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3-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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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049 [2025/05/12 21:10] – 121.166.63.129 | c3-049 [2025/05/27 20:59] (현재) – ssio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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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前國會議員黃昞禹行狀 | + | ===전국회의원황병우행장(前國會議員黃昞禹行狀)=== |
- | 公은 先天的으로 文學과 言述에 남다른 素質을 갖고 태어났으며 自幼時로 愛國의 氣質이 싹트고 | + | <WRAP 33em justify> |
- | 있었다는 側面도 눈에 띄었다 | + | <typo ff:' |
- | 中學校 大邱遊學時節 日帝의 그朝鮮말 抹殺政策가운데에서도 온갖 苦難을 무릅쓰고 우리말로 | + | \_**前國會議員黃昞禹行狀**\\ |
- | 노고지리라는 出版社를 創立하여 文學同好學生들끼리 모여서 創作活動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 + | \_공(公)은 선천적(先天的)으로 |
- | 이재와서 새삼 記憶나는 바이다 每年夏季放學期가되면 故鄕마을 靑雲洞에 돌아와서 洞口밖에 | + | 남다른 |
- | 조그만한 自己내 果樹園으로 같은類들을 모아놓고 그 앞에서 排日思想이 內包된 自作散文등을 | + | 애국(愛國)의 기질(氣質)이 싹트고 |
- | 說明兼熱辯을 吐하는 光景을 먼데서 바라보고 있노라니 演說에도 宏壯히 솜씨가 있다는 것을 쉽 | + | 있었다는 |
- | 게 感知할 수 있었다 | + | |
- | 公은 平海黃氏 二十九世요 崇祿大夫三重大匡輔國諡忠敬公의 二十六世李朝開國功臣諡襄武公의 | + | |
- | 二十二世 本派譜始祖府使公의 二十一世이다 公이 國會議員에 三回나 當選된 것은 勿論有權者들 | + | |
- | 께서 아낌없는 聲援의 德澤이겠지만 原因은 公의 遠近祖上들이 行한 排日愛國思想등을 傳해들 | + | |
- | 은 有權者들께서 嘉像히 여겨 더욱 굳게 뭉쳐져서 當選된 것이 事實이다 그리고 여기에 빼놓을 | + | |
- | 수 없는 傳說 한 토막을 記述하는 바이다 | + | |
- | 마을 入口에 聖指골이라는 山골이 있는데 옛날 어느때 聖真道師가 이곳을 지나가다가 暫時 걸음 | + | |
- | 을 멈추고 손가락으로 靑雲洞을 가르키면서 저기 저 洞里에는 後日 政丞이 誕生할터이다라고 한 | + | |
- | 마디를 남기고는 그만 그골로 들어서더니 人忽不見이 되어 버렸다고 해서 聖指골이라는 골이름 | + | |
- | 이 붙여졌다고 한다 | + | \_중학교(中學校)((대구농림학교)) 대구(大邱) 유학시절(遊學時節) 일제(日帝)의 |
- | 行狀 | + | 그 조선(朝鮮) 말 말살정책(抹殺政策) 가운데에서도, |
- | 그당시에는 이동리에 가평이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는데 성진도사의 유언을 믿고 수대를 거주하여도 정승이 나지 않으므로 타지로 이주한 후 그다음에 황씨가 입향하였다고 하니 | + | 고난(苦難)을 무릅쓰고 우리말로 |
- | 국회의원이 된 것도 그성진도사의 유언과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바이다 | + | 노고지리사(社)라는 출판사(出版社)를 창립(創立)하여, |
- | 공의 정치생활에는 파랑곡절도 많았다 야당 시절 때는 도로포장이 국내에서도 가장 낙후상황이었 | + | 문학동호(文學同好) 학생(學生)들끼리 모여서 창작활동(創作活動)을 |
- | 으므로 한탄하던 나머지 그 유명하였던 맨발의 행진시위까지 하면서 도로포장을 완공하였고 국회 | + | 하고 있었다는 것이 |
- | 에서는 신민당 | + | 이제와서 새삼 기억(記憶)나는 바이다. 매년(每年) 하계(夏季) 방학기(放學期)가 |
- | 으로서는 여당인 민자당 경북도당 위원장을 역임하면서 큰 기둥이 되어 경북 발전에 공로가 많았을 | + | 되면 고향(故鄕) 마을 청운동(靑雲洞)에 돌아와서 동구(洞口) 밖에 |
- | 뿐 아니라 청송 영덕 지역구 발전에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공로가 있었노라 | + | 조그만한 자기(自己)네 과수원(果樹園)으로 같은 유(類)들을 |
- | 세을亥 | + | 모아놓고, |
- | 以備後日之考據 | + | 설명(說明) 겸(兼) 열변(熱辯)을 토(吐)하는 광경(光景)을 먼데서 |
- | 일 | + | 바라보고 있노라니, |
- | 월 | + | 쉽게 감지(感知)할 수 있었다.\\ |
- | 청운동 상영 謹書 | + | |
+ | \_공(公)은 평해황씨(平海黃氏) 29세(二十九世)요, | ||
+ |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 시(諡) 충경공(忠敬公)의 26세(二十六世), | ||
+ | 이조(李朝) 개국공신(開國功臣) 시(諡) 양무공(襄武公)의 | ||
+ | 22세(二十二世), | ||
+ | 21세(二十一世)이다. 공(公)이 국회의원(國會議員)에 3회(三回)나 | ||
+ | 당선(當選)된 것은 물론(勿論) 유권자(有權者)들께서 아낌없는 | ||
+ | 성원(聲援)의 덕택(德澤)이겠지만, | ||
+ | 원근(遠近) 조상(祖上)들이 행(行)한 배일애국사상(排日愛國思想) 등을 | ||
+ | 전(傳)해 들은 유권자(有權者)들께서 가상(嘉像)히 여겨 | ||
+ | 더욱 굳게 뭉쳐져서 당선(當選)된 것이 사실(事實)이다. \\ | ||
+ | |||
+ | \_그리고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전설(傳說) 한 토막을 기술(記述)하는 바이다.\\ | ||
+ | |||
+ | \_마을 입구(入口)에 성지(聖指)골이라는 산(山)골이 있는데 | ||
+ | 옛날 어느 때 성진도사(聖眞道師)가 이곳을 지나가다가, | ||
+ | 걸음을 멈추고 손가락으로 청운동(靑雲洞)을 가르키면서, | ||
+ | 저 동리(洞里)에는 후일(後日) 정승(政丞)이 탄생(誕生)할 터이다라고 | ||
+ | 한 마디를 남기고는, | ||
+ | 되어 버렸다고 해서 성지(聖指)골이라는 골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 ||
+ | |||
+ | \_그 당시(當時)에는 이 동리(洞里)에 가평(加平) | ||
+ |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고 있었는데, 성진도사(聖眞道師)의 유언(遺言)을 | ||
+ | 믿고 수대(數代)를 거주(居住)하여 | ||
+ | 타지(他地)로 이거(移居)한 후(後), | ||
+ | 입향(入鄕)하였다고 하니 | ||
+ | 국회의원(國會議員)이 된 것도 그 성진도사(聖眞道師)의 유언(遺言)과 | ||
+ | 연관성(聯關性)이 있다고 생각(生覺)되는 바이다.\\ | ||
+ | |||
+ | \_공(公)의 정치생활(政治生活)에는 파랑곡절(波浪曲節)도 많았다. | ||
+ | 야당(野黨) | ||
+ | 가장 낙후상황(落後狀況)이었으므로 한탄(恨嘆)하던 나머지, 그 | ||
+ | 유명(有名)하였던 맨발의 행진시위(行進示威)까지 하면서 | ||
+ | 도로포장(道路包裝)을 완공(完工)하였고, 국회(國會)에서는 | ||
+ | 신민당(新民黨) | ||
+ | 국회(國會) | ||
+ | 맡아 많은 활동(活動)을 하였고, 당직(黨職)으로서는 | ||
+ | 여당(與黨)인 민자당(民自黨) | ||
+ | 역임(歷任)하면서, 큰 기둥이 되어 경북(慶北) | ||
+ | 뿐 아니라, 청송(靑松) | ||
+ | 이루 말할 수 없는 공로(功勞)가 있었노라.\\ | ||
+ | \_\_세(歲) 을해(乙亥) 월(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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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049.1747051819.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12 21:10 저자 121.166.63.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