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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024 [2025/05/15 07:54] ssio2c3-024 [2025/05/22 13:36] (현재) ssio2
줄 33: 줄 33:
 \_가까이 있는 사람은 단재(壇齋)에 나열(羅列)하였으며 먼 곳에 있는  \_가까이 있는 사람은 단재(壇齋)에 나열(羅列)하였으며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은 기록(記錄) 문서(文書)에 밝게 나타났으니, 비록 나라를 버리고  사람들은 기록(記錄) 문서(文書)에 밝게 나타났으니, 비록 나라를 버리고 
-고향(故)을 떠나 동서(東西)로 흩어져 사는 사람일지라도 평해(平海) 선계(先系)는 +고향(故)을 떠나 동서(東西)로 흩어져 사는 사람일지라도 평해(平海) 선계(先系)는 
 잃지 않게 되었다.\\ 잃지 않게 되었다.\\
  
줄 52: 줄 52:
 곧 노형(魯衛)의 친(親)함과 같은 것인 즉 이미 족보(族譜)를 함께한 이상  곧 노형(魯衛)의 친(親)함과 같은 것인 즉 이미 족보(族譜)를 함께한 이상 
 상호(相互) 경계(警戒)하고 가다듬어 나의 효제(孝悌)로 저의  상호(相互) 경계(警戒)하고 가다듬어 나의 효제(孝悌)로 저의 
-전패(沛)((전패(顚沛): 엎어지고 자빠지는 것.))를 반성(反省)케 하여 +전패(沛)((전패(顚沛): 엎어지고 자빠지는 것.))를 반성(反省)케 하여 
 공존공영(共存共榮)으로써 종족(宗族)을 일으켜 세우고 나아가서는 창생(滄生)을  공존공영(共存共榮)으로써 종족(宗族)을 일으켜 세우고 나아가서는 창생(滄生)을 
 구제하는 데 본 보이는 것이 곧 하수(河水)에 배를 타고 마음을  구제하는 데 본 보이는 것이 곧 하수(河水)에 배를 타고 마음을 
줄 58: 줄 58:
 될 때 평해(平海)의 족(族)이 욕됨이 없을 것이며 또한 가(可)히  될 때 평해(平海)의 족(族)이 욕됨이 없을 것이며 또한 가(可)히 
 오늘날 대동(大同)의 본의(本意)라 할 것이다.\\ 오늘날 대동(大同)의 본의(本意)라 할 것이다.\\
-\_\_갑술(甲戌) 4월(四月)  일(日) 예손(裔孫) 만영(萬英)((황만영(黃萬英): 1875년(고종 12) 6월 20일∼1939년 4월 25일.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자는 응칠(應七)이고, 호는 국오(菊塢). 본관은 평해(平海), 본적은 현 경상북도 울진군(蔚珍郡)이다.\\ 1905년(광무 9) 일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전국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당시 울진군에는 성익현(成益鉉)이 일으킨 의진(義陣)이 주둔하였는데, 황만영(黃萬英)은 이곳에 군자금으로 800냥을 지원하였다. 907년(융희 1)에 항일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新民會)에 가담하였다.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사재를 털어서 고향인 울진군 기성면(箕城面) 사동리(沙銅里)에 대흥학교(大興學校)를 설립하였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1912년 만주(滿洲)로 망명하였다. 이후 이곳에서 이시영(李始榮) 등과 함께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설립하고, 재정업무를 담당하였다.\\ 1913년에는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순회강연을 실행하며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군자금 확보를 위해 노력하였다.\\ 1927년에는 신간회(新幹會) 울진지부(蔚珍支部)의 지부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으로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愛族章)이 추서되었다.\\ 출처: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 한국학중앙연구원)) 근서(謹序)+\_\_갑술(甲戌) 4월(四月)  일(日) 예손(裔孫) 만영(萬英)((황만영(黃萬英): 1875년(고종 12) 6월 20일∼1939년 4월 25일.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자는 응칠(應七)이고, 호는 국오(菊塢). 본관은 평해(平海), 본적은 현 경상북도 울진군(蔚珍郡)이다.\\ 1905년(광무 9) 일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전국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당시 울진군에는 성익현(成益鉉)이 일으킨 의진(義陣)이 주둔하였는데, 황만영(黃萬英)은 이곳에 군자금으로 800냥을 지원하였다. 907년(융희 1)에 항일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新民會)에 가담하였다.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사재를 털어서 고향인 울진군 기성면(箕城面) 사동리(沙銅里)에 대흥학교(大興學校)를 설립하였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1912년 만주(滿洲)로 망명하였다. 이후 이곳에서 이시영(李始榮) 등과 함께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설립하고, 재정업무를 담당하였다. 1913년에는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순회강연을 실행하며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군자금 확보를 위해 노력하였다. 1927년에는 신간회(新幹會) 울진지부(蔚珍支部)의 지부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愛族章)이 추서되었다.\\ 출처: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 한국학중앙연구원)) 근서(謹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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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024.1747263283.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15 07:54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