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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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애국지사(愛國志士) 국오(菊塢) 황만영(黃萬英) 선생(先生)의 관(貫)은 평해(平海)요 | \_애국지사(愛國志士) 국오(菊塢) 황만영(黃萬英) 선생(先生)의 관(貫)은 평해(平海)요 | ||
자(字)는 응칠(應七)이며 원조(遠祖) 유(有) 한학사(漢學士) 휘(諱) 낙(洛)의 후(后)요 | 자(字)는 응칠(應七)이며 원조(遠祖) 유(有) 한학사(漢學士) 휘(諱) 낙(洛)의 후(后)요 | ||
- | 행(行) 공조참의(工曹參議) 증(贈) 이조판서(吏曹判書) 해월(海月) 휘(諱) 여일(汝一)의 | + | 행(行) 공조참의(工曹參議) 증(贈) |
- | 10세손(十世孫)이며 휘(諱) 수(洙)의 자(子)라. 단기(檀紀) 4206년(四二〇六年) 을해(乙亥) | + | 10세손(十世孫)이며 휘(諱) 수(洙)의 자(子)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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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_단기(檀紀) | ||
6월(六月) 20일(二十日) 원(元) 평해군(平海郡) 사동(沙銅)에서 전가(傳家) 충의(忠義) | 6월(六月) 20일(二十日) 원(元) 평해군(平海郡) 사동(沙銅)에서 전가(傳家) 충의(忠義) | ||
속에서 태어나셨다. 관인(寬仁)한 도량(度量)과 강직(剛直)한 지조(志操)는 모든 신망(信望)을 한 몸에 | 속에서 태어나셨다. 관인(寬仁)한 도량(度量)과 강직(剛直)한 지조(志操)는 모든 신망(信望)을 한 몸에 | ||
지녔으며 소년(少年) 학방(學房) 시(時)부터 문필(文筆)이 웅휘(雄輝)하고 특(特)히 | 지녔으며 소년(少年) 학방(學房) 시(時)부터 문필(文筆)이 웅휘(雄輝)하고 특(特)히 | ||
신구(新舊) 병서(兵書)에 조예(造詣)가 | 신구(新舊) 병서(兵書)에 조예(造詣)가 | ||
- | 깊으시었다. 때는 과거(過去) 반세기(半世紀) 동안 일제(日帝)의 침략(侵略)은 이 나라를 짓밟고 | + | 깊으시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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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_때는 과거(過去) 반세기(半世紀) 동안 일제(日帝)의 침략(侵略)은 이 나라를 짓밟고 | ||
한민족(韓民族)을 여지(餘地)없이 압박(壓迫)하는 이래(以來) 수(數)많은 애국지사(愛國志士)는 항일구국(抗日救國)에 | 한민족(韓民族)을 여지(餘地)없이 압박(壓迫)하는 이래(以來) 수(數)많은 애국지사(愛國志士)는 항일구국(抗日救國)에 | ||
생명(生命)과 재산(財産)을 던져 가면서 중첩(重疊)한 신고(辛苦)로 침략자(侵略者)를 저항(抵抗)하여 온 | 생명(生命)과 재산(財産)을 던져 가면서 중첩(重疊)한 신고(辛苦)로 침략자(侵略者)를 저항(抵抗)하여 온 | ||
- | 기(其) 중(中) 한 사람이신 국오선생(菊塢先生)님이시다. 일제(日帝)는 서기(西紀) 1894년(一八九四年) 청일전쟁(淸日戰爭)과 | + | 기중(其中) 한 사람이신 국오선생(菊塢先生)님이시다. |
- | 1904년(一九〇四年) 노일전쟁(露日戰爭)에 | + | |
- | 노골화(露骨化)되어 소위(所謂)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인 치욕(恥辱)의 권약(勸約)을 받게되자 국내(國內)의 | + | \_일제(日帝)는 서기(西紀) 1894년(一八九四年) 청일전쟁(淸日戰爭)과 |
- | 풍운(風雲)은 날이 갈수록 험악일로(險惡一路)로 되어갔다. 각처(各處)에서 의병(義兵)이 봉기(蜂起)하자 | + | 1904년(一九〇四年) 노일전쟁(露日戰爭)에 전승(戰勝)을 득(得)한 여위(餘威)의 마수(魔手)는 한국(韓國)을 침략(侵略)함이 |
+ | 노골화(露骨化)되어 소위(所謂)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인 치욕(恥辱)의 | ||
+ | 풍운(風雲)은 날이 갈수록 험악일로(險惡一路)로 되어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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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_각처(各處)에서 의병(義兵)이 봉기(蜂起)하자 | ||
선생(先生)께서 솔선적(率先的)으로 엽전(葉錢) 8백냥(八百兩)을 내둔(來屯) 중(中)인 성익현(成益鉉) 호좌진(胡佐眞) 진(陣)에 | 선생(先生)께서 솔선적(率先的)으로 엽전(葉錢) 8백냥(八百兩)을 내둔(來屯) 중(中)인 성익현(成益鉉) 호좌진(胡佐眞) 진(陣)에 | ||
희사(喜捨) 격려(激勵)하였고, | 희사(喜捨) 격려(激勵)하였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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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재(私財)로 창설(創設)하고 영재(英材)를 배양(培養)하여 오시다가, | 사재(私財)로 창설(創設)하고 영재(英材)를 배양(培養)하여 오시다가, | ||
九日) 민족(民族) 사상(史上) 최대(最大) 오점(汚点)인 한일합방(韓日合邦)의 국치(國恥)를 당(當)하자 적괴(敵魁)는 양(兩) 학교(學校)를 | 九日) 민족(民族) 사상(史上) 최대(最大) 오점(汚点)인 한일합방(韓日合邦)의 국치(國恥)를 당(當)하자 적괴(敵魁)는 양(兩) 학교(學校)를 | ||
- | 배일(排日)의 온상(溫床)이라 하여 모두 폐쇄(閉鎖)하였다. 선생(先生)은 실국(失國)을 당(當)한 분한(憤恨)을 | + | 배일(排日)의 온상(溫床)이라 하여 모두 폐쇄(閉鎖)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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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_선생(先生)은 실국(失國)을 당(當)한 분한(憤恨)을 | ||
좌이대사(坐而待死)할 때가 아니라 생각(生覺)하시고 1911년(一九一一年) 국내(國內) 항일지사(抗日志士)들과 | 좌이대사(坐而待死)할 때가 아니라 생각(生覺)하시고 1911년(一九一一年) 국내(國內) 항일지사(抗日志士)들과 | ||
성맥(聲脈)을 상통(相通)하여 만주(滿洲) 서북(西北) 양(兩) 간도(間島)를 이민(移民) 영농(營農)과 독립군(獨立軍) 양성(養成) 근거지(根據地)로 | 성맥(聲脈)을 상통(相通)하여 만주(滿洲) 서북(西北) 양(兩) 간도(間島)를 이민(移民) 영농(營農)과 독립군(獨立軍) 양성(養成) 근거지(根據地)로 | ||
택정(擇定)하고 의병(義兵) 잔여부대(殘餘部隊)와 함께 농호(農戶) 이주(移住)가 시작(始作)되었다. 위선(爲先) | 택정(擇定)하고 의병(義兵) 잔여부대(殘餘部隊)와 함께 농호(農戶) 이주(移住)가 시작(始作)되었다. 위선(爲先) | ||
인접군(隣接郡) | 인접군(隣接郡) | ||
- | 제(諸) 동지(同志)인 안동(安東)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 + | 제(諸) 동지(同志)인 안동(安東)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
- | 되었었다. | + | |
+ | \_후방(後方)의 이러한 모든 준비(準備)에 선생(先生)은 재정원조(財政援助)를 계속(繼續)하시었으며 그동안 적(敵) 헌병(憲兵) 망양(望洋) 분견소(分遣所)에 누차(累次) 호출(呼出) 당(當)하여 감금(監禁)도 | ||
+ | 되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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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_1912년(一九一二年)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 도착(到着)하여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 선생(先生)을 | ||
도와 신흥학교(新興學校) 설립(設立)에 재정적(財政的) 후원(後援)을 하여 가면서 영농(營農) 주선(周旋)에도 심혈(心血)을 | 도와 신흥학교(新興學校) 설립(設立)에 재정적(財政的) 후원(後援)을 하여 가면서 영농(營農) 주선(周旋)에도 심혈(心血)을 | ||
- | 다하시었다. | + | 다하시었다. |
- | 문창범(文昌範) 외(外) 제(諸) 동지(同志)들과 결사구국(決死救國)을 맹약(盟約)하고 니코키스크에서 | + | |
+ | \_1913년(一九一三年) 춘(春)에 재서비리아(在西比利亞) 대한민국의회(大韓民國議會)에 참석(參席)하시어 | ||
+ | 문창범(文昌範) 외(外) 제(諸) 동지(同志)들과 결사구국(決死救國)을 맹약(盟約)하고 니코리스크에서 | ||
이상설(李相卨) 선생(先生)을 문병(問病)한 후(後) 동만(東滿) 귀로(歸路)에 동청철도(東淸鐵道)로 제제합이(齊齊哈爾)에 | 이상설(李相卨) 선생(先生)을 문병(問病)한 후(後) 동만(東滿) 귀로(歸路)에 동청철도(東淸鐵道)로 제제합이(齊齊哈爾)에 | ||
- | 올라가 | + | 올라가 |
조선형제일양적극보한족(朝鮮兄弟一樣的極保韓族)이라하고 | 조선형제일양적극보한족(朝鮮兄弟一樣的極保韓族)이라하고 | ||
- | 후대(厚待)도 받으셨다. | + | 후대(厚待)도 받으셨다. |
+ | |||
+ | \_1914년(一九一四年) 1차세계대전(一次世界大戰)이 발발(勃發)함에 선생(先生)은 독립군(獨立軍) | ||
투사(鬪士)들과 자주 자리를 같이하면서 약(弱)한 힘이나마 우리는 더욱 공고(鞏固)히 하여야 된다 하시고 | 투사(鬪士)들과 자주 자리를 같이하면서 약(弱)한 힘이나마 우리는 더욱 공고(鞏固)히 하여야 된다 하시고 | ||
모든 외사(外事)에 참여(參與)하시었다. 적(敵) 나남사단(羅南師團)의 | 모든 외사(外事)에 참여(參與)하시었다. 적(敵) 나남사단(羅南師團)의 | ||
- | 국경수비대(國境守備隊)는 우리 독립군(獨立軍)의 월강(越江) 기습(奇襲)을 당(當)하여 많은 희생(犧牲)을 당(當)하게 | + | 국경수비대(國境守備隊)는 우리 독립군(獨立軍)의 월강(越江) 기습(奇襲)을 당(當)하여 많은 희생(犧牲)을 |
- | 되어 차(此)의 보복전(報復戰)으로 연강(沿江) 독립군(獨立軍)에게 끊임없는 수색(搜索) 토벌(討伐)을 가(加)하여 | + | 되어</ |
왔으며 그 야전적(野戰的) 만행(蠻行)은 교포(僑胞) 부락(部落)에 방화(放火)하고 천인(天人)이 공노(共怒)할 무고(無辜)한 | 왔으며 그 야전적(野戰的) 만행(蠻行)은 교포(僑胞) 부락(部落)에 방화(放火)하고 천인(天人)이 공노(共怒)할 무고(無辜)한 | ||
아녀자(兒女子)까지도 총검(銃剣) 살상(殺傷)을 자행(恣行)하였다. 우리 군대(軍隊)는 지리(地利)를 잘 이용(利用)하여 | 아녀자(兒女子)까지도 총검(銃剣) 살상(殺傷)을 자행(恣行)하였다. 우리 군대(軍隊)는 지리(地利)를 잘 이용(利用)하여 | ||
- | 사살(射殺) 격퇴(擊退)를 여러차례 하고 있었다. | + | 사살(射殺) 격퇴(擊退)를 여러차례 하고 있었다. |
- | 一九一九年三月一日大韓獨立宣言 | + | |
- | 運動이 國內外에서 蹶起되여 世界列強에게 韓民族의 自主獨立性을 | + | \_1919년(一九一九年) 3월(三月) 1일(一日) 대한독립선언(大韓獨立宣言) |
- | 宣揚하고 大韓民國臨時政府를 上海佛租界內에 樹立하게 되였다 滿 | + | 운동(運動)이 국내외(國內外)에서 |
- | 洲에서는 臨政西路軍政署를 設置하고 李相龍先生이 督辨으로 推戴 | + | 선양(宣揚)하고 |
- | 되여 上海와 滿洲間에 緊密한 紐帶를 가지고 있었다 先生은 此團合에 | + | 만주(滿洲)에서는 |
- | 있어서도 朴慶鍾朱鎭壽諸同志와 함께 盡力하시었고 其後上海臨政에 | + | 선생(先生)은 차(此) 단합(團合)에 |
- | 가셔서 諸要人을 만나 資金調達의 重任을 分担하고 吉林省으로 | + | 있어서도 |
- | 라오셨다 一九二三年柳河縣三源浦에서 密陽人尹弼煥에게 資金調達의 | + | 가셔서 |
- | 任務를 맡겨 國內로 보내였다 大邱에서 具年欽과 梁槿煥이 合力하여 | + | 돌아 |
- | 所期의 目的을 達成하고 梁槿煥은 上海로 具年欽은 寧安縣에서 先生과 | + | |
- | 相逢하고 尹弼煥은 密陽에서 敵警에 逮捕되여 大邱刑務所에서 服役 | + | \_1923년(一九二三年)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서 |
- | 하였다 一九二五年上海臨政에서 李相龍先生을 國務領으로 起用하게 | + | 임무(任務)를 맡겨 |
- | 되여 先生은 李石洲丈과 함께 上海로 向하게 되니 모든 일에 淸廉 | + | 소기(所期)의 목적(目的)을 달성(達成)하고 |
+ | 상봉(相逢)하고 | ||
+ | 복역(服役)하였다. \\ | ||
+ | |||
+ | \_1925년(一九二五年) 상해(上海) 임정(臨政)에서 | ||
+ | 기용(起用)하게되어 선생(先生)은 이석주(李石洲) 장(丈)과 함께 | ||
+ | 청렴결백(淸廉潔白)한 국오(菊塢) 선생(先生)에게 재정(財政)의 중임(重任)을 맡아 보게 한 것이었다. | ||
+ | 한때 교통부(交通部) 차장(次長)으로 선생(先生)을 내정(內定)까지 하였으나 석주(石洲) 장(丈)은 3개월(三個月)만에 | ||
+ | 사퇴(辭退)함에 또 함께 길림성(吉林省) 서란(舒蘭)으로 돌아오서서 혈서(血書)로 국내(國內) 지인(知人)과 | ||
+ | 본댁(本宅)에까지 호소문(呼訴文)을 발송(發送)한 후(後) 유하현(柳河縣)으로 가셨다가 동년(同年) 8월(八月)에 | ||
+ | 국내(國內)로 | ||
+ | 잠입(潛入)하여 입수(入手)한 자금(資金)을 송치(送致)< | ||
+ | 경찰(警察)의 요시찰(要視察)을 받아 가면서 치료(治療)하고 계시었다. \\ | ||
- | 潔白한 菊塢先生에게 負政의 重任을 맡아 보게 한 것이였다 한때 交 | + | \_1927년(一九二七年) 2월(二月) 15일(十五日) |
- | 通部次長으로 先生을 內定까지 하였으나 石洲丈은 三個月만에 辭退 | + | 당시(當時) 전국내(全國內) 각파(各派) 단체(團體)가 모든 |
- | 함에 또 함께 吉林省舒蘭으로 도라오서서 血書로 國內知人과 本宅 | + | 발전적(發展的)으로 |
- | 에까지 呼訴文을 發送한後 柳河縣으로 가셨다가 同年八月에 國內로 | + | 3만(三萬) |
- | 潛入하여 入手한 資金을 送致한 後에 身病이 因發하여 自宅에서 警 | + | 회원(會員)에 위원장(委員長)으로 |
- | 察의 要視察을 받어가면서 治療하고 게시였다 | + | 선생(先生)이 지부장(支部長)으로 |
- | 當時全國內各派團體가 모든 分野의 片見에서 活動하든 十五団体를 | + | 항일운동(抗日運動)은 일제(日帝)의 만주사변(滿洲事變) 시발(始發)의 계기(契機)로 1931년(一九三一年) 5월(五月) 17일(十七日) |
- | 發展的으로 解消하고 民族單一協同戰線인 新幹會가 創立되여 三萬 | + | 전국적(全國的)으로 |
- | 會員에 委員長으로 金炳魯辨護士가 推選되고 우리 蔚珍에서는 菊塢 | + | 은거(隱居)하여 |
- | 先生이 支部長으로 選任되어 모든 새 事業에 健鬪하여 왔으나 果敢한 | + | 단기(檀紀) 4172년(四一七二年) 서기(西紀) 1939년(一九三九年) 기묘(己卯) 3월(三月) 7일(七日)이고 |
- | 抗日運動은 日帝의 滿洲事變始發의 契機로 一九三一年五月十七日 | + | 향년(享年) 66세(六十六歲)이시며 |
- | 全國的으로 敵警의 强制廢鎖를 當하였다 先生은 其後金剛山에 隱居 | + | 장례식(葬禮式)은 사회장(社會葬)으로 하려 하였으나 경찰(警察)의 불허(不許)로 향파임장(鄕派任葬)으로 |
- | 하여 國際趨勢를 觀望하든中國外風霜十餘載에 病弱되신 몸은 重態 | + | 거행(擧行)하였는데 경찰(警察)은 당일(當日) 사복순사(私服巡査)를 파견(派遣)하여 종일(終日)토록 감시(監視)하였던 |
- | 로셔 歸家하여 光復의 기쁨을 못보시고 此世를 永別하시니 | + | 것이다. \\ |
- | 紀四一七二年西紀一九三九年 己卯三月七日이고 享年六十六歲이시며 | + | \_선생(先生)의 숭고(崇高)하신 |
- | 葬禮式은 社會葬으로 하려 하였으나 警察의 不許로 鄕派任葬으로 | + | 삼기 |
- | 擧行하였는데 警察은 當日私服巡査를 派遣하여 終日토록 監視하였든 | + | 황덕기(黃德基) 황재헌(黃載憲) 황덕출(黃德出) 안경석(安慶錫) 황재홍(黃載洪) |
- | 것이다 | + | 황봉석(黃奉錫) 안병국(安柄國) 안병찬(安柄贊) 황지성(黃志聲) 황태산(黃泰山) |
- | 삼기 爲하여 本紀念事業委員會委員長 安鎔薰總務安鎔淸南鍾述과 終 | + | 황재훈(黃載勳) 황윤석(黃允錫) 황재열(黃載烈) 문중대표(門中代表) 황재우(黃載宇) 황의석(黃義錫) |
- | 始經紀하여 與金柄斗金盛出朴命岩黃德基黃載憲黃德出安慶錫黃載洪 | + | <fc # |
- | 黃奉錫安柄國安柄贊黃志聲黃泰山黃載勳黃允錫黃載烈門中代表黃載 | + | <fc # |
- | 宇黃義錫溫溪黃氏門中代表黃景坤黃翼欽李萬麒黃大鳳 및 委員諸位와 | + | 및 |
- | 黃氏僉宗으로 半歲勠力에 鳩財伐石하여 蔚珍近古史田永璟撰으로 | + | 위원(委員) 제위(諸位)와 황씨(黃氏) 첨종(僉宗)으로 |
- | 記不朽其光云爾라\\ | + | 울진근고사(蔚珍近古史) 전영경(田永璟) 찬(撰)으로 |
+ | 영기불후(永記不朽) 기광운이(其光云爾)라\\ | ||
\_\_단기(檀紀) 4309(四三〇九) 병진(丙辰) 10월(十月) | \_\_단기(檀紀) 4309(四三〇九) 병진(丙辰) 10월(十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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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18.1748832562.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6/02 11:49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