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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2-006 [2025/06/06 23:27] ssio2c32-006 [2025/06/08 10:35] (현재) ssi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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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묘파보 찬사(己卯派譜讚辭)===
 <WRAP 37em justify> <WRAP 37em justify>
-<typo ff:'한양해서'; fs:1em; lh:1.5em>+<typo ff:'한양해서'; fs:1.2em; lh:1.5em>
 \_**찬사(讚辭)**\\ \_**찬사(讚辭)**\\
 \_만리장류(萬里長流)의 대하(大河)도 한 줄기 계곡물에서 비롯되듯이 인류 또한  \_만리장류(萬里長流)의 대하(大河)도 한 줄기 계곡물에서 비롯되듯이 인류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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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대저 족보는 한 종족(宗族)의 계보(系譜)로써 부계(父系)를 중심으로 혈연관계를 \_대저 족보는 한 종족(宗族)의 계보(系譜)로써 부계(父系)를 중심으로 혈연관계를
-체계적으로 나타낸 책이다.이는 종족의 역사이며 혈통을 명확히 실증하는 귀중한+체계적으로 나타낸 책이다. 이는 종족의 역사이며 혈통을 명확히 실증하는 귀중한
 문헌이다. \\ 문헌이다. \\
  
 \_황씨(黃氏)의 시조는 신라(新羅) 유리왕(琉璃王) 당시 한(漢)나라에서  \_황씨(黃氏)의 시조는 신라(新羅) 유리왕(琉璃王) 당시 한(漢)나라에서 
 황장군(黃將軍)과 구장군(丘將軍)이 함께 배를 타고 교지국(지금의 월맹)으로  황장군(黃將軍)과 구장군(丘將軍)이 함께 배를 타고 교지국(지금의 월맹)으로 
-갔다가 돌아오던 중 풍랑을 만나 동해안 평해(平海)에 정착하여  +갔다가 돌아오던 중 풍랑을 만나 동해안 평해(平海)에 정착하여  
-황장군은 월송(月松) 북쪽에 자리를 잡고 구장군은 구미(丘尾) 박모(北浦)에  +황장군은 월송(月松) 북쪽에 자리를 잡고 구장군은 구미(丘尾) 북포(北浦)에  
-안착하였다는 문헌이 평해군지에 등재되었다 한다. 그러나 여말(麗末) 해의 +안착하였다는 문헌이 평해군지에 등재되었다 한다. 그러나 여말(麗末) 해의 
 침입으로 인하여 문적이 소실되어 확실히 침입으로 인하여 문적이 소실되어 확실히
-증빙할 만한 근거는 없다. 그 후 황씨는 학사공(學士公) (洛)을 시조로 하여 +증빙할 만한 근거는 없다. 그 후 황씨는 학사공(學士公) (洛)을 시조로 하여 
 고려조(高麗朝)에서 三파[(평해(平海)·장수(長水)·창원(昌原)]로 처음에는 한  고려조(高麗朝)에서 三파[(평해(平海)·장수(長水)·창원(昌原)]로 처음에는 한 
-시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 평해황씨(平海黃氏)는 금오창군(金吾將軍) 휘 인(溫仁)을+시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 평해황씨(平海黃氏)는 금오창군(金吾將軍) 휘 인(溫仁)을
  
 중시조로 하여 대대로 문무관(文武官) 재상(宰相)의 자리를 지내온 분들도 많았고 중시조로 하여 대대로 문무관(文武官) 재상(宰相)의 자리를 지내온 분들도 많았고
 조선(朝鮮)에 들어와서는 역사에 반반(班班)함을 가히 자랑할 만하다. 이것은 진실로  조선(朝鮮)에 들어와서는 역사에 반반(班班)함을 가히 자랑할 만하다. 이것은 진실로 
-조선(祖先)의 깊은 후덕의 적공(積功)이 아니었던들 어찌 수百년동안 찬연한 문벌로 +조선(祖先)의 깊은 후덕의 적공(積功)이 아니었던들 어찌 수백()년동안 찬연한 문벌로 
 가업을 이어내려 올 수 있었겠는가.\\ 가업을 이어내려 올 수 있었겠는가.\\
  
c32-006.1749220038.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6/06 23:27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