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파보 찬사(己卯派譜讚辭)
찬사(讚辭)
만리장류(萬里長流)의 대하(大河)도 한 줄기 계곡물에서 비롯되듯이 인류 또한
시류(時流)에 따라 진화 발전하여 문명을 창조하고 오늘의 번영을 성취하였다. 아득한
옛날부터 혈연을 중심으로 부족사회가 형성되었고 나아가서는 국가가 창조되어 온
과정이다.
대저 족보는 한 종족(宗族)의 계보(系譜)로써 부계(父系)를 중심으로 혈연관계를
체계적으로 나타낸 책이다. 이는 종족의 역사이며 혈통을 명확히 실증하는 귀중한
문헌이다.
황씨(黃氏)의 시조는 신라(新羅) 유리왕(琉璃王) 당시 한(漢)나라에서
황장군(黃將軍)과 구장군(丘將軍)이 함께 배를 타고 교지국(지금의 월맹)으로
사신갔다가 돌아오던 중 풍랑을 만나 동해안 평해(平海)에 정착하여
황장군은 월송(月松) 북쪽에 자리를 잡고 구장군은 구미(丘尾) 북포(北浦)에
안착하였다는 문헌이 평해군지에 등재되었다 한다. 그러나 여말(麗末) 해적의
침입으로 인하여 문적이 소실되어 확실히
증빙할 만한 근거는 없다. 그 후 황씨는 학사공(學士公) 낙(洛)을 시조로 하여
고려조(高麗朝)에서 三파[(평해(平海)·장수(長水)·창원(昌原)]로 처음에는 한
시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 평해황씨(平海黃氏)는 금오창군(金吾將軍) 휘 온인(溫仁)을
중시조로 하여 대대로 문무관(文武官) 재상(宰相)의 자리를 지내온 분들도 많았고
조선(朝鮮)에 들어와서는 역사에 반반(班班)함을 가히 자랑할 만하다. 이것은 진실로
조선(祖先)의 깊은 후덕의 적공(積功)이 아니었던들 어찌 수백(百)년동안 찬연한 문벌로
가업을 이어내려 올 수 있었겠는가.
금반(今般) 22대조(二十二)대조 감사공(監司公) 이하 파보를 하기 위하여 기묘(己卯)년
정초에 파종회를 안동(安東) 양지회관에서 발족시켜 임원을 구성하기에 이르러
각파별로 수단을 착수하였으나 산업사회의 발전으로 인하여 각 지역으로 이산되어
항방이 막연한 친족과 파보를 비협조하는 친족들이 있어 유감이었으나 집행부
전임원진이 숭고한 노력과 첨종제현(僉宗諸賢)의 협조로 시종일관 각고(刻苦)한
근념(勤念)으로 수단을 완료하여 보책을 발간케 되었으니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아니할 수
없으며 특히 이번 파보에는 병진보(丙辰譜)에 누락되었던 친족들이 합류하게 되어
자손으로서 종내(宗内)의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는 바이며 금반 파보에는
첨종제현(僉宗諸賢)의 기대와 소망에 미흡함이 한 두 가지가 아님을 자책하며 끝으로
감사공파종회(監司公派宗會)의 영원무궁한 번영과 후예들의 끊임없는 발전이 함께 하기를
기원하면서 삼가 찬사(讚辭)에 가늠하는 바입니다.
1999년(一九九九年) 기묘(己卯) 감사공(監司公) 22세(二十二世) 예손(裔孫) 시구(時九) 근지(謹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