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3-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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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052 [2025/05/14 09:26] – 121.166.63.129 | c3-052 [2025/05/23 20:39] (현재) – ssio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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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무공유사(襄武公遺事)=== | ===양무공유사(襄武公遺事)=== | ||
+ | <WRAP 33em justify> | ||
+ | <typo ff:' | ||
+ | \_**襄武公遺事**\\ | ||
+ | \_공(公)의 휘(諱)는 희석(希碩)이니 개국공신(開國功臣)인데 | ||
+ | 추증(追贈) 우의정(右議政)하고 시호(諡號)는 양무공(襄武公)이니 | ||
+ | 평해군(平海君)을 봉(封)하신 어른이다. 황씨(黃氏)가 동국(東國)에 | ||
+ | 나타남은 학사공(學士公) 휘(諱) 낙(洛)으로부터인데, | ||
+ | 와서 시중(侍中) 휘(諱) 유중(裕中)이라는 어른이 | ||
+ | 아들 3형제(三兄弟)를 두셨으며, | ||
+ | 태자검교(太子檢校)요, | ||
+ | 시호(諡號) 충절공(忠節公)이요, | ||
+ | 대광(大匡)으로 시호(諡號) 충경공(忠敬公)이다. 이 세분이 | ||
+ | 3파(三派)로 나누이신 처음 조상(祖上)들인데 충경공(忠敬公)이 | ||
+ | 휘(諱) 태백(太白)을 낳으시니 형조전서(刑曹典書)며, | ||
+ | 휘(諱) 우(祐)를 낳으시니 병조전서(兵曹典書)이며, | ||
+ | 병조전서공(兵曹典書公)이 휘(諱) 천록(天祿)을 | ||
+ | 낳으시니 판도판서(版圖判書)로, | ||
+ | 이조(李朝)에 와서 공(公)이 추충협찬(推忠協贊)으로 개국원훈(開國元勳)에 | ||
+ | 책록(策錄)되니, | ||
+ | 좌의정(左議政) 우의정(右議政)으로 추증(追贈)되셨다.\\ | ||
- | 襄武公遺事 | + | \_공(公)이 나시니 몸이 크고 울음소리가 웅장하여 보고 듣는 |
- | 公의諱는希碩이니開國功臣인데追贈右議政하고諡號는襄武公이니平海君을封하신어른이다黃氏가東國에나타남 | + | 사람들이 |
- | 은學士公諱洛으로부터인데中世에와서侍中諱裕中이라는어른이아들三兄弟를두셨으며長子는諱璡이니太子檢校 | + | 기골(氣骨)이 장대(壯大)하고 |
- | 요다음은諱瑞니評理로諡號忠節公이요그다음은諱墉이니大匡으로諡號忠敬公이다이세분이三派로나누이신처음 | + | 안광(眼光)이 불빛 같고 |
- | 祖上들인데忠敬公이諱太白을낳으시니刑曹典書며典書公이諱祐를낳으시니兵曹典書이며兵曹典書公이諱天祿을 | + | 뛰어나 한 가지를 가르치면 열 가지를 |
- | 낳으시니版圖判書로公의考祖會祖이시다李朝에와서公이推忠協贊으로開國元勳에策錄되니그윗代三代를 모두領 | + |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通達)하고, 그 앉은 |
- | 議政左議政右議政으로追贈되셨다 | + | 걷는 |
- | 公이나시니몸이크 고울음소리가웅장하여보고듣는사람들이凡常치않다하더니漸漸자라나매氣骨이壯大하고眉目 | + | 만나면 |
- | 이秀麗하며眼光이불빛같고人物이俊秀한데또才操가뛰어나한가지를가르치면열가지를理解하니열살전에벌써四 | + | 못하였다 한다.\\ |
- | 書三經을通達하고그앉은姿勢와걷는態度가의젓하고무거워서뭇사람들이公을만나면不知不識問에머리가수그러 | + | |
- | 짐을깨닫지못하였다한다 | + | |
- | 그리고壯大한氣骨에힘이남보다뛰어나百斤鐵槌휘두르기를적은돌을집어던지듯하며말을타고활쏘며칼쓰는武藝 | + | |
- | 를崇尙하니六尺雙劍을번개같이휘두르고활은百發百中하는特技를가져文字그대로文武가兼全한분으로 그勇猛과 | + | |
- | 智慧가나라를爲하여防牌가되고城壁이됨이充分하다고모두들稱하였다 | + | |
- | 일찍이 李太祖와는學問도함께講論하고兵書도서로討論하며時局와國政도서로근심걱정하던뜻맞은親舊聞이였었 | + | |
- | 다하루는두분이安邊釋王寺를遊覽하실때그절의중들이떡치는큰돌을굴리려하여도돌이움직이지않는지라이것을 | + | |
- | 보신公이벌떡일어나두손으로번쩍들어다중들이願하는곳에놓아주니중들이놀라어안이벙벙하여말을못하고李太 | + | |
- | 祖는 그光景을 보고黃公은眞實로큰壯士라稱하며더욱가까이하기를좋아하였다한다 | + | |
- | 恭讓王乙丑年에倭敵이數百隻의배로陸海軍을無數히싣고咸州等地數個郡을侵入掠奪防火殺掠等을함부로하여百 | + | |
- | 姓을塗炭에빠뜨림에王의命을받고公이軍을이끌고나아가洪原郡大門嶺에서싸워한번에크게이겨敵을破하고塗炭 | + | |
- | 에빠진百姓을안돈시켰다 | + | |
- | 그後王이崔瑩과함께元나라를섬기고遼東을치고자李成桂로하여右軍都統을삼고大軍을引率하여威化島에進屯케 | + | \_그리고 장대(壯大)한 기골(氣骨)에 힘이 |
- | 하였더니때마침장마비가날마다繼續하고軍糧은後續되지못하므로軍士들의마음이많이動搖되고있었다이때公은 | + | 백근(百斤) 철퇴(鐵槌) 휘두르기를 |
- | 殿後軍을거느리고있다가天氣를살펴보니비는좀처럼개일것같지않고地理的으로威化島는水中에잠길憂慮가있는 | + | 말을 타고 활쏘며 칼쓰는 무예(武藝)를 숭상(崇尙)하니 6척(六尺) 쌍검(雙劍)을 |
- | 곳이라陣地를陸地로옮길것을建議하고곧大軍을移動시켜江을건너陣을옮기자그날밤부터더욱큰비가繼續내려數 | + | 번개같이 휘두르고 |
- | 日이지나지않아威化島는完全沈沒되고마는지라이에모든軍士들이公의神奇妙算을稱讚하며公의建議가없었던들 | + | 가져, 문자(文字) 그대로 문무(文武)가 겸전(兼全)한 분으로 그 용맹(勇猛)과 |
- | 數萬의大軍이水中孤魂을免치못하였을것이라하고우리들이살게된것은오직黃公의힘이라하였다한다 | + | 지혜(智慧)가 나라를 위(爲)하여 |
- | 그後또公은 모든參謀와都元師李成桂와함께進軍할것을議論할때公이말하기를恭讓王은柔弱하고國政에어두우며 | + | 됨이 충분(充分)하다고 모두들 칭(稱)하였다.\\ |
- | 또領議政崔瑩은늙어도氣魄은좋으나人心과軍心을詳細히살피지못하고또軍事에뒷받침할國力은헤아리지않고다 | + | |
- | 만元나라와高麗王朝間에맺어진大義를저버리지못하여大元나라自體도國運이衰하여新興明太祖의勢力을어찌할 | + | |
- | 수없는地境에이르러우리高麗에게援軍을請하는處地인데적은우리나라立場으로元나라도當치못하는明太祖勢力 | + | |
- | 을맞아서막는것도이이요하물며멀리大軍을거느리고나아가서처降服받는다는것은禍를自招하는것밖에되지않는 | + | |
- | 것이니回軍함이옳다고主張하였다이에모든參謀들이異口同聲으로黃公의意見이國家를바로잡는옳바른生覺이라 | + | |
- | 하여모두回軍을贊成하였다이에李成桂는王命은進軍이요軍心은回軍이니進軍하자니많은軍士를죽이게되고싸움 | + | |
- | 은敗할것이明若觀火하며또回軍이면王命拒逆으로逆謀에몰릴것이十常八九인지라寢食을잃고深思熟考거듭거듭 | + | |
- | 參謀會議를열었으나回軍以外에進軍을主張하는사람은한사람도없는故로不得已굳은覺悟를하고回軍을命令하였다 | + | |
- | 이에모든軍士들은李成桂의威德을 크게欽慕하며萬若朝廷에서無理하게李成桂의回軍을逆謀로逆利用하여除去하 | + | |
- | 려할때는힘을合하여抗拒키로모두各自의속마음에定하고있었다朝廷에서는前부터李太祖의勢力이너무肥大하여 | + | |
- | 감을보고 | + | |
- | 가좋은機會가到來하였다하여곧回軍을멈추게하고李成桂를都元師에서罷職하려하였다이機微를안李成桂의셋째 | + | |
- | 아들芳遠이분개하여壯士들을뽑아崔瑩鄭圃隱等을除去하는謀策을세우고그父親李成桂에게問議하니李成桂는꾸 | + | |
- | 짖고말리며黃希碩公이恒常옳고좋은일을잘政策하는분이니意見을들어보라하였다芳遠은곧公에게 그뜻을告하니 | + | |
- | 鄭圃隱같은분은民望이높고學者인데그와같은無謀한짓을함은옳지못하다하며만류하였다그러나芳遠은듣지않고 | + | |
+ | \_일찍이 이태조(李太祖)와는 학문(學問)도 함께 강론(講論)하고 | ||
+ | 병서(兵書)도 서로 토론(討論)하며 시국(時局)과 국정(國政)도 | ||
+ | 서로 근심 걱정하던 뜻 맞은 친구간(親舊聞)이였었다. | ||
+ | 하루는 두 분이 안변(安邊) 석왕사(釋王寺)를 유람(遊覽)하실 때, | ||
+ | 그 절의 중들이 떡치는 큰 돌을 굴리려 하여도 돌이 움직이지 | ||
+ | 않는지라, | ||
+ | 중들이 원(願)하는 곳에 놓아주니, | ||
+ | 말을 못하고, 이태조(李太祖)는 그 광경(光景)을 보고 황공(黃公)은 | ||
+ | 진실(眞實)로 큰 장사(壯士)라 칭(稱)하며 더욱 가까이 하기를 좋아하였다 한다.\\ | ||
- | 決行하고말았다 | + | \_공양왕(恭讓王) 을축년(乙丑年)에 왜적(倭敵)이 수백척(數百隻)의 |
- | 그後民心과軍心이王朝에서떠나李成桂에게로돌아오니곧軍民이推戴하여李太祖로大業을成就케하였다이에李太 | + | 배로 육해군(陸海軍)을 무수(無數)히 싣고 함주(咸州) 등지(等地) |
- | 祖가寡躬이오늘날나라를얻게됨은오직卿의政策과功이크다하여功臣錄券과勳章을내리며誓命즉임금이臣下에게 | + | 수개군(數個郡)을 침입(侵入) 약탈(掠奪) 방화(防火) 살략(殺掠) |
- | 하는맹세에子孫(蔭職宥及後世)에게까지너그럽게미치는 것이라하였다 | + | 함부로 하여 백성(百姓)을 |
- | 그리고壬申年七月에임금과모든臣下가모여天地神明과宗廟社稷에告하는歷史的인會盟에는公은病患으로參席치 | + | 받고 공(公)이 군(軍)을 이끌고 나아가 홍원군(洪原郡) 대문령(大門嶺)에서 |
- | 못하고卒하였다太祖가親히빈소에나시어甚히슬픈뜻으로弔喪하고恩例로서賞내리시기를다른모든功臣보다特別 | + | 싸워 한 번에 크게 |
- | 히다르게하여朝廷의周旋으로 그初喪을마친다음開城玉蓮坊을등진坎坐之原에葬事하였다 | + | 백성(百姓)을 안돈시켰다.\\ |
- | 太宗이公을爲하여長子象에게信淑翁主로써釐降즉임금의딸이臣下에게시집가는것인데이는堯임금의딸釐理를匹 | + | |
- | 夫舜에게降嫁케한故事에서引用한말이다 | + | |
- | 宣祖朝에와서敎書에이르기를黃希碩의許多한子孫을百世로事役즉軍役吏役賤役에侵犯하지말것이라하였으며李 | + | |
- | 相元翼의狀啓에이르기를黃希碩의嫡孫인즉百世로勿侵하고庶孫인즉비록落講이라할지라도軍役에侵犯치아니하 | + | |
- | 며널리人材를登用함이어떠하겠나이까? | + | |
- | 之典의大略을記述한다 | + | |
- | 配位는愼惠宅主三陟朴氏니副正源祐의女이요繼配는貞敬夫人廷安李氏니刑曹典書琪亨의女라四男을낳으시니長 | + | |
- | 男은象으로駙馬로서再娶로罷尉되었다가뒤에벼슬이兵曹判書에이르고다음은麟이니禮曹判書요그다음은鸞이니 | + | |
- | 兵曹正郞이요또 그다음은鵠이니東萊府使라子孫이繁衍하여 그빛남이헤아릴수없이많은것은公이德을쌓은緣故라 | + | |
- | 하겠다 | + | |
- | 嗚呼라公의勳業이忠勳府에記載되어있고 그史實인즉漢나라蕭河와曺參이요唐나라房玄齡과杜如晦에比하여조금 | + | |
- | 도不足함이없다하겠다政府이름으로禮曹에서決議하여諡號를襄武로定하고吏曹에서記錄된事實이니만큼政府에 | + | |
- | 서이러한功臣들의行錄을撰述한것이반드시있었을 것으로生覺이나나여러차례兵火를겪어집에있는 文獻에證據가 | + | |
- | 없으니어찌痛恨함을禁할수있으리요? | + | |
- | 가만히生覺한즉世代가더멀어져뒷날에오늘을보는것이도리어오늘날에옛날을 보는이만같지못할까두려워至今까 | + | |
- | 지전해내려온 대략을 기록하여 다음날의 고증을 삼게 하노라 | + | \_그 후(後) 왕(王)이 최영(崔瑩)과 함께 원(元)나라를 섬기고 |
- | 宗裔 孫昞謹撰 | + | 요동(遼東)을 치고자 이성계(李成桂)로 하여 우군도통(右軍都統)을 |
+ | 삼고 대군(大軍)을 인솔(引率)하여 위화도(威化島)에 진둔(進屯)케 | ||
+ | 하였더니, | ||
+ | 후속(後續)되지 못하므로 군사(軍士)들의 마음이 많이 동요(動搖)되고 | ||
+ | 있었다. 이때 공(公)은 | ||
+ | 전후군(殿後軍)을 거느리고 있다가 천기(天氣)를 살펴보니 비는 좀처럼 | ||
+ | 개일 것 같지 않고, 지리적(地理的)으로 위화도(威化島)는 수중(水中)에 | ||
+ | 잠길 우려(憂慮)가 있는 | ||
+ | 곳이라, 진지(陣地)를 육지(陸地)로 옮길 것을 건의(建議)하고 곧 | ||
+ | 대군(大軍)을 이동(移動)시켜 강(江)을 건너 진(陣)을 옮기자 | ||
+ | 그날 밤부터 더욱 큰 비가 계속(繼續)내려 수일(數日)이 | ||
+ | 지나지 않아 위화도(威化島)는 완전(完全) 침몰(沈沒)되고 마는지라, | ||
+ | 이에 모든 군사(軍士)들이 공(公)의 신기묘산(神奇妙算)을 칭찬(稱讚)하며 | ||
+ | 공(公)의 건의(建議)가 없었던들 | ||
+ | 수만(數萬)의 대군(大軍)이 수중고혼(水中孤魂)을 면(免)치 못하였을 | ||
+ | 것이라 하고, 우리들이 살게 된 것은 오직 황공(黃公)의 힘이라 하였다 한다.\\ | ||
+ | |||
+ | \_그 후(後) 또 공(公)은 모든 참모(叅謀)와 도원수(都元師) | ||
+ |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진군(進軍)할 것을 의논(議論)할 때 공(公)이 | ||
+ | 말하기를 공양왕(恭讓王)은 유약(柔弱)하고 국정(國政)에 어두우며, | ||
+ | 또 영의정(領議政) 최영(崔瑩)은 늙어도 기백(氣魄)은 좋으나 | ||
+ | 인심(人心)과 군심(軍心)을 상세(詳細)히 살피지 못하고 또 군사(軍事)에 | ||
+ | 뒷받침할 국력(國力)은 헤아리지 않고 다만 원(元)나라와 | ||
+ | 고려왕조(高麗王朝) 간(間)에 맺어진 대의(大義)를 저버리지 못하여, | ||
+ | 대원(大元)나라 자체(自體)도 국운(國運)이 쇠(衰)하여 | ||
+ | 신흥(新興) 명(明) 태조(太祖)의 세력(勢力)을 어찌 할 | ||
+ | 수 없는 지경(地境)에 이르러 우리 고려(高麗)에게 원군(援軍)을 청(請)하는 | ||
+ | 처지(處地)인데 작은 우리나라 입장(立場)으로 원(元)나라도 | ||
+ | 당(當)치 못하는 명(明) 태조(太祖) 세력(勢力)을 맞아서 막는 것도 이이요, | ||
+ | 하물며 멀리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나아가서 항복(降服)받는다는 것은 | ||
+ | 화(禍)를 자초(自招)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 | ||
+ | 것이니 회군(回軍)함이 옳다고 주장(主張)하였다. 이에 모든 참모(叅謀)들이 | ||
+ |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황공(黃公)의 의견(意見)이 국가(國家)를 | ||
+ | 바로 잡는 옳바른 생각(生覺)이라 하여 모두 회군(回軍)을 찬성(贊成)하였다. | ||
+ | 이에 이성계(李成桂)는 왕명(王命)은 진군(進軍)이요 | ||
+ | 군심(軍心)은 회군(回軍)이니, | ||
+ | 싸움은 패(敗)할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하며, | ||
+ | 왕명(王命) 거역(拒逆)으로 역모(逆謀)에 몰릴 것이 십상팔구(十常八九)인지라. | ||
+ | 침식(寢食)을 잃고 심사숙고(深思熟考) 거듭거듭 | ||
+ | 참모회의(叅謀會議)를 열었으나 회군(回軍) 이외(以外)에 진군(進軍)을 | ||
+ | 주장(主張)하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는 고(故)로 부득이(不得已) 굳은 | ||
+ | 각오(覺悟)를 하고 회군(回軍)을 명령(命令)하였다. | ||
+ | 이에 모든 군사(軍士)들은 이성계(李成桂)의 위덕(威德)을 크게 흠모(欽慕)하며 | ||
+ | 만약(萬若) 조정(朝廷)에서 무리(無理)하게 이성계(李成桂)의 | ||
+ | 회군(回軍)을 역모(逆謀)로 역이용(逆利用)하여 제거(除去)하려 할 때는 | ||
+ | 힘을 합(合)하여 항거(抗拒)키로 모두 각자(各自)의 속마음에 정(定)하고 | ||
+ | 있었다. 조정(朝廷)에서는 전(前)부터 이태조(李太祖)의 세력(勢力)이 | ||
+ | 너무 비대(肥大)하여 감을 보고 그 반대자(反對者)들이 은연 중(中) | ||
+ | 이를 제거(除去)하여 국가(國家)의 위태로움을 면(免)하여야 된다고 | ||
+ | 생각(生覺)하던 영의정(領議政) 최영(崔瑩)과 정몽주(鄭夢周) 일파(一派)가, | ||
+ | 좋은 기회(機會)가 도래(到來)하였다 하여 곧 회군(回軍)을 멈추게 하고 | ||
+ | 이성계(李成桂)를 도원수(都元師)에서 파직(罷職)하려 하였다. | ||
+ | 이 기미(機微)를 안 이성계(李成桂)의 셋째 | ||
+ | 아들 방원(芳遠)이 분개하여 장사(壯士)들을 뽑아 최영(崔瑩) 정포은(鄭圃隱) 등(等)을 | ||
+ | 제거(除去)하는 모책(謀策)을 세우고 그 부친(父親) 이성계(李成桂)에게 | ||
+ | 문의(問議)하니, | ||
+ | 항상(恒常) 옳고 좋은 일을 잘 정책(政策)하는 분이니 의견(意見)을 | ||
+ | 들어보라 하였다. 방원(芳遠)은 곧 공(公)에게 그 뜻을 고(告)하니 | ||
+ | 정포은(鄭圃隱) 같은 분은 민망(民望)이 높고 학자(學者)인데 | ||
+ | 그와같은 무모(無謀)한 짓을 함은 옳지 못하다 하며 만류하였다. 그러나 | ||
+ | 방원(芳遠)은 듣지 않고 결행(決行)하고 말았다.\\ | ||
+ | |||
+ | \_그 후(後) 민심(民心)과 군심(軍心)이 왕조(王朝)에서 떠나 | ||
+ | 이성계(李成桂)에게로 돌아오니 곧 군민(軍民)이 추대(推戴)하여 | ||
+ | 이태조(李太祖)로 대업(大業)을 성취(成就)케 하였다. 이에 | ||
+ | 이태조(李太祖)가 과궁(寡躬)이 오늘날 나라를 얻게 됨은 오직 | ||
+ | 경(卿)의 정책(政策)과 공(功)이 크다 하여, 공신녹권(功臣錄券)과 | ||
+ | 훈장(勳章)을 내리며 서명(誓命) 즉 임금이 신하(臣下)에게 | ||
+ | 하는 맹세에 자손(子孫)(음직유급후세(蔭職宥及後世))에게 까지 | ||
+ | 너그럽게 미치는 것이라 하였다.\\ | ||
+ | |||
+ | \_그리고 임신년(壬申年) 7월(七月)에 임금과 모든 신하(臣下)가 | ||
+ | 모여 천지신명(天地神明)과 종묘사직(宗廟社稷)에 고(告)하는 | ||
+ | 역사적(歷史的)인 회맹(會盟)에는 공(公)은 병환(病患)으로 참석(叅席)치 | ||
+ | 못하고 졸(卒)하였다. 태조(太祖)가 친(親)히 빈소에 나시어 | ||
+ | 심(甚)히 슬픈 뜻으로 조상(弔喪)하고 은례(恩例)로서 | ||
+ | 상(賞) 내리시기를 다른 모든 공신(功臣)보다 특별(特別)히 | ||
+ | 다르게 하여 조정(朝廷)의 주선(周旋)으로 그 초상(初喪)을 마친 다음 | ||
+ | 개성(開城) 옥련방(玉蓮坊)을 등진 감좌지원(坎坐之原)에 장사(葬事)하였다.\\ | ||
+ | |||
+ | \_태종(太宗)이 공(公)을 위(爲)하여 장자(長子) 상(象)에게 | ||
+ | 신숙옹주(信淑翁主)로써 이강(釐降) 즉 임금의 딸이 신하(臣下)에게 | ||
+ | 시집 가는 것인데 이는 요(堯) 임금의 딸 이리(釐理)를 | ||
+ | 필부(匹夫) 순(舜)에게 강가(降嫁)케한 고사(故事)에서 인용(引用)한 말이다.\\ | ||
+ | |||
+ | \_선조(宣祖) 조(朝)에 와서 교서(敎書)에 이르기를 황희석(黃希碩)의 | ||
+ | 허다(許多)한 자손(子孫)을 백세(百世)로 사역(事役) 즉 군역(軍役) 이역(吏役) 천역(賤役)에 | ||
+ | 침범(侵犯)하지 말 것이라 하였으며 이(李) 상(相) 원익(元翼)의 | ||
+ | 장계(狀啓)에 이르기를 황희석(黃希碩)의 적손(嫡孫)인 즉 | ||
+ | 백세(百世)로 물침(勿侵)하고 서손(庶孫)인 즉 비록 낙강(落講)이라 할지라도 | ||
+ | 군역(軍役)에 침범(侵犯)치 아니하며 널리 인재(人材)를 | ||
+ | 등용(登用)함이 어떠하겠나이까? | ||
+ | 의거(依據)하여 시행(施行)하라 하셨으니 역대(歷代) 조정(朝廷)의 | ||
+ | 숭봉지전(崇奉之典)의 대략(大略)을 기술(記述)한다.\\ | ||
+ | |||
+ | \_배위(配位)는 신혜택주(愼惠宅主) 삼척(三陟) 박씨(朴氏)니 | ||
+ | 부정(副正) 원우(源祐)의 여(女)이요, | ||
+ | 형조전서(刑曹典書) 기형(琪亨)의 여(女)라, | ||
+ | 장남(長男)은 상(象)으로 부마(駙馬)로서 재취(再娶)로 파위(罷尉)되었다가 | ||
+ | 뒤에 벼슬이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이르고, 다음은 인(麟)이니 예조판서(禮曹判書)요, | ||
+ | 그 다음은 난(鸞)이니 | ||
+ | 병조정랑(兵曹正郞)이요, | ||
+ | 자손(子孫)이 번연(繁衍)하여 그 빛남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은 공(公)이 덕(德)을 쌓은 연고(緣故)라 | ||
+ | 하겠다.\\ | ||
+ | |||
+ | \_오호(嗚呼)라! 공(公)의 훈업(勳業)이 충훈부(忠勳府)에 기재(記載)되어 있고 | ||
+ | 그 사실(史實)인 즉 한(漢)나라 소하(蕭河)와 조참(曺叅)이요, | ||
+ | 당(唐)나라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에 비(比)하여 조금도 | ||
+ | 부족(不足)함이 없다 하겠다. 정부(政府) 이름으로 예조(禮曹)에서 | ||
+ | 결의(決議)하여 시호(諡號)를 양무(襄武)로 정(定)하고 이조(吏曹)에서 | ||
+ | 기록(記錄)된 사실(事實)이니만큼, | ||
+ | 행록(行錄)을 찬술(撰述)한 것이 반드시 있었을 것으로 생각(生覺)이 나나 | ||
+ | 여러차례 병화(兵火)를 겪어 집에 있는 문헌(文獻)에 증거(證據)가 | ||
+ | 없으니 어찌 통한(痛恨)함을 금(禁)할 수 있으리요? | ||
+ | |||
+ | \_가만히 생각(生覺)한 즉 세대(世代)가 더 멀어져 뒷날에 오늘을 보는 것이 | ||
+ | 도리어 오늘날에 옛날을 보는 이만 같지 못할까 두려워, 지금(至今)까지 | ||
+ | 전해 내려온 대략(大略)을 기록(記錄)하여 다음날의 고증(考證)을 삼게 하노라.\\ | ||
+ | \_\_종예손(宗裔孫) 병(昞) 근찬(謹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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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052.1747182391.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14 09:26 저자 121.166.63.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