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초황이묘갈명(聖樵黃頤墓喝銘)
성초 황이 묘갈명
공의 성은 황(黃)이요, 휘는 이(頤)요, 자는 유중(有中)이며,
호는 성초(聖樵)라, 평해인이니, 고려 충렬왕조에 휘
용(𤨭)이라는 분께서는 삼중대광이요
시호는 충경(忠敬)이라, 그후 3세를 지나 휘 천상(天祥)이니 문하찬성사요,
고조의 휘는 지석(之碩)이니 관이 자헌대부 한성판윤 형조판서요,
증조의 휘는 한우(旱雨)니 통훈대부 군자감정이요, 조의 휘는 기(岐)니
통정대부 충훈부 도정이요, 선고의 휘는 도(道)니 한성판윤이라,
선비 정부인은 전주 이(李)씨 형준(亨俊)의 녀로 품행이 방정하고
절도가 있었다.
성화 14년 무술(戊戌)(1478)에 오곡리 제(第)에서 공을 생하시다.
어려서(幼)부터 공의 자질이 특이하여 13세에 논 맹 시 서를 통달하고
장성함에 시무를 밝게 하고 고전을 널리 기억하며
처사에 관후하고 행신이 염근하여 사림들이 청백하다 칭찬들이 자자하였다.
고로 그의 사적이 군지(郡誌)에 까지 실려있으며,
부모에게는 효도하고 형제에게는 우애하며 집안을 사랑으로 다스렸고
족친에게는 돈목으로 접하며,
원근 향당간에는 매사에 남을 먼저하고 자기를 뒤로 하는 겸양 화열의
처사가 숨은 덕성 중에서 나타났다 하더라.
독행지사로 장사랑에 제수되고 경오(庚午)년에 고종하니,
향년이 93이라.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추증으로 군북 오곡리
미(未)좌원에 안장하였다.
배위는 정부인 월성 이(李)씨요 보명(寶明)의 여로
익재 제현1)선생의
후라. 일남을 두었으니 이름은 중수(仲壽)요 예민 주부라. 주부는 6남을 생하니, 장왈 백령(百齡)이니 통덕랑이요, 차왈 천령(千齡)이요,
3왈 만령(萬齡)이요, 4왈 억령(億齡)이요, 5왈 덕령(德齡)이니 통정이요,
6왈 복령(福齡)라. 이하는 자손이 번연하여 다 기록하지 못하노라.
오호라 공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 간에 우애하며 지성과 염근한
행실로 매사에 치밀하고 소상하여 사람을 대하는데 관후하니
사회에 큰일을 할 수 있는 인재였음에는 틀림이
없거늘, 평생이 불우하여 입현유방치 못하였음은 한사였다.
그러나 일생에 행한 일이 항상 충실하고 후덕하여 사람에게
미친 바 공효가 컸더라. 그후 자손의 번연함과 대대로 효우승전 하였으며
과환이 간혹 있었음을 볼 때 은덕의 보답을 받은
증험이 틀리지 않도다.
구갈이 오랜 풍우로 퇴폐이재 다시 개립코져 후손 일하(一河) 경운(景雲)씨가 나 인석(寅錫)에게 기문을 청함으로
그 실행 사적을 간추렸노라.
명(銘)왈
家傳孝友 효도와 우애의 도리를 후손에게 전하였고,
郡載淸白 청백한 행실은 군지에도 기록되었다.
濟之以才 치밀하고 소상하며 관후한 재질을 타고난 천품과,
實根於德 평생을 닦은 덕행이 연유하다.
雲仍昌熾 후손의 번성함이요 원의 불길같고,
乃文乃科 희세의 문장과 급제가 끊이지 않으니
此理之昭 이는 도리와 남에게 끼친 사랑의 보답이며,
報施不差 하늘의 돌보심은 차질이 없도다.
百世貞珉 이는 영원히 더욱 빛날 것이며,
賢孫無替 휼륭한 후손들이 계속 이어 나갈 것이다.
(원 번역문)
부모께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도리를 후손에게 전하였고,
맑고 깨끗한 행실은 군지에도 기록되었다.
치밀하고 소상하며 관후함이 빈틈없이 처사에 능난한 재질을 타고난 천품과 평생을 닦은 덕행이 연유하다.
후손의 번성함이요 원의 불길같고 희새의 문장과 연면한 과거가 끊이지 않으니,
이는 평생을 두고 사람의 도리와 남에게 끼친 사랑의 보답이며 그 행적에 하느님의 돌보심에 차작이 없음이로다.
백년 천년을 두고 이 비석에 기록된 실적이 더욱 빛날 것이며 어진 후손들이 계속 나서 이런 좋은 일을 계속 이어 나갈 것이다.
한양 조인석(趙寅錫) 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