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3-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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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 충절공(忠節公) 휘(諱) 서(瑞)의 후손(後孫)이라. | 고려(高麗) 충절공(忠節公) 휘(諱) 서(瑞)의 후손(後孫)이라. | ||
이조(李朝)에 와서는 휘(諱) 옥숭(玉崇)이라는 어른이 계셔 | 이조(李朝)에 와서는 휘(諱) 옥숭(玉崇)이라는 어른이 계셔 | ||
- | 한성판관(漢城判官)이며 휘(諱) 보곤(輔坤)을 낳으시니 | + | 한성판관(漢城判官)이며, 휘(諱) 보곤(輔坤)을 낳으시니 |
- | 생원(生員)이요 생원(生員)은 휘(諱) 우(瑀)를 낳으시니 | + | 생원(生員)이요, 생원(生員)은 휘(諱) 우(瑀)를 낳으시니 |
- | 목사(牧使)요 목사(牧使)는 휘(諱) 응청(應淸)을 낳으시니 | + | 목사(牧使)요, 목사(牧使)는 휘(諱) 응청(應淸)을 낳으시니 |
세상(世上)이 대해(大海) 선생(先生)이라 일컬으며 진사(進士)를 | 세상(世上)이 대해(大海) 선생(先生)이라 일컬으며 진사(進士)를 | ||
하셨고 효자(孝子)로 나라에서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表彰)을 | 하셨고 효자(孝子)로 나라에서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表彰)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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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사(享祀)하니 이 어른이 곧 공(公)의 11대조(十一代祖)이시다. | 향사(享祀)하니 이 어른이 곧 공(公)의 11대조(十一代祖)이시다. | ||
휘(諱) 명계(明溪)는 나라에서 공조참의(工曹參議)로 증작(贈爵)을 | 휘(諱) 명계(明溪)는 나라에서 공조참의(工曹參議)로 증작(贈爵)을 | ||
- | 받았고 그 후(後) 4대(四代)를 지나서 휘(諱) 한창(漢昌) | + | 받았고, 그 후(後) 4대(四代)를 지나서 휘(諱) 한창(漢昌) |
호(號) 청부(聽夫)는 학행(學行)이 높아 방리(邦里)에서 | 호(號) 청부(聽夫)는 학행(學行)이 높아 방리(邦里)에서 | ||
큰 존경(尊敬)을 받았으며 그의 유명(有名)한 유교(遺橋)가 있다.\\ | 큰 존경(尊敬)을 받았으며 그의 유명(有名)한 유교(遺橋)가 있다.\\ | ||
\_고조(高祖)의 휘(諱)는 재화(載華)요 증조(曾祖)의 휘(諱)는 | \_고조(高祖)의 휘(諱)는 재화(載華)요 증조(曾祖)의 휘(諱)는 | ||
- | 배곤(配坤)이요 조(祖)의 휘(諱)는 용구(龍九)요 | + | 배곤(配坤)이요, 조(祖)의 휘(諱)는 용구(龍九)요, |
고(考)의 휘(諱)는 도(濤)이니, | 고(考)의 휘(諱)는 도(濤)이니, | ||
있었다. 비(妣)는 경주(慶州) 이씨(李氏)니 | 있었다. 비(妣)는 경주(慶州) 이씨(李氏)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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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철종(哲宗) 기유(已酉) 6월(六月) 18일(十八日) 공(公)이 | \_철종(哲宗) 기유(已酉) 6월(六月) 18일(十八日) 공(公)이 | ||
- | 정명리(正明里) 제(第)에서 나시니 그 골상(骨相)이 기의(岐疑)하고 | + | 정명리(正明里) 제(第)에서 나시니, 그 골상(骨相)이 기의(岐疑)하고 |
울음소리가 우렁차서 대인공(大人公)이 심(甚)히 기이(奇異)하게 | 울음소리가 우렁차서 대인공(大人公)이 심(甚)히 기이(奇異)하게 | ||
- | 여기더니 점점(漸漸) 자라나서 처음으로 수학(受學)하게 되니 | + | 여기더니, 점점(漸漸) 자라나서 처음으로 수학(受學)하게 되니 |
그 재사(才思)가 민활(敏闊)하여 번거롭게 가르치지 않아도 | 그 재사(才思)가 민활(敏闊)하여 번거롭게 가르치지 않아도 | ||
곧 또렷하게 해득(解得)하는 것이 빠르더라. 하루는 여러 | 곧 또렷하게 해득(解得)하는 것이 빠르더라. 하루는 여러 | ||
아해(兒孩)들과 물가에 나가 놀다가 큰 뱀이 길 가운데 | 아해(兒孩)들과 물가에 나가 놀다가 큰 뱀이 길 가운데 | ||
- | 버젖이 있거늘 공(公)이 꾸짖어 말하되 이 어떠한 요물(妖物)이 | + | 버젖이 있거늘, 공(公)이 꾸짖어 말하되 이 어떠한 요물(妖物)이 |
감히 장부(丈夫)의 앞에서 길을 막느냐? 내가 곧 때려 죽일 | 감히 장부(丈夫)의 앞에서 길을 막느냐? 내가 곧 때려 죽일 | ||
것이로되 너 또한 살기를 좋아하는 생물(生物)임에 차마 | 것이로되 너 또한 살기를 좋아하는 생물(生物)임에 차마 | ||
- | 못 하겠노라 하고 드디어 그 뱀을 쫓아보내고 길을 걸어오는 | + | 못 하겠노라 하고, 드디어 그 뱀을 쫓아 보내고 길을 걸어오는 |
- | 것을 한 마을에 사는 어떤 노인(老人)이 이 같은 경황(景況)을 | + | 것을, 한 마을에 사는 어떤 노인(老人)이 이 같은 경황(景況)을 |
- | 보고 공(公)의 대인공(大人公)에게 아뢰니 공(公)이 말하기를 | + | 보고 공(公)의 대인공(大人公)에게 아뢰니, 공(公)이 말하기를 |
이 아이의 지기(志氣)가 범상(凡常)치 않으며 또한 생물(生物)에 | 이 아이의 지기(志氣)가 범상(凡常)치 않으며 또한 생물(生物)에 | ||
- | 대(對)하여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장래(將來) | + | 대(對)하여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장래(將來) |
많은 발전(發展)이 있을 것으로 믿으나 그 지기(志氣)가 | 많은 발전(發展)이 있을 것으로 믿으나 그 지기(志氣)가 | ||
너무 지나친 것을 근심치 않을 수 없어 적당(適當)한 | 너무 지나친 것을 근심치 않을 수 없어 적당(適當)한 | ||
편책(鞭策)으로서 교양(敎養)코져 하나 부자지간(父子之間)의 | 편책(鞭策)으로서 교양(敎養)코져 하나 부자지간(父子之間)의 | ||
은의(恩義)가 혹(或) 상(傷)할 것을 | 은의(恩義)가 혹(或) 상(傷)할 것을 | ||
- | 염려(念慮)하여 역자이교지(易子而敎之)((역자이교지(易子而敎之): | + | 염려(念慮)하여, 역자이교지(易子而敎之)((역자이교지(易子而敎之): |
말을 받아 사천(沙川) 남공(南公) 구한(九翰) 선생(先生)의 | 말을 받아 사천(沙川) 남공(南公) 구한(九翰) 선생(先生)의 | ||
문하(門下)에 입학(入學)시켜 수학(修學)케 하였다. | 문하(門下)에 입학(入學)시켜 수학(修學)케 하였다. | ||
남공(南公) 또한 가르치는 법(法)이 심(甚)히 엄(嚴)하여 | 남공(南公) 또한 가르치는 법(法)이 심(甚)히 엄(嚴)하여 | ||
매일(每日) 일정(一定)하게 연석(硏席)에서 훈회(訓晦)하니 | 매일(每日) 일정(一定)하게 연석(硏席)에서 훈회(訓晦)하니 | ||
- | 그 起居動作과 言行心思가 禮儀에 맞지 않은 것이 없게 되고 또 人 | + | 그 기거동작(起居動作)과 언행심사(言行心思)가 예의(禮儀)에 |
- | 品이 高尙해지며 態度마저 의연해지니 보는 사람들이 그 圓熟함에 놀라지 않는 이가 없더라 또 그 非凡한 재조로 熱心히 | + | 맞지 않은 것이 없게 되고 또 인품(人品)이 고상(高尙)해지며 |
- | 夫하게 되니 十五六歲에 經傳을 達通하고 特히 著述에 能爛하여 書堂에서 科擧豫習으로 試驗을 보게 되면 老少를 莫論하 | + | 태도(態度)마저 의연해지니 보는 사람들이 그 원숙(圓熟)함에 |
- | 고 많은 學徒中에 恒常 最優等에 뽑히는 고로 南公이 더욱 사랑하여 一時도 放過치 못하게 하니 漸漸 學問이 높아가며 또 깨 | + | 놀라지 않는 이가 없더라. 또 그 비범(非凡)한 재조로 |
- | 닫는 바 人生의 道를 하나하나 實踐에 옮기는데 힘쓰니 遠近 많은 선비들의 重望이 되었다 公이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先祖 | + | 공부(工夫)하게 되니 |
- | 께서 우리 後孫들에게 남긴 遺產은 勤學愼行이라는 문구를 文集에 실어 있거늘 家訓으로 傳하고 代代로 지켜오는 것인데 | + | 통달(達通)하고, 특(特)히 저술(著述)에 능란(能爛)하여 |
- | 지금 인들 어찌 이 無念의 敎訓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하였으며 그때의 한 고을 士友로서는 溟波李公壽權과 峰南安公宅善 | + | 서당(書堂)에서 |
- | 과 臺下張公柄같은 분들도 모두 두려운 벗들이라 春秋로 經典을 書院 또는 鄕校에서 講義할 때나 書院과 鄕校 職任을 遞任 | + | 보게 되면 |
- | 할 때는 반드시 公을 招待해 모시고 擧行하였다 | + | 항상(恒常) 최우등(最優等)에 뽑히는 고로, 남공(南公)이 |
- | 庚辰年에 大人公의 居憂로 初喪과 祭祀에 家禮대로 따랐으며 服을 마치자 연달아 內艱喪을 또 當하니 致哀盡禮를 前喪과 | + | 더욱 사랑하여 |
- | 꼭 같이하였다 服을 마친 後에도 初中으로 한달에 두번씩 省墓하고 每日 새벽에 일찍 일어나 冠服을 갖추고 祠堂 拜謁을 하 | + | 점점(漸漸) 학문(學問)이 높아가며, 또 깨닫는 바 인생(人生)의 |
- | 丙申年에는 倭敵에게 國母殺害事件이 生하니 全國民이 國母를 爲하여 義擧가 일어남에 公도 鄉兵을 거느리고 이 事件에 | + | 도(道)를 하나하나 |
- | 應하였더니 일을 成事치 못한 채 投獄되었는지라 公이 獄吏를 불러 종이와 붓을 가져오라 命하여 먼저 아전의 무리들의 간 | + | 많은 선비들의 |
+ | 말하기를, 우리 | ||
+ | 유산(遺産)은 근학신행(勤學愼行)이라는 문구를 | ||
+ | 실어 있거늘, 가훈(家訓)으로 | ||
+ | 지금인들 어찌 이 무념(無念)의 교훈(敎訓)을 저버릴 수 | ||
+ | 있겠는가 하였으며, 그때의 한 고을 | ||
+ | 명파(溟波) 이공(李公) 수권(壽權)과 봉남(峰南) 안공(安公) 택선(宅善)과 | ||
+ | 대하(臺下) 장공(張公) 병(柄)같은 분들도 모두 두려운 벗들이라, | ||
+ | 춘추(春秋)로 경전(經典)을 서원(書院) 또는 | ||
+ | 강의(講義)할 때나 | ||
+ | 체임(遞任)할 때는, 반드시 | ||
+ | 거행(擧行)하였다.\\ | ||
- | 사한것을치고다음에임금의살핌이밝지못한것을말하니獄吏가그事實을그고울원과營將에게놈하였더니兩官이모 | + | \_경진년(庚辰年)에 대인공(大人公)의 거우(居憂)로 초상(初喪)과 |
- | 두歎息하고이는세상에서求하기어려운人物이라하고도리어謝禮하며돌려보내니이後로부터公의聲名이날로더하 | + | 제사(祭祀)에 가례(家禮)대로 따랐으며, 복(服)을 마치자 |
- | 여멀고가까운文人豪傑들이다推重하며따르더라 | + | 연달아 내간상(內艱喪)을 또 당(當)하니 치애진례(致哀盡禮)를 |
- | 그리고이地方에새로오는官長들은반드시赴任하면 그문에이르러禮를들였다丁酉年에響山李先生晚燾氏가東海岸 | + | 전상(前喪)과 꼭 같이하였다. 복(服)을 마친 후(後)에도 |
- | 에旅行케되어먼저公을찾아와서三日間을留하게됨에公과學問과世上事를討論하고左右를돌아보며말하기를내가 | + | 초중(初中)으로 한 달에 두 번씩 성묘(省墓)하고 매일(每日) |
- | 朝廷에서많은사람들과접촉하였으되人品에있어서나學問에있어서公과같은분은많이보지못하였다公이萬若이海 | + | 새벽에 일찍 일어나 관복(冠服)을 갖추고 |
- | 邊벽지에살지않고서울에살아서出世에뜻을 두었다면國家의큰棟樑이되었을것이틀림없었을것이라하였다累世宗 | + | 하였다.\\ |
- | 楣로奉先接賓하는道와出入應酬하는節次를누가흠앙하지않으리요 | + | |
- | 先世墓道의顯刻하는일에있어서는寢食을잊고誠心과哀情으로努力하였으며또始祖의先壇에옛날부터齊宇나祭田 | + | |
- | 이없어恒常遺憾으로生覺해오던바宗人發과基達로더불어그規模와計劃을協議한후에各道各邑을두루다니면서비 | + | |
- | 바람을 무릅쓰고정성을다하여資源을모아完成하였더니나이더할수록添應이더심하여끝을맺지못하고世上을버렸 | + | |
- | 으니眞實로痛歎할 노릇이었다萬若몇해만壽命을더빌었더라도오늘날陳設되는簡略한奠需에 그치지않았을것이다 | + | |
- | 戊戌年에通文을發하여京鄉의大譜를淸安에서닦을때淸安은곧傍先祖襄武公의世居宗宅이다公이이일에都總監仕 | + | |
- | 의責任을지고莫重大事를敦篤히하여有終의美를거두었다그리고祭田이넉넉지못한것과宗宅이허물어진것을一切 | + | |
- | 새롭게넓히고修理하였으며또논과밭을얼마쯤마련하여宗家로하여금窘塞를免케하였다또始祖의壇祀에奠獻하는 | + | |
- | 것이자주改遞되는 것을未安히生覺하고宗中의公議로一定한節次를定하여施行케하였다 | + | |
- | 庚戌年에나라일이크게글러졌음에公이宗廟와社稷이빈터가된것을아프게여겨문을굳게닫고자취를 감추고남의부름에도參與하지않고날로高尙한風月泉石의詩를외우며그悲憤한餘生을보냈다戊午年四月十四日에寢室에서考終 | + | |
- | 하시니享年이七十이라訃音이나가자士友들이모두슬퍼하며말하기를德望이높은巨士가사라졌다하였다처음에峴 | + | |
- | 山西坐之原에葬事하였다가다시虎田先兆內左麓負乾之原에移奉하였다 | + | |
- | 公이莊重한資稟의品性을지니시고高邁한志氣를갖으시어지난날의岩落한氣概는큰出世를期待했으나때가아님을 | + | |
- | 自覺하고浮雲같은世上일에虛無하게左往右往하느니보다차라리家學淵源의아름다움에沈潛하여옛聖賢들이訓誥 | + | |
- | 하던글을琢磨하고힘써부지런히읽어修己治人하는道를實踐하는것이옳은길이라깨닫고나날이善하고義로운일이 | + | \_병신년(丙申年)에는 왜적(倭敵)에게 국모(國母) 살해사건(殺害事件)이 |
- | 면적다하여疏忽히하지않고行하는데努力하니몸에嚴하던氣運이漸漸너그럽고和平한대로나아가고嬌慢하게자랑 | + | 생(生)하니 전국민(全國民)이 국모(國母)를 위(爲)하여 의거(義擧)가 |
- | 하는뜻은漸漸溫順하고柔和한데로기우러져一言一行이남에게厓異함이없어서모든사람마다머리가수그러지고든 | + | 일어남에, |
- | 는사람마다欽慕하였으니眞實로學問의功이아니었더면어찌이러한人格의所有者가되었으리요 | + | 응(應)하였더니 일을 성사(成事)치 못한 채 투옥(投獄)되었는지라. |
- | 또自己의所見만을옳다하지않고남의意見을 그르다하지않고오직좋은일이며義로운것이면좋고行했으니깊은思誼 | + | 공(公)이 옥리(獄吏)를 불러 종이와 붓을 가져오라 명(命)하여, |
- | 가宗族에게높은信義가鄉黨에들어나큰宗事에있어서나丙申年國母義擧事件같은國事에있어서도鄉民들이믿고따 | + | 먼저 아전의 무리들의 간사한 것을 치고 다음에 임금의 살핌이 |
- | 라나라에도榮光되게하였다이같이 그의몸에쌓인것이이미厚한故로文辭로發하는것도또한깊고 그윽하며높고굳세 | + | 밝지 못한 것을 말하니, 옥리(獄吏)가 그 사실(事實)을 그 고을 원과 |
- | 어속된선비들이粗粕하고재치있는글과는다른文化的價值있는著述이적지않았는데累次의 兵火로燒失되고다만詩 | + | 영장(營將)에게 고(告)하였더니, |
- | 文몇篇만집에간수해있을뿐이다 | + | 탄식(歎息)하고 이는 세상에서 구(求)하기 어려운 인물(人物)이라 |
- | 配는順興安氏니浩善의女이며公보다十年먼저卒하고墓는집뒷山西坐之原에있다四男五女를두었는데長男은皐이 | + | 하고, 도리어 사례(謝禮)하며 돌려 보내니 이 후(後)로부터 |
- | 요다음은昶 | + | 공(公)의 성명(聲名)이 날로 더 하여, 멀고 가까운 |
- | 暭는아들이없어從弟曄의子載宇로嗣子를삼고女는務安朴鍾漢에게出嫁하였다昶이또한아들이없어族弟院의아들 | + | 문인호걸(文人豪傑)들이 다 추중(推重)하며 따르더라.\\ |
- | 尤坤으로뒤를이었고女은順興安承源順興安孟源坡平尹鈿에게出嫁했다嚥이一男一女를두었으니男은載舜이요女 | + | |
- | 는順興安鎔발에게出嫁하였다學이二男을두었는데載麟載鳳이다載字가四男三女를두었으니長男은德鎮이요다음 | + | \_그리고 이 지방(地方)에 새로 오는 관장(官長)들은 반드시 |
- | 은碩鎮漢鎮翼鎮이요女는新安朱宰壽에게出嫁하고나머지는어려서記錄하지아니한다 | + | 부임(赴任)하면 그 문에 이르러 예(禮)를 드렸다. |
- | 燦宗이이웃고을에살고있어公의훌륭한風彩와뛰어난擧動을잘듣고도한번도承拜치못함을恨스럽게여겼더니하루 | + | 정유년(丁酉年)에 향산(響山) 이(李) 선생(先生) 만도(晩燾)씨가 |
- | 는公의孫載宇가公의遺事를가지고나에게狀德之文을請하거늘스스로不足함을느껴敢히이런일은堪當치못하나일 | + | 동해안(東海岸)에 여행(旅行)케 되어 먼저 공(公)을 찾아와서 |
- | 찌기들으니人物評이山岳과같은氣像을갖추었고河海와같은度量을품어그넓고깊은모양이外形으로는누구나가까 | + | 3일간(三日間)을 유(留)하게 됨에, 공(公)과 학문(學問)과 |
- | 이할수있도록느끼게하고行實로는可히天下가본받을만한模範이된다하였다또한家狀에記錄된바가所聞과꼭같으 | + | 세상사(世上事)를 토론(討論)하고 좌우(左右)를 돌아보며 |
- | 므로드디어그大慨를꿰매어孝懇을막음하고또平日에仰慕의精誠에붙여이르노라.\\ | + | 말하기를 내가 조정(朝廷)에서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였으되 |
- | \_\_歲 己亥 暮春 上浣 大興 白燦宗 謹撰 | + | 인품(人品)에 있어서나 학문(學問)에 있어서 공(公)과 |
+ | 같은 분은 많이 보지 못하였다. 공(公)이 만약(萬若) 이 | ||
+ | 해변(海邊) 벽지에 살지 않고 서울에 살아서 출세(出世)에 | ||
+ | 뜻을 두었다면 국가(國家)의 큰 동량(棟樑)이 되었을 것이 | ||
+ | 틀림없었을 것이라 하였다. 누세(累世) 종미(宗楣)로 | ||
+ | 봉선접빈(奉先接賓)하는 도(道)와 출입응수(出入應酬)하는 | ||
+ | 절차(節次)를 누가 흠앙하지 않으리요.\\ | ||
+ | |||
+ | \_선세(先世) 묘도(墓道)의 현각(顯刻)하는 일에 있어서는 | ||
+ | 침식(寢食)을 잊고 성심(誠心)과 충정(哀情)으로 노력(努力)하였으며, | ||
+ | 또 시조(始祖)의 선단(先壇)에 옛날부터 재우(齋宇)나 | ||
+ | 제전(祭田)이 없어 항상(恒常) 유감(遺憾)으로 생각(生覺)해 | ||
+ | 오던 바, 종인(宗人) 발과 기달(基達)로 더불어 그 규모(規模)와 | ||
+ | 계획(計劃)을 협의(協議)한 후에, 각도(各道) 각읍(各邑)을 | ||
+ | 두루 다니면서 비바람을 무릅쓰고 정성을 다하여 자원(資源)을 | ||
+ | 모아 완성(完成)하였더니, | ||
+ | 심하여 끝을 맺지 못하고 세상(世上)을 버렸으니, | ||
+ | 진실(眞實)로 통탄(痛歎)할 노릇이었다. 만약(萬若) 몇 해만 | ||
+ | 수명(壽命)을 더 빌었더라도 오늘날 진설(陳設)되는 간략(簡略)한 | ||
+ | 전수(奠需)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 ||
+ | |||
+ | \_무술년(戊戌年)에 통문(通文)을 발(發)하여 경향(京鄕)의 | ||
+ | 대보(大譜)를 청안(淸安)에서 닦을 때, 청안(淸安)은 곧 | ||
+ | 방선조(傍先祖) 양무공(襄武公)의 세거(世居) 종택(宗宅)이다. | ||
+ | 공(公)이 이 일에 도총감사(都總監仕)의 책임(責任)을 지고 | ||
+ | 막중대사(莫重大事)를 돈독(敦篤)히 하여 유종(有終)의 | ||
+ | 미(美)를 거두었다. 그리고 제전(祭田)이 넉넉지 못한 것과 | ||
+ | 종택(宗宅)이 허물어진 것을, 일체(一切) | ||
+ | 새롭게 넓히고 수리(修理)하였으며 또 논과 밭을 얼마쯤 | ||
+ | 마련하여 종가(宗家)로 하여금 군색(窘塞)를 면(免)케 | ||
+ | 하였다. 또 시조(始祖)의 단사(壇祀)에 전헌(奠獻)하는 | ||
+ | 것이 자주 개체(改遞)되는 것을 미안(未安)히 생각(生覺)하고 | ||
+ | 종중(宗中)의 공의(公議)로 일정(一定)한 절차(節次)를 | ||
+ | 정(定)하여 시행(施行)케 하였다.\\ | ||
+ | |||
+ | \_경술년(庚戌年)에 나라 일이 크게 | ||
+ |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빈 터가 된 것을 아프게 여겨 | ||
+ | 문을 굳게 닫고 자취를 감추고 남의 부름에도 참여(參與)하지 | ||
+ | 않고 날로 고상(高尙)한 풍월천석(風月泉石)의 시(詩)를 | ||
+ | 외우며 그 비분(悲憤)한 여생(餘生)을 보냈다. \\ | ||
+ | |||
+ | \_무오년(戊午年) | ||
+ | 4월(四月) 14일(十四日)에 침실(寢室)에서 고종(考終)하시니 | ||
+ | 향년(享年)이 70(七十)이라. 부음(訃音)이 나가자 사우(士友)들이 | ||
+ | 모두 슬퍼하며 말하기를 덕망(德望)이 높은 거사(巨士)가 | ||
+ | 사라졌다 하였다. 처음에 현산(峴山) 유좌지원(西坐之原)에 | ||
+ | 장사(葬事)하였다가 다시 호전(虎田) 선조내(先兆內) | ||
+ | 좌록(左麓) 부건지원(負乾之原)에 이봉(移奉)하였다.\\ | ||
+ | |||
+ | \_공(公)이 장중(莊重)한 자품(資稟)의 품성(品性)을 지니시고 | ||
+ | 고매(高邁)한 지기(志氣)를 가지시어 지난 날의 암락(岩落)한 | ||
+ | 기개(氣槪)는 큰 출세(出世)를 기대(期待)했으나, | ||
+ | 자각(自覺)하고 부운(浮雲)같은 세상(世上) 일에 허무(虛無)하게 | ||
+ | 좌왕우왕(左往右往)하느니보다, | ||
+ | 아름다움에 침잠(沈潛)하여 옛 성현(聖賢)들이 訓誥하던 | ||
+ | 글을 탁마(琢磨)하고 힘써 부지런히 읽어 | ||
+ | 도(道)를 실천(實踐)하는 것이 옳은 길이라 깨닫고, 나날이 | ||
+ | 선(善)하고 | ||
+ | 행(行)하는데 | ||
+ | 점점(漸漸) 너그럽고 | ||
+ | 자랑하는 뜻은 | ||
+ | 일언일행(一言一行)이 남에게 | ||
+ | 사람마다 머리가 수그러지고 | ||
+ | 진실(眞實)로 학문(學問)의 공(功)이 아니었더면 어찌 이러한 | ||
+ | 인격(人格)의 소유자(所有者)가 되었으리요.\\ | ||
+ | |||
+ | \_또 자기(自己)의 소견(所見)만을 옳다하지 않고 남의 | ||
+ | 그르다 하지않고 오직 좋은 일이며 | ||
+ | 행(行)했으니, 깊은 | ||
+ | 향당(鄕黨)에 들어나 큰 종사(宗事)에 있어서나 | ||
+ | 국모의거사건(國母義擧事件) 같은 | ||
+ | 향민(鄕民)들이 믿고 따라 나라에도 | ||
+ | 이같이 그의 몸에 쌓인 것이 이미 | ||
+ | 발(發)하는 것도 또한 깊고 그윽하며 높고 굳세어 속된 선비들이 | ||
+ | 조박(粗粕)하고 재치있는 글과는 다른 | ||
+ | 저술(著述)이 적지 않았는데, 누차(累次)의 병화(兵火)로 | ||
+ | 소실(燒失)되고 다만 | ||
+ | |||
+ | \_배(配)는 순흥(順興) 안씨(安氏)니 호선(浩善) 여(女)이며, | ||
+ | 공(公)보다 | ||
+ | 유좌지원(西坐之原)에 있다. 4남5녀(四男五女)를 두었는데, | ||
+ | 장남(長男)은 호(暭)이요, 다음은 | ||
+ | 여(女)는 순흥(順興) 안용식(安鎔軾), 울진(蔚珍) 장병옥(張秉玉), | ||
+ | 평산(平山) 신유환(申裕煥), 김녕(金寧) 김순룡(金順龍), 정선(旌善) | ||
+ | 전해룡(全海龍)에게 | ||
+ | |||
+ | \_호(暭)는 아들이 없어 | ||
+ | 사자(嗣子)를 삼고, 여(女)는 무안(務安) 박종한(朴鍾漢)에게 | ||
+ | 출가(出嫁)하였다. 창(昶)이 또한 아들이 없어 | ||
+ | 환(晥)의 아들 | ||
+ | 여(女)은 순흥(順興) 안승원(安承源), 순흥(順興) 안맹원(安孟源), | ||
+ | 파평(坡平) 윤갑(尹鉀)에게 | ||
+ | 연(曣)이 1남1녀(一男一女)를 두었으니 | ||
+ | 여(女)는 순흥(順興) 안용발(安鎔浡)에게 | ||
+ | 학([日學])이 2남(二男)을 두었는데 | ||
+ | 재우(載宇)가 4남3녀(四男三女)를 두었으니, 장남(長男)은 덕진(德鎭)이요, | ||
+ | 다음은 | ||
+ | 여(女)는 신안(新安) 주재수(朱宰壽)에게 | ||
+ | 나머지는 어려서 | ||
+ | |||
+ | \_찬종(燦宗)이 이웃 고을에 살고 있어 | ||
+ | 뛰어난 | ||
+ | 한(恨)스럽게 여겼더니, 하루는 | ||
+ | 공(公)의 유사(遺事)를 가지고 나에게 | ||
+ | 청(請)하거늘, 스스로 | ||
+ | 감당(堪當)치 못하나, 일찍이 | ||
+ | 같은 | ||
+ | 품어 그 넓고 깊은 모양이 | ||
+ | 할 수 있도록 느끼게 하고 | ||
+ | 본받을만한 | ||
+ | 바가 | ||
+ | 효간(孝懇)을 막음하고 또 평일(平日)에 앙모(仰慕)의 정성(精誠)에 | ||
+ | 붙여 이르노라.\\ | ||
+ | \_\_세(歲) 기해(己亥) 모춘(暮春) 상완(上浣) 대흥(大興) 백찬종(白燦宗) 근찬(謹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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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048.1747290885.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15 15:34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