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3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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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2-024 [2025/06/07 13:47] – 만듦 ssio2 | c32-024 [2025/06/08 17:25] (현재) – ssio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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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 1: | 줄 1: | ||
+ | ===농암황공 묘갈명=== | ||
+ | <WRAP 37em justify> | ||
+ | <typo ff:' | ||
+ | \_**농암황공 묘갈명**\\ | ||
+ | \_영가(永嘉)(: | ||
+ | 자좌(子坐)의 둔덕은 고 통정대부 첨지 중추부사 농암 황공의 의리(衣履)를 감춘 곳이다. | ||
+ | 지금 1백(一百)여년이 되어 나무가 우거진 즉, 후손들이 선조의 자취가 민멸될까 | ||
+ | 두려워하여 벌석(伐石)을 도모하고 길을 닦았다며 주손 철기(哲起)와 숙부 병식(昞植)이 | ||
+ | 나에게 비석에 새길 글을 부탁한다. 이에 전거를 살펴 기록하노니, | ||
+ | 종륙(鍾六)이오, | ||
- | 농암황공 묘갈명 | + | \_시조 휘 온인(溫仁) 이후로 대대로 벼슬하였고、15(十五)세에 이르러 휘 귀성(貴成)이 |
- | 영가(永嘉: | + | 있으니 호는 만휴당(晩休堂)이오 재용(才勇)과 지략(智略)이 있어 일찍이 서애(西厓) |
- | 坐)의 둔덕은 고 통정대부 첨지 중추부사 농암황공의 의리(衣履)를 감춘 곳이다. 지 | + | 유상공(柳相公)의 문하에서 노닐어 여러번 장후(將詡)를 입었다.\\ |
- | 금 一百여년이 되어 나무가 우거진 즉, 후손들이 선조의 자취가 민멸될까 두려워하 | + | |
- | 여 벌석(伐石)을 도모하고 길을 닦았다며 주손 철기(哲起)와 숙부 병식(昞植)이 나에 | + | |
- | 게 비석에 새길 글을 부탁한다. 이에 전거를 살펴 기록하노니' | + | |
- | 六)이오' | + | |
- | 시조 휘 온인(溫仁) 이후로 대대로 벼슬하였고、十五세에 이르러 휘 귀성(貴成)이 | + | |
- | 있으니 호는 만휴당(晚休堂)이오재용(才勇)과 지략(智略)이 있어 일찍이 서애류상 | + | |
- | 공(西厓柳相公)의 문하에서 노닐어 여러번 장후(將詡)를 입었다. | + | |
- |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만나 선생을 따라 좌막(佐幕)으로써 수행한 공으로 정략장 | + | |
- | 군(定略將軍)에 제수되었으니 이분이 중세의 현조(顯祖)이시다.六세를 지나 휘 유 | + | |
- | 철(有喆)은 통정대부 동지중추부사여고, | + | |
- | 남(重南)을 낳으니 통정대부 돈녕부 도정이며' | + | |
- | 비(她)는 안동권씨(安東權氏)요、비 경주김씨(慶州金氏) 만증(萬重)의 | + | \_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만나 선생을 따라 좌막(佐幕)으로써 수행한 공으로 |
+ | 정략장군(定略將軍)에 제수되었으니 이 분이 중세의 현조(顯祖)이시다. 6(六)세를 지나 휘 | ||
+ | 유철(有喆)은 통정대부 동지중추부사이고, | ||
+ | 중남(重南)을 낳으니 통정대부 돈녕부 도정이며, | ||
- | 고祖)을유(乙酉: | + | \_비(妣)는 안동권씨(安東權氏)요, |
- | 응유(應唯)함에 게으르지 않았다. | + | 을유(乙酉)(: 1825(一八二五))에 공을 낳았다. 태어나면서 성품이 착하여 부모님을 섬기고 |
- | 비로소 배움에 나아가니 총명함이 남보다 뛰어나 배로 글을 잘하였고, | + | 응유(應唯)함에 게으르지 않았다.\\ |
- | 騷經)을 배워 문득 외움에 거침없이 나아람이 있었다. 자라서는 몸소 농사일을 하 | + | |
- | 며 부모님을 지극히 기쁘게 하였다. 부모님 상을 당해서는 빈장(殯葬)을 예로써 치 | + | |
- | 르고 일찍이 말씀하기를 형편에 맞게 처리하여 넉넉하게 하지 않아도 예에는 어긋 | + | |
- | 남이 없을 것이다. 선현(先賢)의 집안 다스리는 요법(要法)을 표준으로 하여 자신을 | + | |
- | 검소함으로 지키고, 남에게 베풀기를 두텁게 하라 하고' | + | |
- | 은 재물로써 몸을 일으키고, | + | |
- | 금의 두 가지를 보이지 않는다 하셨다. | + | |
- | 일찍이 서사(書史)를 쌓아 원근에 배우러 오는 사람들의 자료로 삼았고, 배우고자 | + | |
- | 하는 자가 문에 이르면 재주에 따라 가르침을 베풀어 성취함이 많이 있었다. 만년 | + | |
- | 에 우로전(優老典)으로 통정(通政)이 되었고, 하늘이 선한 자에게 복을 주어 인수(仁 | + | |
- | 壽)를 누리게 한다는 것을 이에서 더욱 징험할 수 있었다.병오(丙午: | + | |
- | 二월 十九일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八十二라。 | + | |
- | 배(配) 숙부인(淑夫人) 창녕조씨(昌寧曹氏)는 남명(南冥)선생의 후손 학신(學新)의 | + | |
- | 따님이다.四남-녀를 낳았으니 남은 경훈(景勛)·경승(景昇)·경순(景淳)·경천(景 | + | |
- | 天)이고 | + | \_비로소 배움에 나아가니 총명함이 남보다 뛰어나 배로 글을 잘하였고, 이소경(離騷經)을 |
- | 있었고 호는 어초재(漁樵齋)이다. 경승(景昇)의 남은 재동(載東)·응동(應東)·섭동 | + | 배워 |
- | (燮東)이며 여는 김현무(金顯武)·김갑출(金甲出)이다. 경순(景淳)의 남은 희동(熙 | + | 지극히 기쁘게 하였다. 부모님 상을 당해서는 빈장(殯葬)을 예로써 치르고 일찍이 |
- | 東)·도동(道東)·한동(漢東)이요, | + | 말씀하기를 형편에 맞게 처리하여 넉넉하게 하지 않아도 예에는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
- | (且東)·수동(水東)·인동(寅東)이다. | + | 선현(先賢)의 집안 다스리는 요법(要法)을 표준으로 하여 자신을 |
- | 인동(寅東)의 남은 건구(建九)며 여는 김대연(金大淵)이다. 채동(載東)의 남은 대구 | + | 검소함으로 지키고, 남에게 베풀기를 두텁게 하라 하고, 이에 이르기를 어진 사람은 |
- | (大九), | + | 재물로써 몸을 일으키고, 남의 어려움을 보면 힘을 |
- | 漢)·김인기(金寅基)·장운학(張雲鶴)이다. 응동(應東)의 사자(嗣子)는 찬생(燦生)이 | + | 두 가지를 보이지 않는다 하셨다.\\ |
- | 고、병동(秉東)의 사자는 찬암(燦巖)이며, 여는 김덕수(金德守)·남상윤(南相尹)·김 | + | |
- | 주섭(金周燮)·이현구(李現求)·김광랑(金光郎)이다. 섭동(燮東)의 남은 진구(進 | + | |
- | 九)·영구(英九)며 여는 박영선(朴永善)·권돌이(權乭伊)·권중곤(權重坤)·안상열 | + | |
- | (安相烈)이며, 희동(熙東)의 남은 윤구(潤九)·찬경(燦敬)이다. | + | |
- | 도동(道東)의 남은 성구(成九)며 | + | |
- | 福燮)·이상민(李相珉)이다.한동(漢東)의 남은 시구(時九)며 여는 장응락(張應洛)· | + | |
- | 김중기(金仲基)다. 원동(遠東)의 남은 찬구(燦九)며、노동(魯東)의 남은 성구(聖九)・ | + | |
- | 창구(昌九)며, | + | |
- | 환(李圭煥)·정진욱(鄭真旭)이다. 수동(水東)의 남은 찬욱(燦旭)·찬일(燦溢)이며, | + | |
- | 손(玄孫) 이하는 많아서 기록하지 않는다.공의 제사를 받드는 | + | \_일찍이 서사(書史)를 쌓아 원근에 배우러 오는 사람들의 자료로 삼았고, 배우고자 |
- | 아들은 병순(昞舜)·병식(昞植)이며, 여는 김상원(金相元)이고 병순(昞舜)의 아들은 | + | 하는 자가 문에 이르면 재주에 따라 가르침을 베풀어 성취함이 많이 있었다. 만년에 |
- | 철기(哲起)며 철기의 아들은 현기(鉉機)이다. | + | 우로전(優老典)으로 통정(通政)이 되었고, 하늘이 선한 자에게 복을 주어 인수(仁壽)를 |
- | 아! 선인(善人)의 은택이 四세에 이르러 내·외손이 모두 六十여명에 이른 즉 | + | 누리게 |
- | 공의 쌓은 음덕(陰德)이 두터움과 밝고 높은 덕을 알겠도다. | + | 12(十二)월 19(十九)일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82(八十二)라.\\ |
- | 이에 명(銘)하여 이르노니 | + | |
- | 효(孝)는 백행(百行)의 근본이 되고' | + | |
- | 농(農)은 팔정(八政)의 근본이 된다네. | + | |
- | 몸소 행하는 것은 천작(天爵)을 회복하는 근본이고、 | + | |
- | 큰 옥이 찬연함은 영화로운 | + | |
- | 넉넉한 경사에 후손이 많음은 적선(積善)의 근본이고、 | + | |
- | 자손들이 정민(貞珉)함은 후손들이 지성으로 근본에 보답함이었네。 | + | |
- | 숙부인(淑夫人) 창녕조씨(昌寧曺氏)의 묘는 거현(車峴) 양지 간좌(艮坐)에 있다. | + | |
- | 광복후 경오(庚午:一九九〇)十一월 일 | + | |
- | 의성(義城) 김일대(金日大) 찬하노라. | + | |
+ | \_배(配) 숙부인(淑夫人) 창녕조씨(昌寧曹氏)는 남명(南冥)선생의 후손 학신(學新)의 | ||
+ | 따님이다. 4(四)남1(一)녀를 낳았으니 남은 | ||
+ | 경훈(景勛)・경승(景昇)・경순(景淳)・경천(景天)이고 여는 김수현(金秀鉉)이다. | ||
+ | 경훈(景勛)의 남은 인동(寅東)이며 문행(文行)이 있었고 호는 어초재(漁樵齋)이다. | ||
+ | 경승(景昇)의 남은 재동(載東)・응동(應東)・섭동(燮東)이며 여는 김현무(金顯武)・김갑출(金甲出)이다. | ||
+ | 경순(景淳)의 남은 희동(熙東)・도동(道東)・한동(漢東)이요, | ||
+ | 경천(景天)의 남은 원동(遠東)・노동(魯東)・차동(且東)・수동(水東)・인동(寅東)이다.\\ | ||
+ | |||
+ | \_인동(寅東)의 남은 건구(建九)며 여는 김대연(金大淵)이다. | ||
+ | 재동(載東)의 남은 대구(大九)・찬생(燦生)・찬암(燦巖)은 출계했고, | ||
+ | 여는 권재인(權在仁)・권일한(權一漢)・김인기(金寅基)・장운학(張雲鶴)이다. | ||
+ | 응동(應東)의 사자(嗣子)는 찬생(燦生)이고, | ||
+ | 병동(秉東)의 사자는 찬암(燦巖)이며, | ||
+ | 김덕수(金德守)・남상윤(南相尹)・김주섭(金周燮)・이현구(李現求)・김광랑(金光郞)이다. | ||
+ | 섭동(燮東)의 남은 진구(進九)・영구(英九)며 여는 | ||
+ | 박영선(朴永善)・권돌이(權乭伊)・권중곤(權重坤)・안상열(安相烈)이며, | ||
+ | 희동(熙東)의 남은 윤구(潤九)・찬경(燦敬)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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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_도동(道東)의 남은 성구(成九)며 여는 김영진(金永振)・김돈수(金頓守)・심복섭(沈福燮)・이상민(李相珉)이다. | ||
+ | 한동(漢東)의 남은 시구(時九)며 여는 장응락(張應洛)・김중기(金仲基)다. | ||
+ | 원동(遠東)의 남은 찬구(燦九)며, | ||
+ | 차동(且東)의 남은 일신(一信)・영신(英信)・태신(太信)이며 여는 이규환(李圭煥)・정진욱(鄭眞旭)이다. | ||
+ | 수동(水東)의 남은 찬욱(燦旭)・찬일(燦溢)이며, | ||
+ | 공의 제사를 받드는 자는 건구(建九)이고 | ||
+ | 아들은 병순(昞舜)・병식(昞植)이며, | ||
+ | 철기(哲起)며 철기의 아들은 현기(鉉機)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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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_아! 선인(善人)의 은택이 4(四)세에 이르러 내・외손이 모두 60(六十)여명에 이른 즉 | ||
+ | 공의 쌓은 음덕(陰德)이 두터움과 밝고 높은 덕을 알겠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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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_이에 명(銘)하여 이르노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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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효(孝)는 백행(百行)의 근본이 되고,\\ | ||
+ | 농(農)은 팔정(八政)의 근본이 된다네.\\ | ||
+ | 몸소 행하는 것은 천작(天爵)을 회복하는 근본이고, | ||
+ | 큰 옥이 찬연함은 영화로운 수(壽)의 근본일세.\\ | ||
+ | 넉넉한 경사에 후손이 많음은 적선(積善)의 근본이고, | ||
+ | 자손들이 정민(貞珉)함은 후손들이 지성으로 근본에 보답함이었네.\\ | ||
+ | \\ | ||
+ | \_숙부인(淑夫人) 창녕조씨(昌寧曺氏)의 묘는 거현(車峴) 양지 간좌(艮坐)에 있다.\\ | ||
+ | \_\_광복후 경오(庚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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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2-024.1749271628.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6/07 13:47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