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도구

사이트 도구


b-093

벽계처사평해황공묘갈명(碧溪處士平海黃公墓碣銘)

 한문 원문 보기

 한문 원문 보기

碧溪處士平海黃公墓碣銘
粵昔明宣之際大海先生講道海上也先生之從弟碧溪公與從侄海月公登 先之門薰沐乎敎雨涵濡乎義方蔚然爲一家之文學關嶺之士尙慕效之不 衰何其盛哉公後孫曜訪余乎梅溪之上謬責羨道之銘曰吾祖之世令四百 餘星曆中經衰贊論不備隧門表尙關焉願惠一言之重以詔我後人也顧 年迫九句精耗神散不敢是役而窃念不以文而盖也分之厚也不獲終辭按 本而敍之曰公諱應辟字希賢號碧溪姓黃氏其先本中州人漢學士諱洛浮 海而東泊于平海因以爲受貫之祖東京時有諱瑞金紫光祿大夫評理門下 侍中諡文節寔分派祖也諱厚禮賓判官諱玉崇漢城判尹諱譜坤生員於公 爲玄祖曾祖若祖也考諱璉禮安訓導妣宜人黃氏女公生有異質甫七八歲 受課於先公不煩敎督能暁解文義綴句亦煩奇警稍長病世之枸儒典學只 務誦說體用遂專心於近裡之學有深造自得之趣尤篤於事親備養志體友 於弟天顯隆降摯故著於日可見者無一事之不致意也常於海月公以下誣 事赴燕京也公至誠勉勉於不辱君命之意海翁後語人曰北使之往復多賴 碧翁云此深識之言也蔀而不章雖若可恨然行修於身敎成於家完名於襄 季非內而外者又何足加損也卒以壬子八月十五日葬于郡西陽谷乾坐原 配孺人英陽南氏女卒庚申九月九日葬用魯附生子春一孫男彦南曾孫汝 龍玄孫石俊命俊餘不錄後有行義文學恢張緖業綿綿不贊盖積蔭之所自 也是役也賢最殫竭誠膂以底于成法當附書遂爲之銘曰秉志堅定毅然乎 樑春勅躬嚴肅森然乎繩尺由其見之所自也明是以信之篤有是之勳取以 守之確樂善有裕未顯非屈陽山蒼蒼遺光藹蔚
  甲寅三月日漢陽趙獻基謹撰


벽계처사(碧溪處士) 평해황공(平海黃公)의 묘갈명(墓碣銘)
 옛날 명종(明宗)과 선조(宣祖)임금 때에 대해(大海) 황선생(黃先生)이 해변지대(海邊地帶)에서 도학(道學)을 강론(講論)했는데 선생의 종제(從弟)인 벽계공(碧溪公)이 종질(從姪)인 해월공(海月公)과 더불어 선생의 문하(門下)에 올라 가르침의 교훈를 흠뻑 몸에 적셨고 의(義)로운 방향을 함양(涵養)하여 한 가문(家門)의 학문을 무성하게 하니 관동(關東)과 영동(嶺東)의 선비들이 우러러 사모하고 본받으려 하는 마음을 멈추지 않았으니 어찌 그렇게 대단할 수 있겠는가. 공(公)의 후손(後孫)인 요(曜)가 매한(梅漢)에 있는 나를 찾아와서 묘갈명(墓碣銘)을 잘못 책임지우면서 말하기를 우리 할아버지께서 사시던 세상과는 지금 4(四)백여년이 되었는데 그 중간에 가문(家門)이 쇠체(衰替)하여 묘갈문(墓碣文)을 갖추지 못하여 아직도 묘비(墓碑)를 세우지 못했습니다. 한 말씀 주시어 우리들 후인(後人)을 깨우쳐 주십시오. 하므로 돌이켜 생각하니 내가 나이 90(九十)에 가까운지라 정신이 산만하여 감히 이 일을 감당치 못할 듯하지만 가만히 생각하니 글과 관계없이 세의(世誼)가 두터운 처지(處地)로 끝내 사양했으나 받아주지 않아서 행장(行狀)을 상고(詳考)하고 서술(敍述)하노니 공(公)의 휘(諱)는 응벽(應辟)이요 자(字)는 희현(希賢)이며 호(號)는 벽계(碧溪)로서 성(姓)은 황씨(黃氏)이니 그 선대(先代)는 본시 중국(中國)사람인데 한(漢)나라 때에 학사(學士) 벼슬을 한 휘(諱) 낙(洛)께서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와서 평해(平海)에 정박(碇泊)했기 때문에 관향(貫鄕)을 받은 시조(始祖)가 되었다. 고려(高麗) 때에 있었던 휘(諱) 서(瑞)는 벼슬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평리문하시중(評理門下侍中)이며 시호(諡號)는 문절(文節)이니 이 어른이 분파선조(分派先祖)이다. 휘(諱) 후(厚)는 예빈판관(禮賓判官)이었고 휘(諱) 옥승(玉崇)은 한성판윤(漢城判尹)이었으며 휘(諱) 보곤(輔坤)은 생원(生員)이니 이 세분이 공(公)에게는 현조(玄祖)와 증조(曾祖)와 조부(祖父)가 되신다.
 아버지의 휘(諱)는 연(璉)이니 예안훈도(禮安訓導)를 지냈으며 어머니는 의인(宜人)으로서 황씨의 따님이다.
 공은 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資質)이 있어서 겨우 7~8(七、八)세에 아버지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는데 가르치고 보살피는 번거로움이 없어도 능히 글 뜻을 밝게 풀었으며 글귀를 짓는 방법도 자못 기이(奇異)하고 놀라웠다.
 점점 자라서는 세상의 편협한 유학자(儒學者)와 사곡(邪曲)한 학문을 병이라고 생각하여 다만 체용설(體用說)을 외우기에 힘쓰다가 근리지학(近裡之學)에 전심(專心)하여 깊은 조예(造詣)와 스스로 터득하는 취미를 가졌으며 더욱이 양친을 봉양함에 독실하여 부모의 뜻과 몸을 함께 봉양하고 동생에게 우애(友愛)하여 부자형제간(父子兄弟間)의 친의(親誼)를 극진히 가졌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현저하게 볼 수 있는 것의 한 가지 일도 뜻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일찍이 해월공(海月公)이 조정의 변무사(辯誣事) 관계로 명(明)나라 서울에 사신(使臣)으로 들어갈 때에 공이 지성(至誠)으로 임금의 명(命)을 욕되게 하지 않도록 힘쓰라는 뜻을 말했는데 해월공(海月公)이 그 뒤에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북쪽에 사신으로 왕복(往復)할 때에 벽계옹(碧溪翁)의 가르침이 많은 힘이 되었다고 말했으니 이 말이 공을 깊이 아는 말이다. 궁(窮)한 띠집에서 빛을 보지 못한 것이 비록 한(恨)이 된다고 하겠지만 그저 나 자신을 위하여는 행검(行檢)을 닦았고 가문(家門)을 위해서는 교화(敎化)를 이루었으며 쇠퇴해지는 세상에서 이름을 완전하게 보전하였으니 덕행(德行)을 안으로 쌓고 밖으로 자랑하지 않은 것이라 그밖에 또 무엇이 공(公)에 가감(加減)되겠는가. 임자년 1월 15(十五)일 졸(卒)하시어 군(郡)의 서쪽 양곡(陽谷) 건좌(乾坐)의 둔덕에 장사지냈다.
 배위(配位)는 영양남씨(英陽南氏)로서 경신년 9(九)월 9(九)일에 졸(卒)하여 용로(用魯)에 부장(附葬)했다.
 아들은 춘일(春一)이요 손자는 언남(彦男)이며 증손(曾孫)은 여룡(汝龍)이요 현손(玄孫)은 석준(石俊)과 명준(命俊)이며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그의 행의(行義)가 깃든 학문과 가업(家業)을 넓게 베푼 행적(行蹟)이 후세에까지 면면(綿綿)히 이어져 오는 것은 대체로 음덕(蔭德)을 쌓은데 비롯한 것이다. 어진 후손(後孫)들이 정성과 힘을 다하여 비를 이룩하는 밑바탕이 되어 법도(法度)에 따라 부서(付書)하여 드디어 명(銘)을 말하니

秉志堅定 뜻 가짐이 굳건하여
毅然乎樑 한 가문(家門)의 들보로서 의연(毅然)했으며
春勅躬嚴 몸가짐이 엄숙하니
肅森然乎 엄숙함 그대로이다.
繩尺由其 법도(法度)를 지킴에
見之所自 스스로를 살폈다.
也明是以 그 식견(試見)이 밝음으로 말미암아
信之篤有 신의(信義)가 두터웠으며
是之勳取 이것을 근면(勤勉)에서 얻음이 있었으니
以守之確 지키는 바도 확실했다.
樂善有裕 선(善)을 즐김에 여유가 있었으니 未顯非屈 세상에 현달(顕達)하지 못해도 비굴(卑屈)하지 않았다.
陽山蒼蒼 서양곡(西陽谷)의 산 푸르고 푸른데
遺光藹蔚 후세에 남긴 빛이 애울(藹蔚)하도다.

  갑인년 3(三)월 일 한양(漢陽) 조헌기(趙獻基) 삼가 짓고
  경주(慶州) 이장헌(李章憲) 삼가 쓰고
  십육세 사손(嗣孫) 진섭(鎭燮) 삼가 세우다.

주1. 체용설(體用說): 사물(事物)의 본체(本體)와 그 작용(作用)을 설(說한) 것

주2. 변무사(辯誣事): 그 말이 진실이 아님을 변명함。(조정(朝廷)이 후금(後金)과 화친(和親)한다는 말을 변명함)

b-093.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6/07 07:15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