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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2-007

기묘파보 찬사(己卯派譜讚辭)

찬사(讚辭)
 옛 말씀에 이르기를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 하였으니, 옛 것을 살펴 새로운 것을 익히고 위로써 우리의 귀감(龜鑑)으로 삼아야 할 것인 바, 우리가 수보(修譜)를 하는 참뜻도 선조의 내력을 명찰하고 유지(遺志)를 봉행하여 후세에 전하기 위한 것이다.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데 있어서도 과거를 회고하고 장래를 설계하여야 하는 법이거늘 새로운 천(千)년을 목전에 두고 있는 현금(現今)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감회가 새로운 것이다.
 서양의 문물이 본격적으로 들어온 지 백(百)여년이 지난 지금 물질은 다소 풍요로와 졌으나, 윤강(倫綱)이 피폐(疲弊)하고 족의(族誼)가 소원하여졌다. 이에 동양의 인륜도덕을 고양하고 족친간의 정의(情誼)를 친밀하게 할 필요성이 시급할 뿐 아니라 병진보(丙辰譜) 이후 23(二十三)년이 흘러 그 간 족친족척(族親族戚)의 수도 증가하였고, 교통, 통신 그리고 인쇄기술의 발달로 보책을 용이하게 발간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수보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있던 차에 원근 제종(諸宗)이 미관(微官)의 불과한 우리 형제에게 찬사를 청탁하므로, 천학비재(淺學菲才)하나 모선(慕先)의 일념으로 제종제현(諸宗諸賢)의 뜻을 받들어 삼가 찬사를 상재(上梓)한다.
 보첩(譜牒)과 문집을 근거로 살피건대 우리 시조이신 학사공(學士公) 휘 낙(洛)께서 동한(東漢)(: 후한과 동일) 건무(建武)년간(서기 28(二八)년)에 중국에서 교지국(월남)에 사신으로 배를 타고 가던 중 풍랑으로 우리나라에 평해(平海)에 안거하신 이래 1,970(一千九百七十)여년이 흘러 지금에 이르렀다. 일근만지(一根萬枝), 일지만엽(一枝萬葉)으로 후손이 번성하여 누백(百)년 누십(十)세에 이르기까지 수지분파(樹枝分派)되어 전국8(八)역에 산재 거주하게 되었으나 원래는 한 뿌리라 할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됨에 누차의 병화로 문적이 소실되어 이전의 세계(世系)는 무전하고, 고려초(高麗朝)에 이르러 관직이 금오장군(金吾將軍) 태자검교(太子檢校)에 오른 휘 온인(溫仁)을 중조로 모시고 이로부터 세계를 시계(始啓)하게 되었다. 그 후 일(一)조백(百)손으로 후손이 증가하고, 무수의 지파가 형성되어 필봉으로 모두 기술하기 곤란하다. 우리 족조족친(族祖族親)은 시계(始系)로부터 4(四)세 숭록대부(崇祿大夫)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 시호 충경(忠敬) 휘 용(𤨭)이요, 그 뒤 세계를 이어 7(七)세 감사공(監司公) 호 잠재(潛齋) 휘 천계(天繼)이다.
 감사공(監司公)께서는 홍무(洪武) 경오(庚午)(: 1390(一三九〇))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시고, 성조(聖祖)(: 태조(太祖))의 총탁(寵擢)을 받아 경기(京畿) 전라(全羅) 경상(慶尙) 삼도관찰사(三道觀察使)를 역임하셨으며, 만년에 해관(解官)하신 이후에 경기도(京畿道) 포천(抱川)에서 남하하시어 풍산현(豊山縣)에 이거하셨고, 시우동(時雨洞)에는 공의 묘소(墓所)가 있으며, 공의 공덕을 추모하고 봉사(奉祀)를 계속하기 위한 영모재(永慕齋)가 있다.
 그후 11(十一)세 선교랑(宣敎郞) 휘 문수(文壽)공께서 익양(益陽)(: 인금(仁今)의 구명(舊名))으로 이거하셨으며, 14(十四)세 통훈대부(通訓大夫) 휘 희손(熙孫)께서 우리의 현조(顯祖)이신 정략장군(定略將軍) 호 만휴당(晩休堂) 휘 귀성(貴成)공과 취적헌(取適軒) 휘 한성(漢成)공의 형제분을 두시게 되었다. 만휴(晩休) 선조(先祖)에서는 지용(智勇)과 무략(武略)이 뛰어나 서애(西厓) 유상공(柳相公)으로부터 소명(召命)을 받고 임진왜란(壬辰倭亂) 시에는 선조(宣祖) 임금을 호위(扈衛)하고 다수의 책략(策略)을 헌상(獻上)하여 왜군을 물리치고 종묘사직(宗廟社稷)을 보존케 하는데 큰 공을 세우셨으며, 취적헌(取適軒) 방조(傍祖)께서는 학문(學文)을 숭상하여 시문(詩文)에 능하고 경학(經學)에 깊었으며, 구원(邱園)에 은거하여 산수를 상양(徜徉)하고 후학의 양성에 힘을 쓰셨으니 당헌양성(堂軒兩星)(: 만휴당(晩休堂)과 취적헌(取適軒))으로 인하여 후세에 문무일정(文武一庭)이라는 칭송을 듣게 되었다.
 우리 선조가 중국(中國)과 평해(平海), 포천(抱川)과 풍산(豐山)을 거쳐 인금(仁今)에 이르기까지 풍운만리(風雲萬里)의 역정(歷程)을 겪으셨는 바, 선조의 업적을 기록하고 후세에 전하는 일이야말로 불초 후손의 임무라고 하겠다. 만력 갑진(甲辰)(: 1604(一六〇四))년 평해황씨(平海黃氏) 대동보(大同譜)가 처음으로 이루어진 이후 8(八)차에 걸쳐 창보(創譜)와 수보(修譜)를 거듭하였고, 누차에 걸쳐 각 지파문중에서 파보를 편찬하였으며, 우리 감사공(監司公) 문중에서는 3(三)차에 걸쳐 3(三)대 선계(先系) 대광공파보(大匡公派譜)를 편찬할 때 그 일원으로서 참여한 바는 있었지만, 별도로 파보를 편찬하지 않았는데, 이제 우리 문중만으로도 원근족친(遠近族親)의 수가 많아져 본 파보를 편찬하게 되었으니, 오문(吾門)의 일대경사(一大慶事)라 할 것이다.
 전국 각지에 산거하면서 덕행을 근본으로 하여 업계(業界)·학계(學界)·관계(官界) 등 각계 각층에서 활약하고 있는 우리 족친들이 합심협력하여 수보대사(修譜大事)를 마치고 보책이 각 가정에 배달되면 선조의 의덕(懿德)을 후세에 전하고 족친족척 상호간에 친목의 정을 나누시기를 삼가 기원드린다.
 끝으로 이 보책의 발간을 발의하시고 주간하신 분과 각처 각파별로 수단(收單)하고 정서(正書)하신 수단위원, 그리고 파보 간행에 물심양면으로 흔쾌히 참여해 주신 첨종제위(僉宗諸位)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둔필(鈍筆)이 선조의 업적과 보사(譜事)의 전말을 기록함에 있이 유해(謬解)가 있지나 않았는지 자괴심(自愧心)을 느끼며 찬사(讚辭)에 갈음하는 바이다.
  서기(西紀) 1999년(一九九九年) 기묘년(己卯年) 만춘(晩春)
  예손(裔孫) 문화관광부(文化觀光部) 홍보협력관(弘報協力官) 부이사관(副理事官) 현탁(鉉卓)
       창원지방법원(昌原地方法院) 밀양지원장(密陽支院長) 부장판사(部長判事) 현호(鉉虎) 근지(謹識)

c32-007.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6/08 10:38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