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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2-024

농암황공 묘갈명

농암황공 묘갈명
 영가(永嘉)(: 안동(安東))부 서쪽 풍천(豊川)위 이금실[인금(仁今)] 삼밭골[마전곡(麻田谷)] 장등 자좌(子坐)의 둔덕은 고 통정대부 첨지 중추부사 농암 황공의 의리(衣履)를 감춘 곳이다. 지금 1백(一百)여년이 되어 나무가 우거진 즉, 후손들이 선조의 자취가 민멸될까 두려워하여 벌석(伐石)을 도모하고 길을 닦았다며 주손 철기(哲起)와 숙부 병식(昞植)이 나에게 비석에 새길 글을 부탁한다. 이에 전거를 살펴 기록하노니, 공의 휘는 종륙(鍾六)이오, 자는 예숙(藝叔)이며, 호는 농암(農巖)으로 성은 황씨며 본은 평해인이다.
 시조 휘 온인(溫仁) 이후로 대대로 벼슬하였고、15(十五)세에 이르러 휘 귀성(貴成)이 있으니 호는 만휴당(晩休堂)이오 재용(才勇)과 지략(智略)이 있어 일찍이 서애(西厓) 유상공(柳相公)의 문하에서 노닐어 여러번 장후(將詡)를 입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만나 선생을 따라 좌막(佐幕)으로써 수행한 공으로 정략장군(定略將軍)에 제수되었으니 이 분이 중세의 현조(顯祖)이시다. 6(六)세를 지나 휘 유철(有喆)은 통정대부 동지중추부사이고, 휘 만기(萬起)를 낳으니 통덕랑이며, 휘 중남(重南)을 낳으니 통정대부 돈녕부 도정이며, 계자 휘 정하(定河)는 곧 공의 고(考)이다.
 비(妣)는 안동권씨(安東權氏)요, 비 경주김씨(慶州金氏) 만중(萬重)의 여가 순조(純祖) 을유(乙酉)(: 1825(一八二五))에 공을 낳았다. 태어나면서 성품이 착하여 부모님을 섬기고 응유(應唯)함에 게으르지 않았다.
 비로소 배움에 나아가니 총명함이 남보다 뛰어나 배로 글을 잘하였고, 이소경(離騷經)을 배워 문득 외움에 거침없이 나아감이 있었다. 자라서는 몸소 농사일을 하며 부모님을 지극히 기쁘게 하였다. 부모님 상을 당해서는 빈장(殯葬)을 예로써 치르고 일찍이 말씀하기를 형편에 맞게 처리하여 넉넉하게 하지 않아도 예에는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선현(先賢)의 집안 다스리는 요법(要法)을 표준으로 하여 자신을 검소함으로 지키고, 남에게 베풀기를 두텁게 하라 하고, 이에 이르기를 어진 사람은 재물로써 몸을 일으키고, 남의 어려움을 보면 힘을 다하여 구휼함에 친함과 성김의 두 가지를 보이지 않는다 하셨다.
 일찍이 서사(書史)를 쌓아 원근에 배우러 오는 사람들의 자료로 삼았고, 배우고자 하는 자가 문에 이르면 재주에 따라 가르침을 베풀어 성취함이 많이 있었다. 만년에 우로전(優老典)으로 통정(通政)이 되었고, 하늘이 선한 자에게 복을 주어 인수(仁壽)를 누리게 한다는 것을 이에서 더욱 징험할 수 있었다. 병오(丙午)(: 1906(一九〇六)) 12(十二)월 19(十九)일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82(八十二)라.
 배(配) 숙부인(淑夫人) 창녕조씨(昌寧曹氏)는 남명(南冥)선생의 후손 학신(學新)의 따님이다. 4(四)남1(一)녀를 낳았으니 남은 경훈(景勛)・경승(景昇)・경순(景淳)・경천(景天)이고 여는 김수현(金秀鉉)이다. 경훈(景勛)의 남은 인동(寅東)이며 문행(文行)이 있었고 호는 어초재(漁樵齋)이다. 경승(景昇)의 남은 재동(載東)・응동(應東)・섭동(燮東)이며 여는 김현무(金顯武)・김갑출(金甲出)이다. 경순(景淳)의 남은 희동(熙東)・도동(道東)・한동(漢東)이요, 경천(景天)의 남은 원동(遠東)・노동(魯東)・차동(且東)・수동(水東)・인동(寅東)이다.
 인동(寅東)의 남은 건구(建九)며 여는 김대연(金大淵)이다. 재동(載東)의 남은 대구(大九)・찬생(燦生)・찬암(燦巖)은 출계했고, 여는 권재인(權在仁)・권일한(權一漢)・김인기(金寅基)・장운학(張雲鶴)이다. 응동(應東)의 사자(嗣子)는 찬생(燦生)이고, 병동(秉東)의 사자는 찬암(燦巖)이며, 여는 김덕수(金德守)・남상윤(南相尹)・김주섭(金周燮)・이현구(李現求)・김광랑(金光郞)이다. 섭동(燮東)의 남은 진구(進九)・영구(英九)며 여는 박영선(朴永善)・권돌이(權乭伊)・권중곤(權重坤)・안상열(安相烈)이며, 희동(熙東)의 남은 윤구(潤九)・찬경(燦敬)이다.
 도동(道東)의 남은 성구(成九)며 여는 김영진(金永振)・김돈수(金頓守)・심복섭(沈福燮)・이상민(李相珉)이다. 한동(漢東)의 남은 시구(時九)며 여는 장응락(張應洛)・김중기(金仲基)다. 원동(遠東)의 남은 찬구(燦九)며, 노동(魯東)의 남은 성구(聖九)・창구(昌九)며, 차동(且東)의 남은 일신(一信)・영신(英信)・태신(太信)이며 여는 이규환(李圭煥)・정진욱(鄭眞旭)이다. 수동(水東)의 남은 찬욱(燦旭)・찬일(燦溢)이며, 현손(玄孫) 이하는 많아서 기록하지 않는다. 공의 제사를 받드는 자는 건구(建九)이고 아들은 병순(昞舜)・병식(昞植)이며, 여는 김상원(金相元)이고 병순(昞舜)의 아들은 철기(哲起)며 철기의 아들은 현기(鉉機)이다.
 아! 선인(善人)의 은택이 4(四)세에 이르러 내・외손이 모두 60(六十)여명에 이른 즉 공의 쌓은 음덕(陰德)이 두터움과 밝고 높은 덕을 알겠도다.
 이에 명(銘)하여 이르노니

효(孝)는 백행(百行)의 근본이 되고,
농(農)은 팔정(八政)의 근본이 된다네.
몸소 행하는 것은 천작(天爵)을 회복하는 근본이고,
큰 옥이 찬연함은 영화로운 수(壽)의 근본일세.
넉넉한 경사에 후손이 많음은 적선(積善)의 근본이고,
자손들이 정민(貞珉)함은 후손들이 지성으로 근본에 보답함이었네.

 숙부인(淑夫人) 창녕조씨(昌寧曺氏)의 묘는 거현(車峴) 양지 간좌(艮坐)에 있다.
  광복후 경오(庚午)(: 1990(一九九〇)) 11(十一)월 일 의성(義城) 김일대(金日大) 찬하노라.

c32-024.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6/08 17:25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