)
애국지사(愛國志士) 국오(菊塢) 황만영(黃萬英) 의열비명(義烈碑銘)
애국지사(愛國志士) 국오(菊塢) 황만영(黃萬英) 선생(先生)의 관(貫)은 평해(平海)요
자(字)는 응칠(應七)이며 원조(遠祖) 유(有) 한학사(漢學士) 휘(諱) 낙(洛)의 후(后)요
행(行) 공조참의(工曹參議) 증(贈) 이조판서(吏曹判書) 해월(海月) 휘(諱) 여일(汝一)의
10세손(十世孫)이며 휘(諱) 수(洙)의 자(子)라.
단기(檀紀) 4206년(四二〇六年) 을해(乙亥)
6월(六月) 20일(二十日) 원(元) 평해군(平海郡) 사동(沙銅)에서 전가(傳家) 충의(忠義)
속에서 태어나셨다. 관인(寬仁)한 도량(度量)과 강직(剛直)한 지조(志操)는 모든 신망(信望)을 한 몸에
지녔으며 소년(少年) 학방(學房) 시(時)부터 문필(文筆)이 웅휘(雄輝)하고 특(特)히
신구(新舊) 병서(兵書)에 조예(造詣)가
깊으시었다.
때는 과거(過去) 반세기(半世紀) 동안 일제(日帝)의 침략(侵略)은 이 나라를 짓밟고
한민족(韓民族)을 여지(餘地)없이 압박(壓迫)하는 이래(以來) 수(數)많은 애국지사(愛國志士)는 항일구국(抗日救國)에
생명(生命)과 재산(財産)을 던져 가면서 중첩(重疊)한 신고(辛苦)로 침략자(侵略者)를 저항(抵抗)하여 온
기중(其中) 한 사람이신 국오선생(菊塢先生)님이시다.
일제(日帝)는 서기(西紀) 1894년(一八九四年) 청일전쟁(淸日戰爭)과
1904년(一九〇四年) 노일전쟁(露日戰爭)에 전승(戰勝)을 득(得)한 여위(餘威)의 마수(魔手)는 한국(韓國)을 침략(侵略)함이
노골화(露骨化)되어 소위(所謂)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인 치욕(恥辱)의 권약(勸約)을 받게되자 국내(國內)의
풍운(風雲)은 날이 갈수록 험악일로(險惡一路)로 되어갔다.
각처(各處)에서 의병(義兵)이 봉기(蜂起)하자
선생(先生)께서 솔선적(率先的)으로 엽전(葉錢) 8백냥(八百兩)을 내둔(來屯) 중(中)인 성익현(成益鉉) 호좌진(胡佐眞) 진(陣)에
희사(喜捨) 격려(激勵)하였고, 누차(累次) 상경(上京)하여 양기탁(梁起鐸)공(公) 외(外) 제사(諸士)들과 구국(救國)의 대의(大義)를 논(論)하고 독립협회(獨立協會)와 관동학회(關東學會)의 일원(一員)이 되었고 위선(爲先) 구국(救國)의 길이
국민교육(國民敎育)을 신문명개화(新文明開化)로 지향(指向)하여야 된다 하시고, 울진(蔚珍) 주진수(朱鎭壽) 동지(同志)의
매화만흥학교(梅花晩興學校) 설립(設立)과 동시(同時) 1907년(一九○七年) 평해군(平海郡) 최초(最初)로 사동대흥학교(沙銅大興學校)를
사재(私財)로 창설(創設)하고 영재(英材)를 배양(培養)하여 오시다가, 1910년(一九一○年) 경술(庚戌) 8월(八月) 29일(二十
九日) 민족(民族) 사상(史上) 최대(最大) 오점(汚点)인 한일합방(韓日合邦)의 국치(國恥)를 당(當)하자 적괴(敵魁)는 양(兩) 학교(學校)를
배일(排日)의 온상(溫床)이라 하여 모두 폐쇄(閉鎖)하였다.
선생(先生)은 실국(失國)을 당(當)한 분한(憤恨)을
좌이대사(坐而待死)할 때가 아니라 생각(生覺)하시고 1911년(一九一一年) 국내(國內) 항일지사(抗日志士)들과
성맥(聲脈)을 상통(相通)하여 만주(滿洲) 서북(西北) 양(兩) 간도(間島)를 이민(移民) 영농(營農)과 독립군(獨立軍) 양성(養成) 근거지(根據地)로
택정(擇定)하고 의병(義兵) 잔여부대(殘餘部隊)와 함께 농호(農戶) 이주(移住)가 시작(始作)되었다. 위선(爲先)
인접군(隣接郡)
제(諸) 동지(同志)인 안동(安東)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영해(寧海) 만성(晩醒) 박경종(朴慶鐘), 울진(蔚珍) 백운(白雲) 주진수(朱鎭壽), 평해(平海) 일오(一唔) 황병문(黃炳文), 백랑(白浪) 안규원(安奎源) 외(外) 제공(諸公)의 선두(先頭) 영도(領導)로 일거(一擧) 수수백호(數數百戶)가 도만(渡滿)하여 연강(沿江) 제현(諸縣)에 정착(定着)하면서 만인(滿人) 토지(土地)를 조자임대(租子賃貸)로 영농(營農)하고 학교(學校)도 설립(設立)하였다.
후방(後方)의 이러한 모든 준비(準備)에 선생(先生)은 재정원조(財政援助)를 계속(繼續)하시었으며 그동안 적(敵) 헌병(憲兵) 망양(望洋) 분견소(分遣所)에 누차(累次) 호출(呼出) 당(當)하여 감금(監禁)도
되었었다.
1912년(一九一二年)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 도착(到着)하여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 선생(先生)을
도와 신흥학교(新興學校) 설립(設立)에 재정적(財政的) 후원(後援)을 하여 가면서 영농(營農) 주선(周旋)에도 심혈(心血)을
다하시었다.
1913년(一九一三年) 춘(春)에 재서비리아(在西比利亞) 대한민국의회(大韓民國議會)에 참석(參席)하시어
문창범(文昌範) 외(外) 제(諸) 동지(同志)들과 결사구국(決死救國)을 맹약(盟約)하고 니코리스크에서
이상설(李相卨) 선생(先生)을 문병(問病)한 후(後) 동만(東滿) 귀로(歸路)에 동청철도(東淸鐵道)로 제제합이(齊齊哈爾)에
올라가 흑룡강성도(黑龍江省都)에서 장종창(張宗昌) 독군(督軍)을 예방(禮訪)하고 필담(筆談)으로 한국독립운동(韓國獨立運動)에 관(關)한 심회(心懷)를 통(通)한 바 장독군(張督軍)은 필답(筆答)으로
조선형제일양적극보한족(朝鮮兄弟一樣的極保韓族)이라하고
후대(厚待)도 받으셨다.
1914년(一九一四年) 1차세계대전(一次世界大戰)이 발발(勃發)함에 선생(先生)은 독립군(獨立軍)
투사(鬪士)들과 자주 자리를 같이하면서 약(弱)한 힘이나마 우리는 더욱 공고(鞏固)히 하여야 된다 하시고
모든 외사(外事)에 참여(參與)하시었다. 적(敵) 나남사단(羅南師團)의
국경수비대(國境守備隊)는 우리 독립군(獨立軍)의 월강(越江) 기습(奇襲)을 당(當)하여 많은 희생(犧牲)을 당(當)하게
되어 차(此)의 보복전(報復戰)으로 연강(沿江) 독립군(獨立軍)에게 끊임없는 수색(搜索) 토벌(討伐)을 가(加)하여
왔으며 그 야전적(野戰的) 만행(蠻行)은 교포(僑胞) 부락(部落)에 방화(放火)하고 천인(天人)이 공노(共怒)할 무고(無辜)한
아녀자(兒女子)까지도 총검(銃剣) 살상(殺傷)을 자행(恣行)하였다. 우리 군대(軍隊)는 지리(地利)를 잘 이용(利用)하여
사살(射殺) 격퇴(擊退)를 여러차례 하고 있었다.
1919년(一九一九年) 3월(三月) 1일(一日) 대한독립선언(大韓獨立宣言)
운동(運動)이 국내외(國內外)에서 궐기(蹶起)되여 세계(世界) 열강(列强)에게 한민족(韓民族)의 자주독립성(自主獨立性)을
선양(宣揚)하고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정부(臨時政府)를 상해(上海) 불조계내(佛租界內)에 수립(樹立)하게 되었다.
만주(滿洲)에서는 임정(臨政)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설치(設置)하고 이상룡(李相龍) 선생(先生)이 독판(督辦)으로 추대(推戴)되어 상해(上海)와 만주(滿洲) 간(間)에 긴밀(緊密)한 유대(紐帶)를 가지고 있었다.
선생(先生)은 차(此) 단합(團合)에
있어서도 박경종(朴慶鍾) 주진수(朱鎭壽) 제(諸) 동지(同志)와 함께 진력(盡力)하시었고 기후(其後) 상해(上海) 임정(臨政)에
가셔서 제(諸) 요인(要人)을 만나 자금조달(資金調達)의 중임(重任)을 분담(分担)하고 길림성(吉林省)으로
돌아 오셨다.
1923년(一九二三年)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서 밀양인(密陽人) 윤필환(尹弼煥)에게 자금조달(資金調達)의
임무(任務)를 맡겨 국내(國內)로 보내었다. 대구(大邱)에서 구연흠(具年欽)과 양근환(梁槿煥)이 합력(合力)하여
소기(所期)의 목적(目的)을 달성(達成)하고 양근환(梁槿煥)은 상해(上海)로 구연흠(具年欽)은 영안현(寧安縣)에서 선생(先生)과
상봉(相逢)하고 윤필환(尹弼煥)은 밀양(密陽)에서 적경(敵警)에 체포(逮捕)되어 대구형무소(大邱刑務所)에서
복역(服役)하였다.
1925년(一九二五年) 상해(上海) 임정(臨政)에서 이상룡(李相龍) 선생(先生)을 국무령(國務領)으로
기용(起用)하게되어 선생(先生)은 이석주(李石洲) 장(丈)과 함께 상해(上海)로 향(向)하게 되니 모든 일에
청렴결백(淸廉潔白)한 국오(菊塢) 선생(先生)에게 재정(財政)의 중임(重任)을 맡아 보게 한 것이었다.
한때 교통부(交通部) 차장(次長)으로 선생(先生)을 내정(內定)까지 하였으나 석주(石洲) 장(丈)은 3개월(三個月)만에
사퇴(辭退)함에 또 함께 길림성(吉林省) 서란(舒蘭)으로 돌아오서서 혈서(血書)로 국내(國內) 지인(知人)과
본댁(本宅)에까지 호소문(呼訴文)을 발송(發送)한 후(後) 유하현(柳河縣)으로 가셨다가 동년(同年) 8월(八月)에
국내(國內)로
잠입(潛入)하여 입수(入手)한 자금(資金)을 송치(送致)한 후(後)에 신병(身病)이 인발(因發)하여 자택(自宅)에서
경찰(警察)의 요시찰(要視察)을 받아 가면서 치료(治療)하고 계시었다.
1927년(一九二七年) 2월(二月) 15일(十五日)
당시(當時) 전국내(全國內) 각파(各派) 단체(團體)가 모든 분야(分野)의 편견(片見)에서 활동(活動)하던 15단체(十五團体)를
발전적(發展的)으로 해소(解消)하고 민족(民族) 단일협동전선(單一協同戰線)인 신간회(新幹會)가 창립(創立)되어
3만(三萬)
회원(會員)에 위원장(委員長)으로 김병로(金炳魯) 변호사(辨護士)가 추선(推選)되고 우리 울진(蔚珍)에서는 국오(菊塢)
선생(先生)이 지부장(支部長)으로 선임(選任)되어 모든 새 사업(事業)에 건투(健鬪)하여 왔으나 과감(果敢)한
항일운동(抗日運動)은 일제(日帝)의 만주사변(滿洲事變) 시발(始發)의 계기(契機)로 1931년(一九三一年) 5월(五月) 17일(十七日)
전국적(全國的)으로 적경(敵警)의 강제폐쇄(强制廢鎖)를 당(當)하였다. 선생(先生)은 기후(其後) 금강산(金剛山)에
은거(隱居)하여 국제(國際) 추세(趨勢)를 관망(觀望)하던 중(中) 국외(國外) 풍상(風霜) 10여재(十餘載)에 병약(病弱)되신 몸은 중태(重態)로서 귀가(歸家)하여 광복(光復)의 기쁨을 못 보시고 차세(此世)를 영별(永別)하시니 때는
단기(檀紀) 4172년(四一七二年) 서기(西紀) 1939년(一九三九年) 기묘(己卯) 3월(三月) 7일(七日)이고
향년(享年) 66세(六十六歲)이시며
장례식(葬禮式)은 사회장(社會葬)으로 하려 하였으나 경찰(警察)의 불허(不許)로 향파임장(鄕派任葬)으로
거행(擧行)하였는데 경찰(警察)은 당일(當日) 사복순사(私服巡査)를 파견(派遣)하여 종일(終日)토록 감시(監視)하였던
것이다.
선생(先生)의 숭고(崇高)하신 구국정기(救國正氣)를 정신적(精神的) 교훈(敎訓)으로 후인(後人)에게 귀감(龜鑑)
삼기 위(爲)하여 본(本) 기념사업위원회(紀念事業委員會) 위원장(委員長) 안용훈(安鎔薰) 총무(總務) 안용청(安鎔淸) 남종술(南鍾述)과 종시(終始) 경기(經紀)하여 여(與) 김병두(金柄斗) 김성출(金盛出) 박명암(朴命岩)
황덕기(黃德基) 황재헌(黃載憲) 황덕출(黃德出) 안경석(安慶錫) 황재홍(黃載洪)
황봉석(黃奉錫) 안병국(安柄國) 안병찬(安柄贊) 황지성(黃志聲) 황태산(黃泰山)
황재훈(黃載勳) 황윤석(黃允錫) 황재열(黃載烈) 문중대표(門中代表) 황재우(黃載宇) 황의석(黃義錫)
온계황씨(溫溪黃氏) 문중대표(門中代表) 황경곤(黃景坤) 황익흠(黃翼欽) 이만기(李萬麒) 황대봉(黃大鳳)
황용학(黃龍學) 서정백(徐廷伯) 제동중학교 대표이사 장성업(張聖業) 영천황씨종중회(永川黃氏宗中會) 영양석물 공장장 황조석(黃造錫)
및
위원(委員) 제위(諸位)와 황씨(黃氏) 첨종(僉宗)으로 반세육력(半歲勠力)에 구재벌석(鳩財伐石)하여
울진근고사(蔚珍近古史) 전영경(田永璟) 찬(撰)으로
영기불후(永記不朽) 기광운이(其光云爾)라
단기(檀紀) 4309(四三〇九) 병진(丙辰) 10월(十月) 일(日) 국오선생기념사업위원회(菊塢先生紀念事業委員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