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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2-017

귀암공황희손묘갈명(龜巖公黃熙孫墓碣銘)

귀암공황희손묘갈명(龜巖公黃熙孫墓碣銘)
 왕동(旺洞) 한 지역은 즉 우리집 선영(先瑩)이 있는 곳이다. 선조(先祖) 선교랑(宣敎郞)의 분묘를 처음에 이곳에 정하고 그 묘하에 백(百)여보 내려와서 술좌지원(戌坐之原)의 묘가 즉 귀암공(龜巖公)의 유해(遺骸)와 의금(衣衿)을 묻은 곳이러니 세대가 오래됨에 예전 비석이 마멸되어 문자를 읽을 수 없어 일찍부터 다시 개체할 것을 의논한 바 있었는데 뜻밖에 금춘에 족인(族人) 석기(錫起)가 해외에서 거금을 모아 양대의 비석을 독단으로 건립한다 하니 후손된 도리의 효성지심(孝誠之心)이 칭찬할만할지라.
 그래서 문중 노소친지(老少親知)가 나에게 비문을 새로 지어라 하나 연로하여 정신이 쇠진하고 기운이 떨어져 처음 사피코저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종사(宗事)에 순종(順從)하는 도리가 못됨으로 마지 못하여 명에 쫓아 삼가 살펴보니 공의 휘는 희손(熙孫)이요 자는 호여(皥汝)요 호는 귀암(龜巖)이며 성은 황씨(黃氏)니 평해(平海)에서 계출(系出)하셨다.
 시조의 휘는 낙(洛)이라는 어른이오 중조(中祖)의 휘(諱) 온인(溫仁)은 고려조의 금오장군(金吾將軍)으로 태자검교(太子檢校)요 그로부터 4(四)대를 내려와서 휘(諱) 용(𤨭)은 고려조 대광보국(大匡輔國)이요 시(諡)는 충경공(忠敬公)이요 휘(諱) 태백(太白)은 형조전서(刑曹典書)로 이조에 와서 증(贈) 우의정(右議政)이요 휘(諱) 우(祐)는 병조전서(兵曹典書)로 이조에 와서 증(贈) 좌의정(左議政)이요 휘(諱) 천계(天繼)는 이조 초에 훈공(勳功)으로써 발탁되어 삼도관찰사(三道觀察使)를 역임하시고 세상에서 잠재선생(潛齋先生)이라 칭하고 휘(諱) 을석(乙碩)은 공조전서(工曹典書)요 휘(諱) 후로(厚老)는 녹사(錄事)요 휘(諱) 휴(睢)는 훈도(訓導)요 고조이며 휘(諱) 문수(文壽)는 선교랑(宣敎郞)이니 공에게 증조이며, 조(祖)의 휘는 종사(從仕)니 진사(進士) 장사랑(將仕郞)이요, 고(考)의 휘(諱) 맹춘(孟春)은 생원승의랑(生員承議郞)이라.
 비(妣)는 안동권씨(安東權氏) 이철(以鐵)의 여이요 묘는 공과 동봉(同封)이며, 1(一)남을 생하니 휘(諱) 희손(熙孫)이라 그 재질이 명민하고 가훈을 답습하여 선대의 교도를 이어서 유행(儒行)이 독실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의 위계에 오르고 배는 의성김씨(義城金氏) 응천(應天)의 여로 예절을 닦았으며 2(二)남을 생하니 장자는 휘(諱) 귀성(貴成)이요 호는 만휴당(晩休堂)이라. 호성훈공(扈聖勳功)으로 정략장군(定略將軍)이요 차자는 휘(諱) 한성(漢成)이니 호는 취적헌(取適軒)이라. 휘(諱) 귀성(貴成)이 1(一)남을 생하니 휘(諱) 필수(弼守)로 전력부위(展力副尉)요 휘(諱) 한성(漢成)이 1(一)남을 생하니 휘(諱) 세림(世琳)은 진사(進士)라, 여외(餘外)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오호라 공의 세대가 이미 4백(四百)여년이 지났으니 그 독실한 행의와 아름다운 덕행은 오직 유문에 빙거할 수밖에 없을 것인데 화재로 소실되고 수습함이 없으니 후손들의 무궁지한(無窮之恨)이라 하겠다.
 돌이켜보건대 나같이 먼 예손이 어찌 감히 억측으로 글을 쓸 수 있으랴. 사유를 기술하는 중에 혹 지나친데 있어 오히려 공의 겸양지덕(謙讓之德)에 손(損)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간략히 세계와 이력과 자손의 후출만을 우(右)와 같이 엮어 후인의 증빙이 되게 하노라. 명왈(銘曰)

有屹九成(유흘구성) 구성봉(九成峯)이 높이 솟아서
淑氣磅礴(숙기방박) 맑은 기운이 장엄하도다.
寔近先兆(식근선조) 이곳 선조의 분묘 아래에
公塋是托(공영시탁) 공의 분묘가 계시네
來孫景仰(내손경앙) 후손이 우러러 뵈오니
百世高風(백세고풍) 백세 뒤에도 높은 풍도를 전하리.
敢銘三尺(감명삼척) 감히 삼척 비석에 새겨두니
昭示無窮(소시무궁) 영원토록 밝게 빛나리로다.

  후예손(後裔孫) 환묵(煥默) 근찬(謹撰)

c32-017.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6/08 12:29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