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도구

사이트 도구


c3-052

양무공유사(襄武公遺事)

襄武公遺事
 공(公)의 휘(諱)는 희석(希碩)이니 개국공신(開國功臣)인데 추증(追贈) 우의정(右議政)하고 시호(諡號)는 양무공(襄武公)이니 평해군(平海君)을 봉(封)하신 어른이다. 황씨(黃氏)가 동국(東國)에 나타남은 학사공(學士公) 휘(諱) 낙(洛)으로부터인데, 중세(中世)에 와서 시중(侍中) 휘(諱) 유중(裕中)이라는 어른이 아들 3형제(三兄弟)를 두셨으며, 장자(長子)는 휘(諱) 진(璡)이니 태자검교(太子檢校)요, 다음은 휘(諱) 서(瑞)니 평해(評理)로 시호(諡號) 충절공(忠節公)이요, 그 다음은 휘(諱) 용(𤨭)이니 대광(大匡)으로 시호(諡號) 충경공(忠敬公)이다. 이 세분이 3파(三派)로 나누이신 처음 조상(祖上)들인데 충경공(忠敬公)이 휘(諱) 태백(太白)을 낳으시니 형조전서(刑曹典書)며, 전서공(典書公)이 휘(諱) 우(祐)를 낳으시니 병조전서(兵曹典書)이며, 병조전서공(兵曹典書公)이 휘(諱) 천록(天祿)을 낳으시니 판도판서(版圖判書)로, 공(公)의 고조(考祖) 증조(曾祖)이시다. 이조(李朝)에 와서 공(公)이 추충협찬(推忠協贊)으로 개국원훈(開國元勳)에 책록(策錄)되니, 그 윗 대(代) 3대(三代)를 모두 영의정(領議政) 좌의정(左議政) 우의정(右議政)으로 추증(追贈)되셨다.
 공(公)이 나시니 몸이 크고 울음소리가 웅장하여 보고 듣는 사람들이 범상(凡常)치 않다 하더니, 점점(漸漸) 자라나매 기골(氣骨)이 장대(壯大)하고 미목(眉目)이 수려(秀麗)하며 안광(眼光)이 불빛 같고 인물(人物)이 준수(俊秀)한데, 또 재조(才操)가 뛰어나 한 가지를 가르치면 열 가지를 이해(理解)하니 열 살 전에 벌써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通達)하고, 그 앉은 자세(姿勢)와 걷는 태도(態度)가 의젓하고 무거워서 뭇 사람들이 공(公)을 만나면 부지불식(不知不識) 간(間)에 머리가 수그러짐을 깨닫지 못하였다 한다.
 그리고 장대(壯大)한 기골(氣骨)에 힘이 남보다 뛰어나 백근(百斤) 철퇴(鐵槌) 휘두르기를 작은 돌을 집어 던지듯 하며, 말을 타고 활쏘며 칼쓰는 무예(武藝)를 숭상(崇尙)하니 6척(六尺) 쌍검(雙劍)을 번개같이 휘두르고 활은 백발백중(百發百中)하는 특기(特技)를 가져, 문자(文字) 그대로 문무(文武)가 겸전(兼全)한 분으로 그 용맹(勇猛)과 지혜(智慧)가 나라를 위(爲)하여 방패(防牌)가 되고 성벽(城壁)이 됨이 충분(充分)하다고 모두들 칭(稱)하였다.
 일찍이 이태조(李太祖)와는 학문(學問)도 함께 강론(講論)하고 병서(兵書)도 서로 토론(討論)하며 시국(時局)과 국정(國政)도 서로 근심 걱정하던 뜻 맞은 친구간(親舊聞)이였었다. 하루는 두 분이 안변(安邊) 석왕사(釋王寺)를 유람(遊覽)하실 때, 그 절의 중들이 떡치는 큰 돌을 굴리려 하여도 돌이 움직이지 않는지라, 이것을 보신 공(公)이 벌떡 일어나 두손으로 번쩍 들어다 중들이 원(願)하는 곳에 놓아주니, 중들이 놀라 어안이 벙벙하여 말을 못하고, 이태조(李太祖)는 그 광경(光景)을 보고 황공(黃公)은 진실(眞實)로 큰 장사(壯士)라 칭(稱)하며 더욱 가까이 하기를 좋아하였다 한다.
 공양왕(恭讓王) 을축년(乙丑年)에 왜적(倭敵)이 수백척(數百隻)의 배로 육해군(陸海軍)을 무수(無數)히 싣고 함주(咸州) 등지(等地) 수개군(數個郡)을 침입(侵入) 약탈(掠奪) 방화(防火) 살략(殺掠) 등(等)을 함부로 하여 백성(百姓)을 도탄(塗炭)에 빠뜨림에, 왕(王)의 명(命)을 받고 공(公)이 군(軍)을 이끌고 나아가 홍원군(洪原郡) 대문령(大門嶺)에서 싸워 한 번에 크게 이겨 적(敵)을 파(破)하고 도탄(塗炭)에 빠진 백성(百姓)을 안돈시켰다.
 그 후(後) 왕(王)이 최영(崔瑩)과 함께 원(元)나라를 섬기고 요동(遼東)을 치고자 이성계(李成桂)로 하여 우군도통(右軍都統)을 삼고 대군(大軍)을 인솔(引率)하여 위화도(威化島)에 진둔(進屯)케 하였더니, 때마침 장마비가 날마다 계속(繼續)하고 군량(軍糧)은 후속(後續)되지 못하므로 군사(軍士)들의 마음이 많이 동요(動搖)되고 있었다. 이때 공(公)은 전후군(殿後軍)을 거느리고 있다가 천기(天氣)를 살펴보니 비는 좀처럼 개일 것 같지 않고, 지리적(地理的)으로 위화도(威化島)는 수중(水中)에 잠길 우려(憂慮)가 있는 곳이라, 진지(陣地)를 육지(陸地)로 옮길 것을 건의(建議)하고 곧 대군(大軍)을 이동(移動)시켜 강(江)을 건너 진(陣)을 옮기자 그날 밤부터 더욱 큰 비가 계속(繼續)내려 수일(數日)이 지나지 않아 위화도(威化島)는 완전(完全) 침몰(沈沒)되고 마는지라, 이에 모든 군사(軍士)들이 공(公)의 신기묘산(神奇妙算)을 칭찬(稱讚)하며 공(公)의 건의(建議)가 없었던들 수만(數萬)의 대군(大軍)이 수중고혼(水中孤魂)을 면(免)치 못하였을 것이라 하고, 우리들이 살게 된 것은 오직 황공(黃公)의 힘이라 하였다 한다.
 그 후(後) 또 공(公)은 모든 참모(叅謀)와 도원수(都元師)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진군(進軍)할 것을 의논(議論)할 때 공(公)이 말하기를 공양왕(恭讓王)은 유약(柔弱)하고 국정(國政)에 어두우며, 또 영의정(領議政) 최영(崔瑩)은 늙어도 기백(氣魄)은 좋으나 인심(人心)과 군심(軍心)을 상세(詳細)히 살피지 못하고 또 군사(軍事)에 뒷받침할 국력(國力)은 헤아리지 않고 다만 원(元)나라와 고려왕조(高麗王朝) 간(間)에 맺어진 대의(大義)를 저버리지 못하여, 대원(大元)나라 자체(自體)도 국운(國運)이 쇠(衰)하여 신흥(新興) 명(明) 태조(太祖)의 세력(勢力)을 어찌 할 수 없는 지경(地境)에 이르러 우리 고려(高麗)에게 원군(援軍)을 청(請)하는 처지(處地)인데 작은 우리나라 입장(立場)으로 원(元)나라도 당(當)치 못하는 명(明) 태조(太祖) 세력(勢力)을 맞아서 막는 것도 이이요, 하물며 멀리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나아가서 항복(降服)받는다는 것은 화(禍)를 자초(自招)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니 회군(回軍)함이 옳다고 주장(主張)하였다. 이에 모든 참모(叅謀)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황공(黃公)의 의견(意見)이 국가(國家)를 바로 잡는 옳바른 생각(生覺)이라 하여 모두 회군(回軍)을 찬성(贊成)하였다. 이에 이성계(李成桂)는 왕명(王命)은 진군(進軍)이요 군심(軍心)은 회군(回軍)이니, 진군(進軍)하자니 많은 군사(軍士)를 죽이게 되고 싸움은 패(敗)할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하며, 또 회군(回軍)이면 왕명(王命) 거역(拒逆)으로 역모(逆謀)에 몰릴 것이 십상팔구(十常八九)인지라. 침식(寢食)을 잃고 심사숙고(深思熟考) 거듭거듭 참모회의(叅謀會議)를 열었으나 회군(回軍) 이외(以外)에 진군(進軍)을 주장(主張)하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는 고(故)로 부득이(不得已) 굳은 각오(覺悟)를 하고 회군(回軍)을 명령(命令)하였다. 이에 모든 군사(軍士)들은 이성계(李成桂)의 위덕(威德)을 크게 흠모(欽慕)하며 만약(萬若) 조정(朝廷)에서 무리(無理)하게 이성계(李成桂)의 회군(回軍)을 역모(逆謀)로 역이용(逆利用)하여 제거(除去)하려 할 때는 힘을 합(合)하여 항거(抗拒)키로 모두 각자(各自)의 속마음에 정(定)하고 있었다. 조정(朝廷)에서는 전(前)부터 이태조(李太祖)의 세력(勢力)이 너무 비대(肥大)하여 감을 보고 그 반대자(反對者)들이 은연 중(中) 이를 제거(除去)하여 국가(國家)의 위태로움을 면(免)하여야 된다고 생각(生覺)하던 영의정(領議政) 최영(崔瑩)과 정몽주(鄭夢周) 일파(一派)가, 좋은 기회(機會)가 도래(到來)하였다 하여 곧 회군(回軍)을 멈추게 하고 이성계(李成桂)를 도원수(都元師)에서 파직(罷職)하려 하였다. 이 기미(機微)를 안 이성계(李成桂)의 셋째 아들 방원(芳遠)이 분개하여 장사(壯士)들을 뽑아 최영(崔瑩) 정포은(鄭圃隱) 등(等)을 제거(除去)하는 모책(謀策)을 세우고 그 부친(父親) 이성계(李成桂)에게 문의(問議)하니, 이성계(李成桂)는 꾸짖고 말리며 황희석(黃希碩)공이 항상(恒常) 옳고 좋은 일을 잘 정책(政策)하는 분이니 의견(意見)을 들어보라 하였다. 방원(芳遠)은 곧 공(公)에게 그 뜻을 고(告)하니 정포은(鄭圃隱) 같은 분은 민망(民望)이 높고 학자(學者)인데 그와같은 무모(無謀)한 짓을 함은 옳지 못하다 하며 만류하였다. 그러나 방원(芳遠)은 듣지 않고 결행(決行)하고 말았다.
 그 후(後) 민심(民心)과 군심(軍心)이 왕조(王朝)에서 떠나 이성계(李成桂)에게로 돌아오니 곧 군민(軍民)이 추대(推戴)하여 이태조(李太祖)로 대업(大業)을 성취(成就)케 하였다. 이에 이태조(李太祖)가 과궁(寡躬)이 오늘날 나라를 얻게 됨은 오직 경(卿)의 정책(政策)과 공(功)이 크다 하여, 공신녹권(功臣錄券)과 훈장(勳章)을 내리며 서명(誓命) 즉 임금이 신하(臣下)에게 하는 맹세에 자손(子孫)(음직유급후세(蔭職宥及後世))에게 까지 너그럽게 미치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임신년(壬申年) 7월(七月)에 임금과 모든 신하(臣下)가 모여 천지신명(天地神明)과 종묘사직(宗廟社稷)에 고(告)하는 역사적(歷史的)인 회맹(會盟)에는 공(公)은 병환(病患)으로 참석(叅席)치 못하고 졸(卒)하였다. 태조(太祖)가 친(親)히 빈소에 나시어 심(甚)히 슬픈 뜻으로 조상(弔喪)하고 은례(恩例)로서 상(賞) 내리시기를 다른 모든 공신(功臣)보다 특별(特別)히 다르게 하여 조정(朝廷)의 주선(周旋)으로 그 초상(初喪)을 마친 다음 개성(開城) 옥련방(玉蓮坊)을 등진 감좌지원(坎坐之原)에 장사(葬事)하였다.
 태종(太宗)이 공(公)을 위(爲)하여 장자(長子) 상(象)에게 신숙옹주(信淑翁主)로써 이강(釐降) 즉 임금의 딸이 신하(臣下)에게 시집 가는 것인데 이는 요(堯) 임금의 딸 이리(釐理)를 필부(匹夫) 순(舜)에게 강가(降嫁)케한 고사(故事)에서 인용(引用)한 말이다.
 선조(宣祖) 조(朝)에 와서 교서(敎書)에 이르기를 황희석(黃希碩)의 허다(許多)한 자손(子孫)을 백세(百世)로 사역(事役) 즉 군역(軍役) 이역(吏役) 천역(賤役)에 침범(侵犯)하지 말 것이라 하였으며 이(李) 상(相) 원익(元翼)의 장계(狀啓)에 이르기를 황희석(黃希碩)의 적손(嫡孫)인 즉 백세(百世)로 물침(勿侵)하고 서손(庶孫)인 즉 비록 낙강(落講)이라 할지라도 군역(軍役)에 침범(侵犯)치 아니하며 널리 인재(人材)를 등용(登用)함이 어떠하겠나이까? 한 즉 윤허(允許)하시기를 지난 날에 의거(依據)하여 시행(施行)하라 하셨으니 역대(歷代) 조정(朝廷)의 숭봉지전(崇奉之典)의 대략(大略)을 기술(記述)한다.
 배위(配位)는 신혜택주(愼惠宅主) 삼척(三陟) 박씨(朴氏)니 부정(副正) 원우(源祐)의 여(女)이요, 계배(繼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연안(廷安) 이씨(李氏)니 형조전서(刑曹典書) 기형(琪亨)의 여(女)라, 4남(四男)을 낳으시니 장남(長男)은 상(象)으로 부마(駙馬)로서 재취(再娶)로 파위(罷尉)되었다가 뒤에 벼슬이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이르고, 다음은 인(麟)이니 예조판서(禮曹判書)요, 그 다음은 난(鸞)이니 병조정랑(兵曹正郞)이요, 또 그 다음은 곡(鵠)이니 동래부사(東萊府使)라. 자손(子孫)이 번연(繁衍)하여 그 빛남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은 공(公)이 덕(德)을 쌓은 연고(緣故)라 하겠다.
 오호(嗚呼)라! 공(公)의 훈업(勳業)이 충훈부(忠勳府)에 기재(記載)되어 있고 그 사실(史實)인 즉 한(漢)나라 소하(蕭河)와 조참(曺叅)이요, 당(唐)나라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에 비(比)하여 조금도 부족(不足)함이 없다 하겠다. 정부(政府) 이름으로 예조(禮曹)에서 결의(決議)하여 시호(諡號)를 양무(襄武)로 정(定)하고 이조(吏曹)에서 기록(記錄)된 사실(事實)이니만큼, 정부(政府)에서 이러한 공신(功臣)들의 행록(行錄)을 찬술(撰述)한 것이 반드시 있었을 것으로 생각(生覺)이 나나 여러차례 병화(兵火)를 겪어 집에 있는 문헌(文獻)에 증거(證據)가 없으니 어찌 통한(痛恨)함을 금(禁)할 수 있으리요?
 가만히 생각(生覺)한 즉 세대(世代)가 더 멀어져 뒷날에 오늘을 보는 것이 도리어 오늘날에 옛날을 보는 이만 같지 못할까 두려워, 지금(至今)까지 전해 내려온 대략(大略)을 기록(記錄)하여 다음날의 고증(考證)을 삼게 하노라.
  종예손(宗裔孫) 병(昞) 근찬(謹撰)

c3-052.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23 20:39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