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회의원황병우행장(前國會議員黃昞禹行狀)
前國會議員黃昞禹行狀
공(公)은 선천적(先天的)으로 문학(文學)과 언술(言述)에
남다른 소질(素質)을 갖고 태어났으며 자(自) 유시(幼時)로
애국(愛國)의 기질(氣質)이 싹트고
있었다는 측면(側面)도 눈에 띄었다.
중학교(中學校)1) 대구(大邱) 유학시절(遊學時節) 일제(日帝)의
그 조선(朝鮮) 말 말살정책(抹殺政策) 가운데에서도, 온갖
고난(苦難)을 무릅쓰고 우리말로
노고지리사(社)라는 출판사(出版社)를 창립(創立)하여,
문학동호(文學同好) 학생(學生)들끼리 모여서 창작활동(創作活動)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이제와서 새삼 기억(記憶)나는 바이다. 매년(每年) 하계(夏季) 방학기(放學期)가
되면 고향(故鄕) 마을 청운동(靑雲洞)에 돌아와서 동구(洞口) 밖에
조그만한 자기(自己)네 과수원(果樹園)으로 같은 유(類)들을
모아놓고, 그 앞에서 배일사상(排日思想)이 내포(內包)된 자작(自作) 산문(散文) 등을
설명(說明) 겸(兼) 열변(熱辯)을 토(吐)하는 광경(光景)을 먼데서
바라보고 있노라니, 연설(演說)에도 굉장(宏壯)히 솜씨가 있다는 것을
쉽게 감지(感知)할 수 있었다.
공(公)은 평해황씨(平海黃氏) 29세(二十九世)요, 숭록대부(崇祿大夫)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 시(諡) 충경공(忠敬公)의 26세(二十六世),
이조(李朝) 개국공신(開國功臣) 시(諡) 양무공(襄武公)의
22세(二十二世), 본(本) 파보(派譜) 시조(始祖) 부사공(府使公)의
21세(二十一世)이다. 공(公)이 국회의원(國會議員)에 3회(三回)나
당선(當選)된 것은 물론(勿論) 유권자(有權者)들께서 아낌없는
성원(聲援)의 덕택(德澤)이겠지만, 원인(原因)은 공(公)의
원근(遠近) 조상(祖上)들이 행(行)한 배일애국사상(排日愛國思想) 등을
전(傳)해 들은 유권자(有權者)들께서 가상(嘉像)히 여겨
더욱 굳게 뭉쳐져서 당선(當選)된 것이 사실(事實)이다.
그리고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전설(傳說) 한 토막을 기술(記述)하는 바이다.
마을 입구(入口)에 성지(聖指)골이라는 산(山)골이 있는데
옛날 어느 때 성진도사(聖眞道師)가 이곳을 지나가다가, 잠시(暫時)
걸음을 멈추고 손가락으로 청운동(靑雲洞)을 가르키면서, 저기
저 동리(洞里)에는 후일(後日) 정승(政丞)이 탄생(誕生)할 터이다라고
한 마디를 남기고는, 그만 그 골로 들어서더니 인홀불견(人忽不見)이
되어 버렸다고 해서 성지(聖指)골이라는 골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 당시(當時)에는 이 동리(洞里)에 가평(加平) 이씨(李氏)가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고 있었는데, 성진도사(聖眞道師)의 유언(遺言)을
믿고 수대(數代)를 거주(居住)하여 보아도 정승(政丞)이 나지 않으므로
타지(他地)로 이거(移居)한 후(後), 그 다음에 황씨(黃氏)가
입향(入鄕)하였다고 하니 공(公)이
국회의원(國會議員)이 된 것도 그 성진도사(聖眞道師)의 유언(遺言)과
연관성(聯關性)이 있다고 생각(生覺)되는 바이다.
공(公)의 정치생활(政治生活)에는 파랑곡절(波浪曲節)도 많았다.
야당(野黨) 시절(時節) 때는 도로포장(道路包裝)이 국내(國內)에서도
가장 낙후상황(落後狀況)이었으므로 한탄(恨嘆)하던 나머지, 그
유명(有名)하였던 맨발의 행진시위(行進示威)까지 하면서
도로포장(道路包裝)을 완공(完工)하였고, 국회(國會)에서는
신민당(新民黨) 원내(院內) 수석부총무(首席副總務),
국회(國會) 예산결산위원회(豫算決算委員會) 간사(幹事) 등 요직(要職)을
맡아 많은 활동(活動)을 하였고, 당직(黨職)으로서는
여당(與黨)인 민자당(民自黨) 경북도당(慶北道黨) 위원장(委員長)을
역임(歷任)하면서, 큰 기둥이 되어 경북(慶北) 발전(發展)에 공로(功勞)가 많았을
뿐 아니라, 청송(靑松) 영덕(盈德) 지역구(地域區) 발전(發展)에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공로(功勞)가 있었노라.
세(歲) 을해(乙亥) 월(月) 일(日) 청운동(靑雲洞) 상영(相榮) 근서(謹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