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정대부첨지중추부사화은평해황공중식묘갈명(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華隱平海黃公中寔墓碣銘)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호(號) 화은(華隱)
평해황공(平海黃公) 중식(中寔)의 묘갈명(墓碣銘)
옛날 명종(明宗)과 선조(宣祖)임금 때에 대해(大海) 해월(海月) 두 선생이
해변지방에서 일어나시어 학덕(學德)과 풍절(風節)이 남쪽 선비들 늪에서는
미목(眉目)으로 우뚝했으며 그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그 가문(家門)에 많은
문학사(文學士)를 배출(輩出)했다.
화은공(華隱公)의 휘(諱)는 중식(中寔)이니 행의(行義)가 독실(篤實)하고
조예(造詣)가 깊은 것으로 보아 호안정(胡安定)과 같은 가문(家門)의 사람이란 것을
알 수 있으며 영동일대(嶺東一帶)의 선비들이 그의 교화(敎化)를 높이 우러렀었다.
어느날 공(公)의 후손(後孫)인 경호(景浩)와 진표(鎭杓)가 해헌공(懈軒公)이
지은 가장(家狀)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서 잘못 묘비명(墓碑銘)을 책임지우면서
말하기를 우리 선조님이 사시던 세상과는 지금 2백(二百)여년이나 되어 영조(英祖)
정조(正祖) 연간(年間)(1737~1795)에 세운 짧은 비석에는 이끼가 침식(侵蝕)하여
글자가 망가졌으므로 지금 장차 개갈(改碣)할 계획이오니 원하옵건데
그 묘갈명(墓碣銘)을 지어 주십시요 하기에 생각해보니 나이도 늙고 기력(氣力)도
쇠해져서 감히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을 듯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니
세의(世誼)가 두터운 처지(處地)로서 또한 감히 사양치 못하고 삼가 가지고 온
가장(家狀)을 상고하여 서술(敍述)하기를
공(公)의 자(字)는 성수(誠叔)이니
한(漢)나라 때에 학사(學士)였던 휘(諱) 낙(洛)이 중국(中國)으로 부터 바다를
건너 평해(平海)에 와서 정박(定泊)해 살았기 때문에 평해(平海)를 관향(貫鄕)으로
했다. 그 처음 고려(高麗) 때에 휘(諱) 서(瑞)는 벼슬이 첨의평리(僉議評理)였으며
시호(諡號)는 문절공(文節公)이라 했다.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서 휘(諱) 옥숭(玉崇)은 한성판윤(漢城判尹)이었고
휘(諱) 보곤(輔坤)은 생원(生員)이었으며 휘(諱) 응정(應挺)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였으며 호(號)는 괴정(槐亭)이라 했으니 즉
대해선생(大海先生)의 종제(從弟)이다. 아버지 휘(諱) 도일(道一)은 호(號)가
소곡(蘇谷)인데 학행(學行)으로 천거(薦擧)되어 별제(別提)벼슬을 했다.
어머니는 의인(宜人)으로 야성정씨(野城鄭氏)이니 승황(承黃)의 따님이며
광해(光海) 4년(서기 1615(一六一五)) 을묘(乙卯) 3(三)월 14(十四)일에 계리의 집에서 공(公)을
낳으니 어릴 때부터 기량(器量)이 특출하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글 짓는 재능이
모두 정묘(精妙)한 경지(境地)에 이르렀으며 어버이의 명으로 일찍이
과거(科擧)에 응시했으나 여러번 실패하고 미련없이 벼슬에 뜻을 버렸으니 본시부터
나은(羅隱)주1의 급제(及第) 못한 한탄은 없었다. 층층시하(層層侍下)에서 효도로
봉양함에 있어서 뜻과 몸을 함께 봉양하여 조금도 결함이 없게 했다.
정해(丁亥)년에 아버지 별제공(別提公)이 세상을 떠나니 상(喪)을 치를 때는
애정(哀情)을 다하고 제사를 받들 때에는 예법을 다했으며 모든 제기(祭器)와
제물(祭物)을 별처(別處)에 감추어 두고 혼용(混用)하는 일이 없게 했으며 더욱이
부자형제(父子兄弟)의 친의(親誼)에 돈독하여 침식(寢食)을 항상 함께 하고
고난(苦難)을 겪을 때에는 함께 겪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속수공(涑水公)의
가법(家法)이라고 했다.
재물(財物)을 좋아 함을 경시(輕視)하여 지구(知舊)나 친족(親族)의 급한 사정을
볼 때마다 반드시 전대의 돈을 내어 구휼(救恤)했으며 만약 마음으로 사귄 사람이
찾아오면 닭 잡고 떡하며 술잔을 준비함에도 반드시 인정(人情)을 다하여
너그럽고 흡족하게 했다.
성품이 본시 말이 적으며 일찍이 남의 과실(過失)을 덮어주고 남의 악(惡)한
행위를 공격하지 않으며 만약 법도에 어긋나는 행위를 한 사람이 있으면 가만히
타이르고 몰래 바로잡아 주어 그로 하여금 스스로 고치도록 하여 덕화(德化)가
향리(鄕里)에 파급되었다.
살던 집 곁에 몇 간의 띠집을 짓고 편액(扁額)을 화은(華隱)이라 하고 책상에는
경사(經史)를 쌓아 놓고 뜨락에는 화초(花草)를 심어서 괴롭고 울적한 때
소일(消日)로 삼으려 유금(幽禽)을 부르는 문구(文句)로 감천궁(甘泉宮)주2의
낙(樂)과 같이 하며 경화(京華)의 화류풍류(花柳風流)를 공중에 뜬 구름과 흐르는
물같이 보았으며 자손들을 훈계함에는 겸손하고 공손함을 위주로 했으니 이것은
모두 장악(莊嶽)주3의 사이에서 배우는 것을 법 받게 하고 공자(孔子)님의 훈계를
깊이 살핀 것이다. 대로(大老)의 나이에 첨추(僉樞)의 벼슬에 오른 것은 영광이
산문(山門)을 빛내었으며 백발(白髮)이 성성하니 바라보면 마치 지상(地上)에
내려온 선관(仙官)같았다.
임신(壬申)년 3(三)월 6(六)일에 침소(寢所)에서 생(生)을 마치니
향년이 78(七十八)세였는데 군(郡)의 서쪽 황산곡(黃山谷)의 곤향(坤向)
둔덕에 한 달만에 예장(禮葬)했으며 배위(配位)는 숙부인(淑夫人)인
순흥안씨(順興安氏)이니 여정(汝靜)의 따님이며 양곡(陽谷)의 임좌(壬坐) 둔덕에 묘를 썼다.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었으니 아들은 석건(石建)이며 딸은 이예(李藝)에게
출가했고 석건(石建)은 4남1녀(四男一女)를 두었으니 아들은 명하(命河)와
명해(命海)와 명득(命得)과 명호(命浩)이며 딸은 백시언(白時彦)에게 출가했고
명하(命河)의 아들은 요(垚)와 각(㙾)이요 딸은 박내수(朴來修)와
김중려(金重礪)에게 출가했으며 요(垚)의 아들은 처오(處五)와 득오(得五)와 용오(用五)와
천오(天五)인데 용오는 출계(出系)했고 딸은 주규채(朱奎彩)에게 출가했다.
각(㙾)의 아들은 재오(在五)와 신오(信五)와 보오(輔五)와 중오(重五)이며 딸은
장만대(張萬大)와 신중현(申重鉉)과 백사도(白[辶思]道)와 김경호(金景灝)에게
출가했으며 명해(命海)의 계자(系子)는 집(㙫)이며 명득(命得)의 아들 집(㙫)은
출계(出系)했고 택(垞)이며 딸은 김하정(金夏鼎)에게 출가했다.
명호(命浩)의 아들은 빈(𡒨)과 진(瑨)이며 딸은 구성리(具聖理)에게 출가했고
빈(𡒨)의 아들은 용오(龍五)와 인오(仁五)인데 인오(仁五)는 출계했고 진(瑨)의
아들은 상호(尙五)이며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드디어 명(銘)을 말하노니
海山淸淑 바다와 산의 청숙(淸淑)한 기운이
篤生賢碩 독실한 현인(賢人)을 낳게 하였다.
薰灸月翁 해월옹(海月翁)의 문하에서 배움을 받고
唯諾蘇塾 소곡공(蘇谷公)의 학당에서 행의(行義)를 익혔다.
三省之本 일성오신(日省吾身)주4을 근본으로 하고
五敎之目 오륜(五倫)의 덕목을 지켜나갔다.
升沈關數 흥망(興亡)은 운수(運數)에 관계되나니
梁秋林鶴 무수리와 학 처럼 살아나왔다.
安之若素 타고난 천성(天性)으로 살아 왔으니
山靑水綠 산은 푸르르고 물 또한 녹수(綠水)로다.
爵以樞 첨추(僉樞)의 벼슬이 수직(壽職)으로 내리고
杖以綠玉 녹옥(綠玉)의 지팡이도 하사(下賜)되었다.
優哉游哉 한가롭게 임의(任意)대로 살아나가니
外何樂 이 밖에 즐거움이 무엇이 있겠는가.
黃山之麓 황산곡(黃山谷)의 산록(山麓)에 몸을 감추니
有崇四尺 사척(四尺)의 무덤은 높기도 하네
龜伏螭行 용(龍)두겁 거북 바탕에 비(碑)를 세우니
山川動色 산천(山川)의 경색(景色)이 변하였도다.
君子攸藏 군자(君子)를 거기에 안정(安葬)했으니
過者咸式 지나가는 사람들아 모두 본받아라.
임오(壬午)년 10(十)월 상순에 한양조씨(漢陽趙氏)의 후예 조헌기(趙獻其) 삼가 짓다
12(十二)세손 진학(鎭鶴) 개갈(改碣)했고
11(十一)세손 경곤(景坤) 삼가 쓰다
주1. 나은(羅隱): 오월(吳越)의 신성인(新城人). 미래(未來)의 일을 예언(豫言)하여 잘 적중(適中)했다.
주2. 감천궁(甘泉宮): 한무제(漢武帝)가 지은 별궁(別宮)
주3. 장악(莊嶽): 제(齊)나라의 거리 이름. (孟子) 置之莊獻之門日撻而求其楚
주4. 일성오신(日省吾身): 조자(曹子)가 일일삼성오신(一日三省吾身)이라 하여 하루에 세번 자신을 반성하라는 훈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