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술보서(甲戌譜序)
甲戌譜序
임신년(壬申年) 봄에 풍기(豊基) 대종(大宗) 영래(永來)씨가 나에게 서신(書信)을 보내 대동수보(大同修譜)의
뜻을 표(表)하되 오종(吾宗)의 선보(先譜)를 칭찬하지 않음이 아니다.
수보(修譜) 후(後) 세고(世古)의 변혁(變革)이 이미 극(極)에 달(達)하여 종족(宗族)이 동서(東西) 각지(各地)로 물 흐르듯
흩어져 일정(一定)한 정처(定處)없이 살아 성명(姓名)마저 분명(分明)치 못한 형편(形便)이며,
시속(時俗)은 옛날 풍속(風俗)이 무너져 큰 시조(始祖)의 무덤에는 거칠은 티끌과
잡초(雜草)가 번성(繁盛)하여 때가 와도 보첩(譜牒)을 밝게 닦지 못할 때는,
곧 열조(列祖)의 계통(系統)이 신요(神堯)와 혼동(混同)될 것이며 미주(眉州)의 족(族)이 장사(長史)에 어두울
것이리니. 어찌 노성(老成)한 선각(先覺)의 깊은 뜻이 경계하고 두려울 바가
아닐까하고 격려해 왔었다.
내가 이 서문(序文)을 지어 종중(宗中)에 사과(謝過)코져 한다. 본래 이 사람이 못쓸 사람의
세상행각(世上行脚)을 한 바는 없으나 십년(十年) 동안을 요서(遼西)에서 풍상(風霜)을 겪고
아무런 수확(收穫) 없이 뜬 세상을 헛되이 나그네 노릇만 하고
추호(秋毫)도 종사(宗事)에 도움을 바치지 못한 것을 면목(面目) 없이 생각하노라.
이러한 사람이 오늘날 종중(宗中)의 막중대사(莫重大事)인 보사(譜事)에 참여하여 옳고
그름을 논의(論議)한다는 것이 부당(不當)하게 생각되며, 또한 극도(極度)로 재정(財政)이
어렵고 백성(百姓)의 기름이 이미 말랐음에, 오종(吾宗)의 힘이 흡사 모래를 태워서
밥을 짓지 못함 같은 두려움마저 느껴져 일시(一時) 주저한 바도 있었다.
그러나 이 대동수보(大同修譜) 사(事)는 종중(宗中)의 막중대사(莫重大事)요 또 언제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더욱이 한 사람의 소감(所感)으로 좌우(左右)되는 바도 못되고
동족(同族) 시운(時運)에도 관련(關聯)되는 중대(重大) 문제(問題)인 만큼 종의(宗議)에 따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다시 성의(誠意)를 바치기로 결심(決心)하였다.
특히 대종회(大宗會)를 월송(月松) 선재(先齋)에서 개최(開催)하여 보사(譜事)를 결정(決定)하고 관향(貫鄕)을
중(重)하게 여김을 좇아 보청(譜廳)을 월송(月松) 추원재(追遠齋)에 두게 되니 더욱
성(聖)스러운 일이며, 중의(衆意)가 같고 멀거나 가까우나 말을 같이하며
전후 2개(二個) 성상(星霜)을 지나 인판(印版)에 붙이게 되니, 이 모두가 선대(先代)의
영혼(靈魂)이 돌보시어 성손(姓孫)들을 묵묵히 일하도록 가호(加護)하신 은덕(恩德)으로 생각한다.
가까이 있는 사람은 단재(壇齋)에 나열(羅列)하였으며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은 기록(記錄) 문서(文書)에 밝게 나타났으니, 비록 나라를 버리고
고향(故鄕)을 떠나 동서(東西)로 흩어져 사는 사람일지라도 평해(平海) 선계(先系)는
잃지 않게 되었다.
대저 일의 귀중(貴重)한 것은 처음 일을 꾀하는 데만 있지 않고
끝을 잘 매 마치는 것이다. 3파(三派) 대동(大同)이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전세(前世)에도 이룬 상사(常事)라고 할지나 시대(時代)의 변천(變遷)이 인심(人心)으로 하여
이런 일에 너무 무관심(無關心)케 되어 있고 또 경제(經濟)가 군색한데
초조(焦燥)한 심사(心思)를 태워가며 이 수보(修譜)를 완성(完成)한 것은 집사(執事)들의
괴로움을 무릅쓰고 함께 성의(誠意)를 기울인 결정(結晶)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에 와서 얼마나 통쾌(痛快)함을 느끼는가?
옛 사람이 이르기를 같은 뜻으로 배를 타면 하수(河水)를 건너서
호월(胡越)에도 갈 수 있으며, 한마음으로 나간다면 창해(蒼海)의 풍랑(風浪)도
거침없다 하였으니, 이제 오종(吾宗)은 강상(綱常)이 무너져 효제충신(孝悌忠臣)의
도(道)를 찾아볼 수 없는 말세(末世)요 겨레는 동서남북(東西南北) 각지(各地)로 흩어져
자주 소식(消息)조차 들을 수 없는 현실(現實)이지만, 오늘날 전국(全國)에
산거(散居)하는 사람들이 과거(過去) 선조(先祖)들이 하시던 일을 본받아
완성(完成)하였으니 흐린 날처럼 막연하게라도 돈목(敦睦)을 하는 것이
곧 노형(魯衛)의 친(親)함과 같은 것인 즉 이미 족보(族譜)를 함께한 이상
상호(相互) 경계(警戒)하고 가다듬어 나의 효제(孝悌)로 저의
전패(顚沛)1)를 반성(反省)케 하여
공존공영(共存共榮)으로써 종족(宗族)을 일으켜 세우고 나아가서는 창생(滄生)을
구제하는 데 본 보이는 것이 곧 하수(河水)에 배를 타고 마음을
한가지로 하여 서(西)쪽 언덕에 닿기로 기약(期約)하는 것인 즉 이렇게
될 때 평해(平海)의 족(族)이 욕됨이 없을 것이며 또한 가(可)히
오늘날 대동(大同)의 본의(本意)라 할 것이다.
갑술(甲戌) 4월(四月) 일(日) 예손(裔孫) 만영(萬英)2) 근서(謹序)
1905년(광무 9) 일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전국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당시 울진군에는 성익현(成益鉉)이 일으킨 의진(義陣)이 주둔하였는데, 황만영(黃萬英)은 이곳에 군자금으로 800냥을 지원하였다. 907년(융희 1)에 항일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新民會)에 가담하였다.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사재를 털어서 고향인 울진군 기성면(箕城面) 사동리(沙銅里)에 대흥학교(大興學校)를 설립하였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1912년 만주(滿洲)로 망명하였다. 이후 이곳에서 이시영(李始榮) 등과 함께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설립하고, 재정업무를 담당하였다. 1913년에는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순회강연을 실행하며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군자금 확보를 위해 노력하였다. 1927년에는 신간회(新幹會) 울진지부(蔚珍支部)의 지부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愛族章)이 추서되었다.
출처: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