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3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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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묘파보 찬사(己卯派譜讚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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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찬사(讚辭) | + | \_**찬사(讚辭)**\\ |
- | 옛 말씀에 이르기를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 하였으니, | + | \_옛 말씀에 이르기를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 하였으니, |
- | 것을 익히고 위로써 우리의 귀감(龜鑑)으로 삼아야 할 것인바, 우리가 수보(修譜)를 | + | 것을 익히고 위로써 우리의 귀감(龜鑑)으로 삼아야 할 것인 바, 우리가 수보(修譜)를 |
- | 하는 참뜻도 선조의 내력을 명찰하고 유지(遺志)를 봉행하여 후세에 전하기 위한 | + | 하는 참뜻도 선조의 내력을 명찰하고 유지(遺志)를 봉행하여 후세에 전하기 위한 |
- | 이다. 새로운 세키를 맞이하는 데 있어서도 과거를 회고하고 장래를 설계하여야 | + | 것이다.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데 있어서도 과거를 회고하고 장래를 설계하여야 |
- | 는 법이거늘 새로운 | + | 하는 법이거늘 새로운 |
- | 회가 새로운 것었다. 보 | + | 감회가 새로운 것이다. |
- | 서양의 문물이 본격적으로 들어온 지 좁여년이 치난 지금 물질은 다소 풍요로와 | + | |
- | 쳤으나, 윤장(倫綱)이 피폐(疲弊)하고 족의(族誼)가 소원하여졌다. 이에 동양의 인륜 | + | |
- | 도덕을 고양하고 족친간의 정의(情誼)를 친밀하게 할 필요성이 시급할 뿐 아니라 | + | |
- | 병진보(丙辰譜) 이흑요非三년이 흘러 스간 촉친족척(族親族戚)의 수도 증가하였고, | + | |
- | 교통, 통신 그리고 인쇄기술의 발달로 보책을 용인하게 발간할 수 있게 되었으므 | + | |
- | 로수복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있던 차에 원근 제종(諸宗)이 미관(微官)의 불과한 우 | + | |
- | 리 형제에게 찬사를 청탁하므로, | + | |
- | 종체현(諸宗諸賢)은 뜻을 받들어 삼가 찬사를 상재(上梓)한다. | + | |
- | 승보첩(譜牒)과 문집을 공터로 (살필절대 울림서조이 신학자공(學士公) 휘락(洛)께 | + | |
- | 서 동한(東漢: | + | \_서양의 문물이 본격적으로 들어온 지 백(百)여년이 지난 지금 물질은 다소 |
- | 사신으로 배를 타고 가던 중 풍랑으로 우리나라에 평해(平海)에 안거하신 이래 一千 | + | 풍요로와 졌으나, 윤강(倫綱)이 피폐(疲弊)하고 족의(族誼)가 소원하여졌다. 이에 동양의 |
- | 九百七十여년이 흘러 지금에 이르렀다. 일근만지(一根萬枝)、 일지만엽(一枝萬葉)으 | + | 인륜도덕을 고양하고 족친간의 정의(情誼)를 친밀하게 할 필요성이 시급할 뿐 아니라 |
- | 로 후손이 번성하여 누百년 누구세에 이르기까지 수지분파(樹枝分派)되어 전국八역 | + | 병진보(丙辰譜) 이후 23(二十三)년이 흘러 그 간 족친족척(族親族戚)의 수도 증가하였고, |
- | Podo(4) | + | 교통, 통신 그리고 인쇄기술의 발달로 보책을 용이하게 발간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
- | 에 산재거주하게 되었으나 원래는 한 뿌리라 할 것이다. | + | 수보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있던 차에 원근 제종(諸宗)이 미관(微官)의 불과한 우리 |
- | 그러나 세월이 오래됨에 누차의 병화로 문적이 소실되어 이전의 세계(世系)는 | + | 형제에게 찬사를 청탁하므로, |
- | 전하고, 고려초(高麗朝)에 이르러 관직이 금오장군(金吾將軍) 태자검교(太子檢校)에 | + | 제종제현(諸宗諸賢)의 뜻을 받들어 삼가 찬사를 상재(上梓)한다.\\ |
- | 오른 휘 온인(溫仁)을 중조로 모시고 이로부터 세계를 시계(始啟)하게 되었다. 그 후 | + | |
- | -조百손으로 후손이 증가하고, | + | \_보첩(譜牒)과 문집을 근거로 살피건대 우리 시조이신 학사공(學士公) 휘 낙(洛)께서 |
- | 곤란하다. 우리 족조족친(族祖族親)은 시계(始系)로부터 四세 | + | 동한(東漢)(: 후한과 동일) 건무(建武)년간(서기 |
- | 중대광보극(三重大匡輔國) 시호 충경(忠敬)、휘용(墉)이요, 그 뒤 세계를 이어 七세 | + | 사신으로 배를 타고 가던 중 풍랑으로 우리나라에 평해(平海)에 안거하신 이래 |
- | 감사공(監司公) 호 잠재(潛齋)、휘천계(天繼)이다. | + | 1,970(一千九百七十)여년이 흘러 지금에 이르렀다. 일근만지(一根萬枝), |
- | 감사공(監司公)께서는 홍무(洪武) 경오(庚午: | + | 일지만엽(一枝萬葉)으로 후손이 번성하여 누백(百)년 누십(十)세에 이르기까지 |
- | 시고, | + | 수지분파(樹枝分派)되어 전국8(八)역에 산재 거주하게 되었으나 원래는 한 뿌리라 할 것이다.\\ |
- | 관찰사(三道觀察使)를 역임하셨으며, | + | |
+ | \_그러나 세월이 오래됨에 누차의 병화로 문적이 소실되어 이전의 세계(世系)는 | ||
+ | 무전하고, 고려초(高麗朝)에 이르러 관직이 금오장군(金吾將軍) 태자검교(太子檢校)에 | ||
+ | 오른 휘 온인(溫仁)을 중조로 모시고 이로부터 세계를 시계(始啓)하게 되었다. 그 후 | ||
+ | 일(一)조백(百)손으로 후손이 증가하고, | ||
+ | 곤란하다. 우리 족조족친(族祖族親)은 시계(始系)로부터 | ||
+ |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 시호 충경(忠敬) 휘 용(𤨭)이요, 그 뒤 세계를 이어 | ||
+ | 감사공(監司公) 호 잠재(潛齋) 휘 천계(天繼)이다.\\ | ||
+ | |||
+ | \_감사공(監司公)께서는 홍무(洪武) 경오(庚午)(: 1390(一三九〇))년에 문과(文科)에 | ||
+ | 급제하시고, | ||
+ | 삼도관찰사(三道觀察使)를 역임하셨으며, | ||
포천(抱川)에서 남하하시어 풍산현(豊山縣)에 이거하셨고, | 포천(抱川)에서 남하하시어 풍산현(豊山縣)에 이거하셨고, | ||
- | 묘소(墓所)가 있으며, 공의 공덕을 추모하고 봉사(奉祀)를 계속하기 위한 영묘재(永 | + | 묘소(墓所)가 있으며, 공의 공덕을 추모하고 봉사(奉祀)를 계속하기 위한 |
+ | 영모재(永慕齋)가 있다.\\ | ||
+ | |||
+ | \_그후 11(十一)세 선교랑(宣敎郞) 휘 문수(文壽)공께서 익양(益陽)(: | ||
+ | 이거하셨으며, | ||
+ | 정략장군(定略將軍) 호 만휴당(晩休堂) 휘 귀성(貴成)공과 취적헌(取適軒) 휘 | ||
+ | 한성(漢成)공의 형제분을 두시게 되었다. 만휴(晩休) 선조(先祖)에서는 지용(智勇)과 | ||
+ | 무략(武略)이 뛰어나 서애(西厓) 유상공(柳相公)으로부터 소명(召命)을 받고 | ||
+ | 임진왜란(壬辰倭亂) 시에는 선조(宣祖) 임금을 호위(扈衛)하고 다수의 책략(策略)을 | ||
+ | 헌상(獻上)하여 왜군을 물리치고 종묘사직(宗廟社稷)을 보존케 하는데 큰 공을 세우셨으며, | ||
+ | 취적헌(取適軒) 방조(傍祖)께서는 학문(學文)을 숭상하여 시문(詩文)에 능하고 | ||
+ | 경학(經學)에 깊었으며, | ||
+ | 쓰셨으니 당헌양성(堂軒兩星)(: | ||
+ | 듣게 되었다.\\ | ||
+ | |||
+ | \_우리 선조가 중국(中國)과 평해(平海), | ||
+ | 이르기까지 풍운만리(風雲萬里)의 역정(歷程)을 겪으셨는 바, 선조의 업적을 | ||
+ | 기록하고 후세에 전하는 일이야말로 불초 후손의 임무라고 하겠다. 만력 | ||
+ | 갑진(甲辰)(: | ||
+ | 이후 8(八)차에 걸쳐 창보(創譜)와 수보(修譜)를 거듭하였고, | ||
+ | |||
+ | 편찬하였으며, | ||
+ | 대광공파보(大匡公派譜)를 편찬할 때 그 일원으로서 참여한 바는 있었지만, | ||
+ | 파보를 편찬하지 않았는데, | ||
+ | 본 파보를 편찬하게 되었으니, | ||
- | 그후+세 선교랑(宣敎郎) 휘 문수공(文壽公)께서 익양(益陽: | + | \_전국 각지에 산거하면서 덕행을 근본으로 하여 |
- | 이거하셨으며, 十四세 통훈대부(通訓大夫) 휘 희손(熙孫)께서 우리의 현조(顯祖)이신 | + | 등 각계 각층에서 활약하고 |
- | 정략장군(定略將軍) 호만휴당(晚休堂)、휘 귀성공(貴成公)과 취적헌(取適軒) 휘 한성 | + | 마치고 보책이 각 가정에 배달되면 선조의 |
- | 공(漢成公)의 형제분을 두시게 되었다.만휴전조(晚休先祖)에서는 지용(智勇)과 무략 | + | 상호간에 친목의 정을 나누시기를 삼가 기원드린다.\\ |
- | (武略)이 뛰어나 서애(西厓) 류상공(柳相公)으로부터 소명(召命)을 받고 임진왜란(壬 | + | |
- | 辰倭亂) 시에는 선조(宣祖)임금을 호위(扈衛)하고 다수의 책략(策略)을 헌상(獻上)하 | + | |
- | 여 왜군을 물리치고 종묘사직(宗廟社稷)을 보존케 하는데 큰 공을 세우셨으며, | + | |
- | 적헌(取適軒) 방조(傍祖)에서는 | + | |
- | 學)에 깊었으며, | + | |
- | 쓰셨으니 당헌양성(堂軒兩星)으로 인하여 후세에 문무일정(文武一庭)이라는 칭송을 | + | |
- | 듣게 | + | |
- | 우리 | + | |
- | 에 이르기까지 풍운만리(風雲萬里)의 역정(歷程)을 겪으셨는 바' | + | |
- | 록하고 | + | |
- | 一六〇四)년 평해황씨(平海黃氏) 대동보(大同譜)가 처음으로 이루어진 이후 차에 | + | |
- | 걸쳐 창보(創譜)와 수보(修譜)를 거듭하였고, | + | |
- | 편찬하였으며, | + | \_끝으로 이 보책의 발간을 발의하시고 주간하신 분과 각처 각파별로 수단(收單)하고 |
- | 공파보(大匡公派譜)를 편찬할 때 그 일원으로서 참여한 바는 있었지만、별도로 파보 | + | 정서(正書)하신 수단위원, 그리고 파보 간행에 물심양면으로 흔쾌히 참여해 주신 |
- | 를 편찬하지 않았는데, | + | 첨종제위(僉宗諸位)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둔필(鈍筆)이 선조의 업적과 보사(譜事)의 |
- | 본파보를 편찬하게 되었으니, | + | 전말을 기록함에 있이 유해(謬解)가 있지나 않았는지 자괴심(自愧心)을 느끼며 |
- | 전국 각지에 산거하면서 덕행을 근본으로 하여 업계(業界)·학계(學界)·관계(官 | + | 찬사(讚辭)에 갈음하는 바이다.\\ |
- | 界) 등 각계 각층에서 활약하고 있는 우리 족친들이 합심협력하여 수보대사(修譜大 | + | \_\_서기(西紀) 1999년(一九九九年) 기묘년(己卯年) 만춘(晩春)\\ |
- | 事)를 마치고 보책이 각 가정에 배달되면 선조의 의덕(懿德)을 후세에 전하고 족친 | + | \_\_예손(裔孫) 문화관광부(文化觀光部) 홍보협력관(弘報協力官) 부이사관(副理事官) 현탁(鉉卓)\\ |
- | 족척 상호간에 친목의 정을 나누시기를 삼가 기원드린다. | + | \_\_\_\_\_\_ 창원지방법원(昌原地方法院) 밀양지원장(密陽支院長) 부장판사(部長判事) 현호(鉉虎) 근지(謹識) |
- | 끝으로 이 보책의 발간을 발의하시고 주간하신 분과 각처 각파별로 수단(收單)하 | + | |
- | 고 정서(正書)하신 수단위원' | + | |
- | 첨종제위(僉宗諸位)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둔필(鈍筆)이 선조의 업적과 보사(譜事) | + | |
- | 의 전말을 기록함에 있이 유해(謬解)가 있지나 않았는지 자괴심(自愧心)을 느끼며 | + | |
- | 찬사(讚辭)에 갈음하는 바이다. | + | |
- | 西紀一九九九年 己卯年晚春 | + | |
- | 裔孫文化觀光部 弘報協力官 副理事官 鉉卓 | + | |
- | 昌原地方法院 密陽支院長 部長判事 鉉虎 謹識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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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2-007.1749252296.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6/07 08:24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