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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2-027 [2025/06/07 13:55] ssio2c32-027 [2025/06/08 20:07] (현재) ssi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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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공(謙齋公) 묘갈명(墓碣銘) +===겸재공(謙齋公) 묘갈명(墓碣銘)=== 
-공의 휘는 찬구(燦九)며초휘는 점술(點述)이고 관명(官名)은 찬희(燦熙)다. 자는 +<WRAP 37em justify> 
-치삼(致三)이온 호는 겸재(謙齋)며, 관(官)은 종사랑(從仕문층의(分忠義)이다. +<typo ff:'한양해서'; fs:1.2em; lh:1.5em> 
-(姓)은 황씨(黃氏)닌 중국 강하(江夏)에서 출계(出系)했다. 시조(始祖) 학사공(學士公) +\_**겸재공(謙齋公) 묘갈명(墓碣銘)**\\ 
-(洛)은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와서 평해(平海)에 자리잡으니 자손들이 인하여 +\_공의 휘는 찬구(燦九)며초휘는 점술(點述)이고 관명(官名)은 찬희(燦熙)다. 자는 
-관(貫)으로 삼았다. +치삼(致三)이오, 호는 겸재(謙齋)며, 관(官)은 종사랑(從仕분충의(分忠義)이다. 
-고려조(高麗朝)에 이르러 휘 온인(溫仁)은 관(官)이 금오장군(金吾將軍)、 태자검교 +(姓)은 황씨(黃氏)니 중국 강하(江夏)에서 출계(出系)했다. 시조(始祖) 학사공(學士公) 
-(太子檢校)에 이르렀고, 증손(曾孫) 휘 용(墉)은 숭록대부(崇祿大夫)、삼중대광보국 +휘 (洛)은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와서 평해(平海)에 자리잡으니 자손들이 인하여 
-(三重大匡輔國)이며, 시호는 충경(忠敬)이다. 증손 휘 천계(天繼)의 호는 잠재(潛齋) +관(貫)으로 삼았다.\\
-며 문과에 급제하여 삼도관찰사(三都觀察使)를 지내고 태조(太祖)를 도와 창업 공신 +
-이 되었다. サイの花 +
-포천(抱川)에서 관직을 버리고 남(南)으로 안동(安東)의 풍산(豊山)에 이사하여 살+
  
-았다.九세손 휘 한성(漢成)의 호는 취적헌(取適軒)이니 타난 성품이 돈후(敦厚)하 +\_려조(高麗朝)에 르러 휘 (溫)은 관()이 금장군(金吾將軍)  
-였고, 인품이 강직(剛直) (溫)하였다.총명하여 학문을 좋아하였는데 시문(詩 +태자검교(太子檢校)에 이르렀고, 증손(孫) 휘 (𤨭)은 숭록대부(崇祿大夫)  
-)을 잘하였고 경전(經傳)에도 심하였다.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며, 호는 충경(忠敬)이다. 증손 휘 천계(天繼)의 호는  
-백씨공(伯氏公만휴당(晚休堂) 휘 귀성(貴成)과 난(亂)이 평정되고 귀향하여 서로 +재(齋)며 문과에 급제하여 삼도관찰사(三都觀察使)를 지내고 태조(太祖)를 도와  
-더불어 산수간(山水間)에 노니는 것으로 일생의 업(業)으로 삼아 항상 정당하고 바 +창업 공신이 었다.\\
-름이 있었기에 인하여 호로 하였다. +
-六세손 휘 흥세(興世)에 이르러 비로소 나무재[木峴]에 살았다.현손(孫) 휘 구 +
-(九錫)의 호는 학남(鶴南)이며,은 증 형조참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추증 +
-되었다. 휘 태진(泰鎭)을 낳으니 호는 낙서(洛西)며, 휘 오원(五源)을 낳으니 호는 운 +
-(雲坡)며 수직(壽職)으로 통정(通政)이 되었으며 함께 문학과 행의가 있었으니 조 +
-(祖) 이상 三세이다. +
-()의 휘는 종철(宗哲)이며 호는 서산재(西山齋)요'관은 참봉(參奉)이며 가정의 +
-가르침을 이어받아 효우(孝友)가 돈독(敦篤)고 지극하였다. 비(妣) 유인(孺人) 안동 +
-김씨(安東金氏)는 흥록(興祿)의 로 부녀자의 행의가 심히 갖추어졌다. +
-철종(哲宗신유(辛酉:一八六一) 九월 十三일에 나무재[木峴] 집에서 공을 낳으 +
-니 성품이 강직하고 행동거지(行動舉止)에 여유와 편안함이 었다. 어려서부터 이 +
-미 효우(孝友)의 행실을 알아 백형(伯兄)과 화락(和樂)·담락(湛樂)하여 일생동안 즐+
  
-거워하며 기뻐했다.독서를 즐겨 문사(文詞)가 넓어 당시 선비들이 그와 더불어 사 +\_포천(抱川)에서 관직을 버리고 남()으로 안동(安東)의 풍산(山)에 여 살았다. 
-귀어 추증하지 않음이 없었다. +9(九)손 휘 한성(漢成)의 는 취적헌(取適軒)이니 타고난 성품이 돈후(敦厚)하였고,  
-신사(辛巳:一九四一七월 十七일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八十一이라。만운동(晚雲 +이 강직(剛直온화(溫和)하다. 총명하여 학문을 좋하였데 시문(文)을  
-대추월산(大秋月山) 중곡(中谷) 정좌(丁坐)의 둔덕에 지냈다. +였고 경전(經傳)에도 심오하였다.\\
-배(配) 단인(端人) 경주최씨(慶州崔氏)는 용준(龍俊)의 로 경신(庚申: 一八六〇) +
-년 월 十一일생이며, 임술(壬戌:一九二二) 정월 二十一일에 졸하니 묘는 같은 둔 +
-덕 사좌(已坐)이다.배(配) 단인(端人) 영월정씨(寧越鄭氏)는 무진(戊辰:一八六八)년 +
-생으로 기축(己丑:一九四九) 十월 七일에 졸하니 묘는 같은 둔덕 좌(巽坐)이다. +
-二남 三녀를 생하니 남에 병극(昞極)·병성(昞星)은 계부(季父) 영구(英九)의 후로 +
-출제했고,는 파평(坡平) 윤수필(尹守弼)、단양(丹陽) 우찬원(禹燦源)、진주(晋州) +
-하대섬(河大燮)이다. 병극(昞極)은 四남 그녀를 생니 남은 봉기(鳳起)·해기(海 +
-起)·기(麟起)·영기(領起)며, 여는 예천(醴泉) 임상수(林相守)、경주(慶州) 최상준 +
-(崔相準)다.윤()의 남은 종석(鍾石)이며, 우(禹)의 남은 두석(斗錫)이며, (河) +
-의 남은 재호(載鎬)이며 나머치는 기록하지 않는다. +
-! 공께서는 강계(薑桂)한 성품과 효우의 행실이 있었고, 해박(該博)한 문(文) +
-로 시험을 보지 않아도 행는 지위가 있었으니 품계는 낭관(郎官)에 그쳤고 산림에 +
-은거하였다.+
  
-평온하게 자연의 즐거움을 누려 연세와 덕이 높았네.정력(精力)은 쇠하지 않아 +\_백씨공(伯氏公) 만휴당(晩休堂) 휘 귀성(貴成)과 난(亂)이 평정되고 귀향하여 서로 
-정원과 자연의 사이에서 휘파람 불고 읊조리며 사물에 초월하였네 +더불어 산수간(山水間)에 노니는 것으로 일생의 업(業)으로 삼아 항상 정당하고  
-그 자연을 알고 천명을 앎이 아니었다면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었겠는가?  +바름이 있었기에 인하여 호로 하였다.\\ 
-은 바의 시문(詩文)이 탕일(蕩逸)되고 불에 타 없어졌으니 더욱 한스럽다. + 
-어느날 공의 출계손(出系孫) 응기(應起)군이 맏집 증손 태영(泰泳)과 함께 가장(家 +\_6(六)세손 휘 흥세(興世)에 이르러 비로소 나무재[목현(木峴)]에 살았다. 현손(玄孫) 휘  
-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이며 비석에 새길 글을 지기(知己)의 청으로 부탁하니' +구석(九錫)의 호는 학남(鶴南)이며, 관은 증 형조참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글을 못한다고 굳이 사양할 수 없어 위와 같이 서술하고 이어 명(銘)하기를 +추증되었다. 휘 태진(泰鎭)을 낳으니 호는 낙서(洛西)며, 휘 오원(五源)을 낳으니 호는  
-기성(箕城)의 세족으로 증원(中源)에서 비롯되었네 +운파(雲坡)며 수직(壽職)으로 통정(通政)이 되었으며 함께 문학과 행의가 있었으니  
-대대로 높은 벼슬 끊어지지 않았고, 인재 많이 나는 근원이 되었네 +조(祖) 이상 3(三)세이다.\\ 
-오직 충성과 공경으로 고려조에 명현(名賢)이었고 잠재(潛齋)공이 이어 일으켜 개 + 
-국원훈(開國元勳)이 되었네. +\_고(考)의 휘는 종철(宗哲)이며 호는 서산재(西山齋)요, 관은 참봉(參奉)이며 가정의 
-관직을 버리고 남하하여 풍산(豊山)에 자리잡으시니 선생의 참뜻은 문단(文壇)에 +가르침을 이어받아 효우(孝友)가 돈독(敦篤)하고 지극하였다. 비(妣) 유인(孺人)  
-서 노님이었네。 +안동김씨(安東金氏)는 흥록(興祿)의 여로 부녀자의 행의가 심히 갖추어졌다.\\ 
-공께서 이 가정에서 태어나 충효(忠孝)와 학문(學問)을 계승하였고, 서재(署齋)공 + 
-께서는 겸손(謙遜)함으로 종신토록 허물이 없었네. +\_철종(哲宗) 신유(辛酉)(: 1861(一八六一)) 9(九)월 13(十三)일에 나무재[木峴] 집에서  
-대인의 넉넉함을 실어 자연을 즐김이여'검은 상자의 명언 일실(逸失)되어 전하지 +공을 낳으니 성품이 강직하고 행동거지(行動擧止)에 여유와 편안함이 있었다.  
-않음이 통한(痛恨)이네+어려서부터 이미 효우(孝友)의 행실을 알아 백형(伯兄)과 화락(和樂)·담락(湛樂)하여  
 +일생동안 즐거워하며 기뻐했다. 독서를 즐겨 문사(文詞)가 넓어 당시 선비들이 그와 더불어  
 +사귀어 추증하지 않음이 없었다.\\ 
 + 
 +\_신사(辛巳)(: 1941(一九四一)) 7(七)월 17(十七)일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81(八十一)이라.  
 +만운동(晩雲洞) 대추월산(大秋月山) 중곡(中谷) 정좌(丁坐)의 둔덕에 장사지냈다.\\ 
 + 
 +\_배(配) 단인(端人) 경주최씨(慶州崔氏)는 용준(龍俊)의 여로 경신(庚申)(: 1860(一八六〇))년  
 +2(二)월 11(十一)일생이며, 임술(壬戌)(: 1922(一九二二)) 정월 21(二十一일)에 졸하니  
 +묘는 같은 둔덕 사좌(巳坐)이다. 배(配) 단인(端人) 영월정씨(寧越鄭氏)는  
 +무진(戊辰)(: 1868(一八六八))년 생으로 기축(己丑)(: 1949(一九四九)) 10(十)월 7(七)일에  
 +졸하니 묘는 같은 둔덕 손좌(巽坐)이다.\\ 
 + 
 +\_2(二)남 3(三)녀를 생하니 남에 병극(昞極)·병성(昞星)은 계부(季父) 영구(英九)의 후로 
 +출계했고, 여는 파평(坡平) 윤수필(尹守弼), 단양(丹陽) 우찬원(禹燦源), 진주(晋州) 
 +하대섬(河大燮)이다. 병극(昞極)은 4(四)남 2(二)녀를 생하니  
 +남은 봉기(鳳起)·해기(海起)·인기(麟起)·영기(領起)며,  
 +여는 예천(醴泉) 임상수(林相守), 경주(慶州) 최상준(崔相準)이다. 
 +사위 윤(尹)의 남은 종석(鍾石)이며, 우(禹)의 남은 두석(斗錫)이며, 하(河)의 남은 재호(載鎬)이며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 
 +\_아! 공께서는 강계(薑桂)한 성품과 효우의 행실이 있었고, 해박(該博)한 문(文)으로  
 +시험을 보지 않아도 행하는 지위가 있었으니 품계는 낭관(郎官)에 그쳤고 산림에 
 +은거하였도다.\\ 
 + 
 +\_평온하게 자연의 즐거움을 누려 연세와 덕이 높았네. 정력(精力)은 쇠하지 않아 
 +정원과 자연의 사이에서 휘파람 불고 읊조리며 사물에 초월하였네.\\ 
 + 
 +\_그 자연을 알고 천명을 앎이 아니었다면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었겠는가?  
 +은 바의 시문(詩文)이 탕일(蕩逸)되고 불에 타 없어졌으니 더욱 한스럽다.\\ 
 + 
 +\_어느날 공의 출계손(出系孫) 응기(應起)군이 맏집 증손 태영(泰泳)과 함께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이며 비석에 새길 글을 지기(知己)의 청으로 부탁하니, 
 +글을 못한다고 굳이 사양할 수 없어 위와 같이 서술하고 이어 명(銘)하기를.\\ 
 +\\ 
 +기성(箕城)의 세족으로 증원(中源)에서 비롯되었네.\\ 
 +대대로 높은 벼슬 끊어지지 않았고, 인재 많이 나는 근원이 되었네.\\ 
 +오직 충성과 공경으로 고려조에 명현(名賢)이었고 잠재(潛齋)공이 이어 일으켜 개국원훈(開國元勳)이 되었네.\\ 
 +관직을 버리고 남하하여 풍산(豊山)에 자리잡으시니 선생의 참뜻은 문단(文壇)에서 노님이었네。\\ 
 +공께서 이 가정에서 태어나 충효(忠孝)와 학문(學問)을 계승하였고, 서재(署齋)공께서는 겸손(謙遜)함으로 종신토록 허물이 없었네.\\ 
 +대인의 넉넉함을 실어 자연을 즐김이여검은 상자의 명언 일실(逸失)되어 전하지 
 +않음이 통한(痛恨)이네.\\
  
 추월산(秋月山) 중곡(中谷)의 둔덕은 공의 무덤이니 어진 후손들이 정성을 다하여 추월산(秋月山) 중곡(中谷)의 둔덕은 공의 무덤이니 어진 후손들이 정성을 다하여
-좋은 돌을 세우고자하네 +좋은 돌을 세우고자 하네\\ 
-음덕(陰德)을 쌓음이 오래되어 넉넉한 경사(慶事) 대대로 이어지리라. +음덕(陰德)을 쌓음이 오래되어 넉넉한 경사(慶事) 대대로 이어지리라.\\ 
-나의 명(銘)은 아첨이 아니라 많은 선비들이 평하는 말이라네. +나의 명(銘)은 아첨이 아니라 많은 선비들이 평하는 말이라네.\\ 
-정묘(丁卯:一九八七) 八월 경주 이재길(李宰吉) 삼가 찬함+\\ 
 +\_\_정묘(丁卯)(1987(一九八七)) 8()월 경주 이재길(李宰吉) 삼가 찬함
 +</typo> 
 +</WR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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