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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2-011 [2025/06/07 08:52] – 만듦 ssio2c32-011 [2025/06/08 12:21] (현재) ssi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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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휴당황귀성행장(晚休堂黃貴成行狀) +\_**만휴당황귀성행장(晚休堂黃貴成行狀)**\\ 
-공의 휘는 귀성(貴成)이요 초휘는 귀영(貴榮)이라자는 치장(致章)이요 호는 만휴 +\_공의 휘는 귀성(貴成)이요 초휘는 귀영(貴榮)이라자는 치장(致章)이요 호는  
-당(休堂)이라선세(先世)는 평해인(平海人)이니 학사휘락(學士諱洛)의 후손이며 +만휴당(休堂)이라선세(先世)는 평해인(平海人)이니 학사(學士) 휘() 낙(洛)의 후손이며 
-개국창업공신(開國創業功臣)으로 삼도관찰사(三道觀察使)를 역임하신 휘천계호잠재 +개국창업공신(開國創業功臣)으로 삼도관찰사(三道觀察使)를 역임하신 휘(諱) 천계(天繼)  
-공(諱天繼號潛齋公)의 八세손이다. +(號) 잠재공(潛齋公)의 8()세손이다.\\
-공이 나면서 바탕이 특이하여 기개가 높고 범상치 않으며 어릴때부터 나의 선조 +
-서애류성룡선생(西厓柳成龍先生)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아 진취한바 있더니 기축(己 +
-표)년에 선생이 선조대왕(宣祖大王)의 부름을 받고 공을 수행케하니 서울에 이르러 +
-본즉 왜사의지현소(倭使義智玄蘇)등이 우리나라사람의 밀입국자 수인을 잡아 바치 +
-는지라 왕이 가상히 여겨 불러보시고 환영연을 베풀어 주시는지라 공이 서애선생 +
-(西厓先生)에게 고하되 왜사(倭使)가 온것은 포망자(逋亡者)를 바치는데 본의가 있는 +
-것이 아니고 그 실상은 우리나라 형변을 탐정키 위한 것이라 하였다. 과연 그후 七 +
-년이 지난 경인(庚寅)년에 다시 사자(使者)를 보내 명(明)나라로 진군위계(進軍爲計) +
-이니 통로를 빌리라는 통신을 하고 또 임진(壬辰) 四월에 왜병이 대거 침입해오니 +
-조정에서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고 서애선생이 명장(明將)을 접대하기 위하여 평양 +
-(平壤)에 유(留)하시더니 이날에 왜적이 벌써 평양을 공격하는지라。+
  
-이때 공은 서애선생(西厓先生)과 함께 연광정(鍊光亭)에 올라더니 홍의적(紅 +\_공이 나면서 바탕이 특이하여 기개가 높고 범상치 않으며 어릴 부터 나의 선조 
-衣賊)이 가만이 모래어력에 숨어 (鳥銃)을 쏘거늘 은 편전(片箭)을 연발해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선생(先生)의 문하서 학업을 닦아 진취한 바 있더니  
-적을 많이 창하였다. +기축(己丑)에 선생이 선대왕(宣祖大王)의 부름을 받고 공을 수행케하니 울에 르러 
-그후 왕의 행차가 정주(定州)에 러 선천(宣川)으로 행(還幸)할새 서애선생 +본즉 왜사(倭使) 지현소(義智玄蘇이 우리나라 사람의 밀입국자 수인을 잡아  
-(西厓先生)으로 여 정주(定州)를 수비케 하더니 적장이 군량을 약탈코저 양곡창고 +바치는지라 왕이 가상히 여겨 불보시고 영연을 베풀어 주시는지라 공이  
-로 대도(大刀)를 차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四방에서 대거 몰려오거늘 공이 말을 타고 +서애선생(西厓先生)에게 고되 왜사(倭使)가 온 것은 포망자(逋亡者)를 치는데 본의가 는 
-활을 베고 크게 외고 돌격해 나아가니 활시위소리가 나곳에 적이 쓰러지는지라 +이 아니고 그 실은 우리나라 형변을 정키 위한 것이라 하다. 과연 그후 7(七)년이  
-그 목을 베어 창고 길가에 달아두니 적의 무리가 간담이 떨어져 싸울뜻을 갖지 못 +난 경인(庚寅)년에 다시 자(使者)를 보내 명(明)나라로 진군위계(進軍爲計)이니  
-하고 도망하여 흩어지지라 이로 인하여 정주읍 양곡창고는 보전되었다. +통로를 빌리라는 통신을 고 또 (壬辰4()월에 왜병이 대거 침입해오니 
-중 +조정에서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고 서애선생이 명장(明將)을 접대하기 위하여  
-그때 가끔이 몹시 심하여 강물이 얕니 선생이 류의 방비가 무너질까 염려 +평양(平壤)에 유(留)시더니 이에 왜적이 벌써 평양을 공격하는지라.\\
-하고 방수어(邊方守禦)할 계책을 의논하며 공으로 대강(大定江)을 지키라  +
-다. 이를 키는 층 강변서 도망은 군사를 보고 혹 평양에 실수가 있지나 않나 의 +
-심되어 공이 이를 탐지한즉 이미 평양이 함락되었는치라 곧 를 선생께 보고하니 +
-선생이 대경(大驚)여 측서 콩을 보내 왕의 신행궁(行宮)에 상계(土啓)하였다. +
-그리고 장차 (明)나라 원병이 이르면 양곡과 사료(飼料)의 비측이 없으므로 +
-선생이 근심하고 들으니 구성(龜城)에 양곡이 많이 있다하니 공과 종록(宗祿) 두사 +
-이 구성(龜城)에 가서 곡식과 사료를 준비하라 명하는지라 두 사람이 구성(龜城)+
  
-에 르러 도망간 백성들을 모아 국가의 위급함과 국정신을 고취하여 불일지간 +\_때 공은 서선생(西厓先生)과 함께 연광정(鍊光亭)에 올라있었더니  
-(不日之間)에 많은 양곡과 사료를 비축하고 원병을 고대하였다. +홍의적(紅衣賊)이 가만이 모래 언덕에 숨어 (鳥銃)을 쏘거늘 은 편전(片箭)을 연발해서 
-그해 十二월에 원군(援軍) 도원수(都元帥) 이여송(李如松)이 안주(安州)에 당도하 +적을 이 하였다.\\
-니 선생이 이원수(李元帥)를 보러가려 하거늘 공이 선생에게 아뢰기를 처음 만날때 +
-이여송(李如松)으로 하여 흐뭇하도록 할 계책을 강구하시는것이 좋을것이니 충분한 +
-지략을 짜라 하였다. 선생또한 같은 생각을 져 두 분이 충분한 의견을 교환하였 +
-다. 그리고 선생이 이제독(李提督)을 나 소매속에 평양지도를 내보니 이여송(李 +
-如松)이 주선(朱線)을 처가며 자세히 살피고 말하되 왜적의 포로가 눈앞에 있는것이 +
-나 다름없다하였다. +
-명장승훈(明將祖承訓)이 안주(安州)에서 패전하고 돌아갈제 이 선생의 명을 +
-받들어 술과 음식으로 크게 위로연을 베풀어주고 자진퇴병하기를 권하니 승훈(承 +
-訓)이 스스로 패한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요동(遼東)으로 돌아갔다. +
-명장이여송(明將李如松)이 진격하여 평양을 포위하니 공이 급히 락오(駱吳) 두장 +
-군께 권하여 일시에 좌우로 협공(挾攻)케 함에 이 견디지 못하고 성내(城内)로 몰 +
-려들어가거늘 다시 공이 고하되 적이 성내로 들어감은 마치 호랑이가 함정에 빠짐 +
-같은 격인데 적이 궁한측 험악한 반동이 추측되는 것이니 적이 빠져나갈 길을 열어 +
-주고 뒤로서 소탕해버림이 마땅하다하였다.이제독(李提督)이 공의 말을 좇아 용병+
  
-(用兵)했다. +\_그후 왕의 행차가 정주(定州)에 이르러 선천(宣川)으로 환행(還幸)할새  
-또 서애선생(西厓先生)이 공에게 명하여 강변 여울목 지키는 군졸을 감시라하 +서애선생(西厓先生)으로 하여 정주(定州)를 수비케 니 적장이 군량을 약탈코저  
-니 강기슭을 지나며 절구-수를 읊으니 시曰 +양곡창로 대도(刀)를 차고 몽둥를 휘두르며 4()방에서 대거 몰려늘  
-投筆操弓手亦高(특필조궁수역) 붓을 던지고 활을 잡으니 솜씨도 높다 +이 을 타고 
-大同江水正滔滔(동강수정도) 대동강수는 옛과 다름없이 도도히 흐르네。 +을 메고 크게 외치고 돌격해 나아가니 활시위 소리가 나는 에 이 러지는라 
-他時露布王城下(타시로포왕성하) 타일에 승전기 날리고 왕성하에 돌아가면 +그 목을 베어 창고 길가에 달아두니 적의 무가 간담이 떨어져 싸울 뜻을 갖지  
-欲挽銀河洗此(욕만은하세차도은하수〔漢江水]를 길러다 피묻은 칼을 씻으리라. +못하고 도망하여 흩어지지라 로 인여 정주읍 양곡창고는 보전되었다.\\
-하니 서애선생이 웃으시며 장사시인(壯士詩人)이 있다하더니 오늘날에 그대를 보겠 +
-다하더라。 +
-正月에 원병이 경성(京城)으로 향할새 해빙(解氷)되어 강을 건널 수 없으매 제독 +
-(提督)이 부교(浮橋)를 놓을 것을 명하지라 이에 선생이 공을 불러 우봉군수(牛峰 +
-郡守) 이희원(李希愿)과 한가로 부교를 놓데 필요한 칡넝굴을 끊어오라 하거늘 +
-공이 이군수(李郡守)와 의논하기를 지금 민력이 퇴폐해있는데 강제로 부역을 시키 +
-보다는 먼저 우리 두사람이 직접 산에 올라 칡을 끊는것이 오히려 민심을 달래 +
-고 감동시키는 결과가 될것하고 솔선수범(率先垂範)하였더니 원근에 사는 백성 +
-들이 다투어 침을 모은 고로 불일내(不日内)에 부교를 이루었다.四월에 원군이 경+
  
-성(京城)에 들어와 다시 도성(都城)을 회복하고 왕의 거마(車駕)도 회복할세 공이  +\_그때 가뭄이 몹시 심하여 강물이 얕아지니 선생이 상류의 방비가 무너질까  
-성(扈聖) 즉 왕가(王駕)를 호위한 공로로 정략장군(定略將軍)의 관직을 하사받고  +염려하고 변방수어(邊方守禦)할 계책을 의논하며 공으로 대정강(大定江)을 지키라  
-에 선무공신충공(宣武功臣忠公)이라 +명하다. 이를 지키는 중 강변에서 도망 온 군사를 보고 혹 평양에 실수가 있지나 않나  
-무술(戊戌) +월에 통제사(統制使) 이순신장군(李舜臣將軍)이 남해에서 전사하니 +의심되어 공이 이를 탐지한 즉 이미 평양이 함락되었는지라 곧 이를 선생께 보고하니 
-선생이 듣고 크게 놀라며 슬퍼하였다.그리고 공으로하여 대신 조문케하니 공도  +선생이 대경(大驚)하여 즉시 공을 보내 왕의 임시 행궁(行宮)에 상계(土啓)하였다.\\ 
-찍부터 이공(李公)과 더불어 충의지심(忠義之心)이 상합(相合)하여 막역지간(莫逆之 + 
-間)이었는지라 더욱 애석히 여기고 몹시 아파하였으며 이공(李公)의 질(姪) 완(莞 +\_그리고 장차 명(明)나라 구원병이 이르면 양곡과 사료(飼料)의 비측이 없으므로 
-芬) 등과 치상지절(治喪之節)을 협의(協議)하여 정중히 장사를 치루었다. +선생이 근심하고 들으니 구성(龜城)에 양곡이 많이 있다하니 공과 종록(宗祿)  
-공은 이해에 직책을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와 퇴폐해진 구대(舊臺)를 헐고 수간의 +두 사람이 구성(龜城)에 가서 곡식과 사료를 준비하라 명하는지라 두 사람이 구성(龜城)에  
-초당을 새로 짓고 그 당에 만휴(休)라 현액하였다.후인들이 공에게 세제향사(歲 +이르러 도망간 백성들을 모아 국가의 위급함과 애국정신을 고취하여  
-祭享祀)를 모책하고 익양서당(益陽書堂)을 건립하였다. +불일지간(不日之間)에 많은 양곡과 사료를 비축하고 원병을 고대하였다.\\ 
-通政大夫行校理知製兼經筵參贊官春秋官記注官 豊山 柳光睦謹撰+ 
 +\_그해 12(十二)월에 원군(援軍) 도원수(都元帥) 이여송(李如松)이 안주(安州)에  
 +당도하니 선생이 이원수(李元帥)를 보러가려 하거늘 공이 선생에게 아뢰기를 처음 만날 때 
 +이여송(李如松)으로 하여 흐뭇하도록 할 계책을 강구하시는 것이 좋을 것이니 충분한 
 +지략을 짜라 하였다. 선생 또한 같은 생각을 가져 두 분이 충분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그리고 선생이 이제독(李提督)을 만나 소매 속에 평양지도를 내보이니 이여송(李如松)이  
 +주선(朱線)을 쳐 가며 자세히 살피고 말하되 왜적의 포로가 눈앞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였다.\\ 
 + 
 +\_명장(明將) 조승훈(祖承訓)이 안주(安州)에서 패전하고 돌아갈 제 공이 선생의 명을 
 +받들어 술과 음식으로 크게 위로연을 베풀어주고 자진퇴병하기를 권하니 승훈(承訓)이  
 +스스로 패전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요동(遼東)으로 돌아갔다.\\ 
 + 
 +\_명장(明將) 이여송(李如松)이 진격하여 평양을 포위하니 공이 급히 락오(駱吳)  
 +두 장군께 권하여 일시에 좌우로 협공(挾攻)케 함에 적이 견디지 못하고 성내(城内)로  
 +몰려들어 가거늘 다시 공이 고하되 적이 성내로 들어감은 마치 호랑이가 함정에 빠짐 
 +같은 격인데 적이 궁한 즉 험악한 반동이 추측되는 것이니 적이 빠져나갈 길을  
 +열어주고 뒤로서 소탕해버림이 마땅하다 하였다. 이제독(李提督)이 공의 말을 좇아  
 +용병(用兵)했다.\\ 
 + 
 +\_또 서애선생(西厓先生)이 공에게 명하여 강변 여울목 지키는 군졸을 감시하라 
 +하니 강기슭을 지나며 절구 1(一)수를 읊으니 시 왈(曰)\\ 
 +投筆操弓手亦高(투필조궁수역고) 붓을 던지고 활을 잡으니 솜씨도 높다\\ 
 +大同江水正滔滔(대동강수정도도) 대동강 물은 옛과 다름없이 도도히 흐르네.\\ 
 +他時露布王城下(타시로포왕성하) 타일에 승전기 날리고 왕성 아래에 돌아가면\\ 
 +欲挽銀河洗此刀(욕만은하세차도) 은하수〔한강수(漢江水)]를 길러다 피묻은 칼을 씻으리라.\\ 
 +하니 서애선생이 웃으시며 장사시인(壯士詩人)이 있다하더니 오늘날에 그대를 보겠다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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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정월(正月)에 원병이 경성(京城)으로 향할 새 해빙(解氷)되어 강을 건널 수 없으매  
 +제독(提督)이 부교(浮橋)를 놓을 것을 명하는지라 이에 선생이 공을 불러  
 +우봉군수(牛峰郡守) 이희원(李希愿)과 한가지로 부교를 놓는데 필요한 칡넝굴을 끊어오라  
 +하거늘 공이 이군수(李郡守)와 의논하기를 지금 민력이 퇴폐해있는데 강제로 부역을  
 +시키느니보다는 먼저 우리 두 사람이 직접 산에 올라 칡을 끊는 것이 오히려 민심을  
 +달래고 감동시키는 결과가 될 것이라하고 솔선수범(率先垂範)하였더니 원근에 사는  
 +백성들이 다투어 칡을 모은 고로 불일내(不日内)에 부교를 이루었다. 4(四)월에 원군이  
 +성(京城)에 들어와 다시 도성(都城)을 회복하고 왕의 거마(車駕)도 회복할새 공이  
 +성(扈聖) 즉 왕가(王駕)를 호위한 공로로 정략장군(定略將軍)의 관직을 하사받고  
 +에 선무공신충공(宣武功臣忠公)이라.\\ 
 + 
 +\_무술(戊戌) 10(十)월에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 장군(將軍)이 남해에서 전사하니 
 +선생이 듣고 크게 놀라며 슬퍼하였다. 그리고 공으로하여 대신 조문케하니 공도  
 +찍부터 이공(李公)과 더불어 충의지심(忠義之心)이 상합(相合)하여  
 +막역지간(莫逆之間)이었는지라 더욱 애석히 여기고 몹시 아파하였으며 이공(李公)의  
 +질(姪) 완(莞) 분(芬) 등과 치상지절(治喪之節)을 협의(協議)하여 정중히 장사를 치루었다.\\ 
 + 
 +\_공은 이 해에 직책을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와 퇴폐해진 구대(舊臺)를 헐고 수간의 
 +초당을 새로 짓고 그 당에 만휴(休)라 현액하였다. 후인들이 공에게  
 +세제향사(歲祭享祀)를 모책하고 익양서당(益陽書堂)을 건립하였다.\\ 
 +\_\_통정대부(通政大夫) 행() 교리지제교(校理知製敎)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춘추관(春秋官) 기주관(記注官) 풍산(豊山) 유광목(柳光睦) 근찬(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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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2-011.1749253928.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6/07 08:52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