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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024 [2025/05/11 14:35] – created ssio2c3-024 [2025/05/22 13:36] (현재) ssi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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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申年봄에豊基大宗永來가나에게書信을보내大同修譜의뜻을表하되吾宗의先譜를칭찬하지않음이아니다修譜 +===갑술보서(甲戌譜序)=== 
-後世古의變革이이미極에達하여宗族이東西各地로물흐르듯흩어져一定한定處없이살아姓名마저分明치못한形便 +<WRAP 33em justify> 
-이며時俗은옛날風俗이무너져큰始祖의무덤에는거칠은티끌과雜草가繁盛하여때가와도譜牒을밝게닦지못할때는 +<typo ff:'한양해서'> 
-곧列祖의系統이神堯와混同될것이며眉州의族이長史에어두울것이리니어찌老成한先覺의깊은뜻이경계하고두려 +\_**甲戌譜序**\\ 
-울바가아닐까하고격려해왔었다 +\_임신년(壬申年봄에 풍기(豊基) 대종(大宗) 영래(永來)씨가 나에게 서신(書信)을 보내 대동수보(大同修譜) 
-내가이序文을지어宗中에謝過코져한다본래이사람이못쓸사람의世上行脚을한바는없으나十年동안을遼西에서風+뜻을 표()하되 오종(吾宗)의 선보(先譜)를 칭찬하지 않음이 아니다
 +수보(修譜) 후() <fc:red>세고(世古)</fc>의 변혁(變革)이 이미 극()에 달()하여 종족(宗族)이 동서(東西) 각지(各地)로 물 흐르듯 
 +흩어져 일정(一定)한 정처(定處)없이 살아 성명(姓名)마저 분명(分明)치 못한 형편(形便)이며
 +시속(時俗)은 옛날 풍속(風俗)이 무너져 큰 시조(始祖)의 무덤에는 거칠은 티끌과 
 +잡초(雜草)가 번성(繁盛)하여 때가 와도 보첩(譜牒)을 밝게 닦지 못할 때는, 
 +곧 열조(列祖)의 계통(系統)이 신요(神堯)와 혼동(混同)될 것이며 미주(眉州)의 족()이 장사(長史)에 어두울 
 +것이리니어찌 노성(老成)한 선각(先覺)의 깊은 뜻이 경계하고 두려울 바가 
 +아닐까하고 격려해 왔었다.\\
  
-霜을 겪고 아무런 收穫 없이 뜬 세상을 헛되이 나그네 노릇만 하고 秋毫도 宗事에도움을 바치지 못한 것을 面目 없이 생각하노라. 이러한 사람이 오늘날 宗中의 莫重大事인 譜事에 참여하여 옳고 그름을 論議한다는 것이 不當하게 생각되며 또한 極 度로 財政이 어렵고 百姓의 기름이 이미 말랐음에 吾宗의 힘의 흡사 모래를 태워서 밥을 짓지 못함같은 두려움마저 느껴져 一時 주저한 바도 있었다. 그러나 이 大同修譜事는 宗中의 莫重大事요 또 언제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더욱이 한 사람의 所感으로 左右되는 바도 못되고 同族時運에도 關聯되는 重大問題인 만큼 宗議에 따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다시 誠意를 바치기로 決心하였다. 특히 大宗會를 月松先에서 開催하여 譜事를 決定하고 貫鄕을 重하게 여김을 좇아 譜廳을 月松 追遠에 두게 되니 더욱 聖스러운 일이며 衆意가 같고 멀거나 가까우나 말을 같이하며 전후 二個星霜을 지나 印版에 붙이게 되니 이 모두가 先代의 靈魂이 돌보시어 姓孫들을 묵묵히 일하도록 加護하신 恩德으로 생각한다. 가까이 있는 사람은 壇에 羅列하였으며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은 記錄文書에 밝게 나타났으니 비록 나라를 버리고 故을 떠나 東西로 흩어져 사는 사람일지라도 平海先系는 잃지 않게 되었다. +\_내가 이 서문(序文)을 지어 종중(宗中)에 사과(謝過)코져 한다. 본래 이 사람이 못쓸 사람의 
-대저 일의 貴重한 것은 처음 일을 꾀하는 데만 있지 않고 끝을 잘 매마치는 것이다. 三派大同이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前世에도 이룬 常事라고 할지나 時代의 變遷이 人心으로 하여 이런 일에 너무 無關心케 되어 있고 또 經濟가 군색한데 焦燥한 心思를 태워가며 이 修譜를 完成한 것은 執事들의 괴로움을 무릅쓰고 함께 誠意를 기울인 結晶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에 와서 얼마나 痛快함을 느끼는가? 옛 사람이 이르기를 같은 뜻으로 배를 타면 河水를 건너서 胡越에도 갈 수 있으며 한마음으로 나간다면 蒼海의 風浪도 거침없다 하였으니 이제 吾宗은 綱常이 무너져 孝悌忠臣의 道를 찾아볼 수 없는 末世요 겨는 東西南北 各地로 흩어져 자주 消息조차 들을 수 없는 現實이지만 오늘날 全國에 散居하는 사람들이 過去先祖들이 하시던 일을 본받아 完成하였으니 흐린 날처럼 막연하게라도 敦睦을 하는 것이곧 魯衛의 親함과 같은 것인즉 이미 族譜를 함께한 이상 相互警戒하고 가다듬어 나의 孝悌로 저의 沛를 反省케하여 共存共榮으로써 宗族을 일으켜 세우고 나아가서는 滄生을 구제하는 데 본보이는 것이곧 河水에 배를 타고 마음을 한가지로 하여 西쪽 언덕에 닿기로 期約하는 것인즉 이렇게 될 때 平海의 族이 욕됨이 없을 것이며 또한 可히 오늘날 大同의 本意라 할 것이다.\\ +세상행각(世上行脚)을 한 바는 없으나 십년(十年) 동안을 요서(遼西)에서 풍상(風)을 겪고  
-\_\_甲戌 四月 日 裔孫 萬英 謹序+아무런 수확(收穫없이 뜬 세상을 헛되이 나그네 노릇만 하고  
 +추호(秋毫)도 종사(宗事)에 도움을 바치지 못한 것을 면목(面目없이 생각하노라.  
 +이러한 사람이 오늘날 종중(宗中)의 막중대사(莫重大事)인 보사(譜事)에 참여하여 옳고  
 +그름을 논의(論議)한다는 것이 부당(不當)하게 생각되며또한 극도(極度)로 재정(財政)이  
 +어렵고 백성(百姓)의 기름이 이미 말랐음에, 오종(吾宗)의 힘이 흡사 모래를 태워서  
 +밥을 짓지 못함 같은 두려움마저 느껴져 일시(一時주저한 바도 있었다.  
 +그러나 이 대동수보(大同修譜) 사()는 종중(宗中)의 막중대사(莫重大事)요 또 언제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더욱이 한 사람의 소감(所感)으로 좌우(左右)되는 바도 못되고  
 +동족(同族) 시운(時運)에도 관련(關聯)되는 중대(重大) 문제(問題)인 만큼 종의(宗議)에 따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다시 성의(誠意)를 바치기로 결심(決心)하였다.  
 +특히 대종회(大宗會)를 월송(月松) 선재(齋)에서 개최(開催)하여 보사(譜事)를 결정(決定)하고 관향(貫鄕)을  
 +중()하게 여김을 좇아 보청(譜廳)을 월송(月松) 추원재(追遠齋)에 두게 되니 더욱  
 +성()스러운 일이며, 중의(衆意)가 같고 멀거나 가까우나 말을 같이하며  
 +전후 2개(二個) 성상(星霜)을 지나 인판(印版)에 붙이게 되니이 모두가 선대(先代)의  
 +영혼(靈魂)이 돌보시어 성손(姓孫)들을 묵묵히 일하도록 가호(加護)하신 은덕(恩德)으로 생각한다. \\ 
 + 
 +\_가까이 있는 사람은 단재(齋)에 나열(羅列)하였으며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은 기록(記錄) 문서(文書)에 밝게 나타났으니비록 나라를 버리고  
 +고향(鄕)을 떠나 동서(東西)로 흩어져 사는 사람일지라도 평해(平海) 선계(先系)는  
 +잃지 않게 되었다.\\ 
 + 
 +\_대저 일의 귀중(貴重)한 것은 처음 일을 꾀하는 데만 있지 않고  
 +끝을 잘 매 마치는 것이다. 3파(三派) 대동(大同)이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전세(前世)에도 이룬 상사(常事)라고 할지나 시대(時代)의 변천(變遷)이 인심(人心)으로 하여  
 +이런 일에 너무 무관심(無關心)케 되어 있고 또 경제(經濟)가 군색한데  
 +초조(焦燥)한 심사(心思)를 태워가며 이 수보(修譜)를 완성(完成)한 것은 집사(執事)들의  
 +괴로움을 무릅쓰고 함께 성의(誠意)를 기울인 결정(結晶)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에 와서 얼마나 통쾌(痛快)함을 느끼는가?  
 +옛 사람이 이르기를 같은 뜻으로 배를 타면 하수(河水)를 건너서  
 +호월(胡越)에도 갈 수 있으며한마음으로 나간다면 창해(蒼海)의 풍랑(風浪)도  
 +거침없다 하였으니이제 오종(吾宗)은 강상(綱常)이 무너져 효제충신(孝悌忠臣)의  
 +도()를 찾아볼 수 없는 말세(末世)요 겨는 동서남북(東西南北) 각지(各地)로 흩어져  
 +자주 소식(消息)조차 들을 수 없는 현실(現實)이지만오늘날 전국(全國)에  
 +산거(散居)하는 사람들이 과거(過去) 선조(先祖)들이 하시던 일을 본받아  
 +완성(完成)하였으니 흐린 날처럼 막연하게라도 돈목(敦睦)을 하는 것이  
 +곧 노형(魯衛)의 친()함과 같은 것인 즉 이미 족보(族譜)를 함께한 이상  
 +상호(相互) 경계(警戒)하고 가다듬어 나의 효제(孝悌)로 저의  
 +전패(顚)((전패(顚沛): 엎어지고 자빠지는 것.))를 반성(反省)케 하여  
 +공존공영(共存共榮)으로써 종족(宗族)을 일으켜 세우고 나아가서는 창생(滄生)을  
 +구제하는 데 본 보이는 것이 곧 하수(河水)에 배를 타고 마음을  
 +한가지로 하여 서(西)쪽 언덕에 닿기로 기약(期約)하는 것인 즉 이렇게  
 +될 때 평해(平海)의 족()이 욕됨이 없을 것이며 또한 가()히  
 +오늘날 대동(大同)의 본(本意)라 할 것이다.\\ 
 +\_\_갑술(甲戌) 4월(四月)  일() 예손(裔孫) 만영(萬英)((황만영(黃萬英): 1875년(고종 12) 6월 20일∼1939년 4월 25일.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자는 응칠(應七)이고, 호는 국오(菊塢). 본관은 평해(平海), 본적은 현 경상북도 울진군(蔚珍郡)이다.\\ 1905년(광무 9) 일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전국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당시 울진군에는 성익현(成益鉉)이 일으킨 의진(義陣)이 주둔하였는데, 황만영(黃萬英)은 이곳에 군자금으로 800냥을 지원하였다. 907년(융희 1)에 항일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新民會)에 가담하였다.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사재를 털어서 고향인 울진군 기성면(箕城面) 사동리(沙銅里)에 대흥학교(大興學校)를 설립하였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1912년 만주(滿洲)로 망명하였다. 이후 이곳에서 이시영(李始榮) 등과 함께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설립하고, 재정업무를 담당하였다. 1913년에는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순회강연을 실행하며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군자금 확보를 위해 노력하였다. 1927년에는 신간회(新幹會) 울진지부(蔚珍支部)의 지부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愛族章)이 추서되었다.\\ 출처: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 한국학중앙연구원)) 근서(謹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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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024.1746941749.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11 14:35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