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3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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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전공(花田公) 묘갈명(墓碣銘) | + | ===화전공(花田公) 묘갈명(墓碣銘)=== |
+ | <WRAP 37em justify> | ||
+ | <typo ff:' | ||
+ | \_**화전공(花田公) 묘갈명(墓碣銘)**\\ | ||
+ | \_공의 휘는 육구(郁九)요, | ||
+ | 종사랑(從仕郞)이며, | ||
+ | 강하인(江夏人)으로 배를 타고 동국에 오시어 평해(平海)에 자리 잡으시니 자손들이 이에 | ||
+ | 관(貫)으로 삼았다.\\ | ||
- | 화전공(花田公) 묘갈명(墓碣銘) | + | \_고려조에 휘 온인(溫仁)은 관이 금오장군(金吾將軍) 태자검교(太子檢校)에 이르렀고, |
- | 공의 휘는 육구(郁九)요、자는 순삼(順三)이며, | + | 4(四)세 휘 용(𤨭)은 관이 숭록대부(崇祿大夫)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에 |
- | (從仕郞)이며, | + | 이르렀으며, |
- | (江夏人)으로 배를 타고 동국에 오시어 평해(平海)에 자리 잡으시니 자손들이 이에 | + | 휘 우(祐)를 생하니 |
- | 관(貫)으로 삼았다. | + | 경기 전라 경상 삼도관찰사(三道觀察使)를 지내고, 태조를 도와 창업공신이 되었으나, |
- | 고려조에 휘 온인(溫仁)은 관이 금오장군(金吾將軍) 태자검교(太子檢校)에 이르렀 | + | 포천(抱川)에서 관직을 버리고 남으로 예안과 안동 풍산으로 옮겨 와 사셨으니 |
- | 고、四세휘용(墉)은 관이 숭록대부(崇祿大夫) 삼증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에 이르 | + | 그 후로는 관직이 끊어지지 않았다.\\ |
- | 렀으며, 시호는 충경(忠敬)이다. 휘 태백(太白)을 생(生)하니 증 우의정이요, | + | |
- | 휘우(祐)를 생하니 | + | |
- | 경기 전라 경상 삼도관찰사(三道觀察使)를 지내고, 태조를 도와 창업공신이 되었으 | + | |
- | 나' 포천(抱川)에서 관직을 버리고 남으로 예안과 안동 풍산으로 옮겨 와 사셨으니 | + | \_15(十五)세 휘 한성(漢成)의 호는 취적헌(取適軒)이니, 타고난 자질이 돈후(敦厚)하였으며, |
- | 그 후로는 관직이 끊어지지 않았다. | + | 자품(姿品)이 강직하고 온화하였다. 총명하여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시문(詩文)을 잘하였고 |
- | 十五세 휘 한성(漢成)의 호는 취적헌(取適軒)이니、타고난 자질이 돈후(敦厚)하였 | + | 경학(經學)에도 조예가 깊었으나, |
- | 으며, 자품(姿品)이 강직하고 온화하였다. 총명하여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시문(詩 | + | 백씨공 만휴당(晩休堂) 휘 귀성(貴成)과 함께 난이 평정됨에 고향으로 돌아와 |
- | 文)을 잘하였고 경학(經學)에도 조예가 깊었으나, | + | 서로 더불어 산수간에 노닐며 기뻐하고 심히 즐거워하였다.\\ |
- | 으로 삼으셨다. 백씨공 만휴당(晚休堂) 휘 귀성(貴成)과 함께 난이 평정됨에 고향으 | + | |
- | 로 돌아와 서로 더불어 산수간에 노닐며 기뻐하고 심히 즐거워하였다. | + | \_여러 대를 전하여 휘 구석(九錫)의 호는 학남(鶴南)이며, |
- | 여러 대를 전하여 휘 구석(九錫)의 호는 학남(鶴南)이며, | + | |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이르렀다. 재주와 학문이 일찍이 성취되어 덕과 도량(度量)이 |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이르렀다. 재주와 학문이 일찍이 성취되어 덕과 도량(度量)이 | ||
매우 넓었으니, | 매우 넓었으니, | ||
- | 낙서(樂西)며 가정의 훈계를 이어 가난한 자를 구휼하고 친척과 화목하게 지내니 | + | 낙서(樂西)며 가정의 훈계를 이어 가난한 자를 구휼하고 친척과 화목하게 지내니 |
- | 족이 모두 추중하였다.조의 휘는 오원(五源)이요, | + | 친족이 모두 추중하였다. 조의 휘는 오원(五源)이요, |
- | (通政)이 되셨다.고(考)의 휘는 종철(宗哲)이니 호는 서산재(西山齋)며 참봉이다.비 | + | 통정(通政)이 되셨다. 고(考)의 휘는 종철(宗哲)이니 호는 서산재(西山齋)며 참봉이다. |
- | 는 단인(端人) 안동김씨(安東金氏) 흥록(興祿)의 따님으로 부녀자의 덕행이 있었다. | + | 비는 단인(端人) 안동김씨(安東金氏) 흥록(興祿)의 따님으로 부녀자의 덕행이 있었다.\\ |
- | *공께서 고종 병인(丙寅: | + | |
- | 시니 성품이 청명(淸明)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백형(伯兄) 중형(仲兄)과 우애가 | + | \_공께서 고종 병인(丙寅)(: 1866(一八六六))년 8(八)월 25(二十五)일 목현(木峴)의 집에서 |
- | 독하였고, | + | 태어나시니 성품이 청명(淸明)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백형(伯兄) 중형(仲兄)과 우애가 |
+ | 돈독하였고, | ||
+ | |||
+ | 능히 가범(家範)을 이으니 이웃이 추중하였다. 갑신(甲申)(: | ||
+ | 집에서 돌아가시니 수(壽) 79(七十九)며, | ||
+ | 장사지냈다.\\ | ||
+ | |||
+ | \_배(配) 분성김씨는 타고난 성품이 재주가 있었고 순(順)하였으며 부인의 도가 있었다. | ||
+ | 신유(辛酉)(: | ||
+ | 기사(己巳)(: | ||
+ | 자좌(子坐)에 장사지냈다.\\ | ||
+ | |||
+ | \_1(一)남 1(一)녀를 두었으니 남은 병몽(昞夢)이요, | ||
+ | 병몽의 남은 후기(厚起)·학기(鶴起)·성기(成起)며, | ||
+ | 임정국(林廷國)·예천 임영조(林永兆)이다. 후기의 남은 영수(榮洙)며, | ||
+ | 여는 안동 권기국(權奇國)·강릉 김진한(金鎮漢)이다. | ||
+ | 학기의 남은 주수(柱洙)·이수(利洙)이다. 성기의 남은 석법(錫法)·호법(鎬法)·학법(學法)이며, | ||
+ |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 ||
- | 능히 가범(家範)을 이으니 이웃이 추증하였다. 갑신(甲申: | + | \_아! 이제 공이 돌아가신 갑신(甲申)년과는 거의 |
- | 집에서 돌아가시니 수(壽) 七十九며, | + | |
- | 에 장사지냈다. | + | |
- | 배(配) 분성김씨는 타고난 성품이 재주가 있었고 순(順)하였으며 부인의 도가 있 | + | |
- | 었다. 신유(辛酉: | + | |
- | 二九)년 六월 十六일에 돌아가시니 목현 휴곡(後谷) 자좌(子坐)에 장사지냈다. | + | |
- | -남녀를 두었으니 남은 병몽(昞夢)이요, | + | |
- | 병몽의 남은 후기(厚起)·학기(鶴起)·성기(成起)며, | + | |
- | 國)·예천 임영조(林永兆)이다.후기의 남은 영수(榮洙)며, | + | |
- | 國)·강릉 김진한(金鎮漢)이다.학기의 남은 주수(柱洙)·이수(利洙)이다. 성기의 남 | + | |
- | 은 석법(錫法)·호법(鎬法)·학법(學法)이며, | + | |
- | 아! 이제 공이 돌아가신 갑신(甲申)년과는 거의 六十여 년이 되어 가는 어느 날 | + | |
공의 증손 영수(榮洙)씨와 그 재종숙 응기(應起) 어르신이 나를 찾아와 묘전(墓前)에 | 공의 증손 영수(榮洙)씨와 그 재종숙 응기(應起) 어르신이 나를 찾아와 묘전(墓前)에 | ||
- | 세길 글을 책임 치운다. 돌아보건대 보잘 것 없는 재주와 얕은 학식(學識)으로 표덕 | + | 세길 글을 책임 치운다. 돌아보건대 보잘 것 없는 재주와 얕은 학식(學識)으로 |
- | (表德)의 문(文)을 어찌 감당하겠는가 하며 굳이 사양했으나 청이 더욱 굳고 후손 된 | + | 표덕(表德)의 문(文)을 어찌 감당하겠는가 하며 굳이 사양했으나 청이 더욱 굳고 후손 된 |
정성 또한 높일 만하여 마침내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이에 그 가장(家狀)을 살펴 | 정성 또한 높일 만하여 마침내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이에 그 가장(家狀)을 살펴 | ||
- | 사실을 모아 위와 같이 석출하고 이어 명(銘)하노니 | + | 사실을 모아 위와 같이 석출하고 이어 명(銘)하노니\\ |
+ | \\ | ||
+ | 평해(平海)의 금 같은 가지요, | ||
+ | 학사(學士)공의 옥 같은 후손이로다.\\ | ||
+ | 잠재(潛齋)공 선조 계시어, | ||
+ | 대대로 유가(儒家)의 업(業)을 지켰도다.\\ | ||
+ | 공께서 이 가정에서 태어나시어, | ||
+ | 효우(孝友)하고 돈독(敦篤)하고 어질었네.\\ | ||
+ | 어질고 선한 행실(行實) 있었기에, | ||
+ | 마을과 이웃들이 칭송하도다.\\ | ||
+ | 목현(木峴)의 사척(四尺) 봉우리, \\ | ||
+ | 공께서 의구(衣屨)를 감추신 곳이라네.\\ | ||
+ | 옥돌에 글을 새겨 천년토록 밝게 비추노라.\\ | ||
+ | \\ | ||
+ | \_\_기묘(己卯)(: | ||
+ | \_\_순천(順天) 후인(后人) 장재호(張在鎬) 삼가 지음. | ||
- | (新羅) 평해(平海)의 금 같은 가지요' | + | </ |
- | 학사(學士)공의 옥 같은 후손이로다. | + | </ |
- | 잠재(潛齋)공 선조 계시어' | + | |
- | 대대로 유가(儒家)의 업(業)을 지켰도다. | + | |
- | 공께서 이 가정에서 태어나시어' | + | |
- | 효우(孝友)하고 돈독(敦篤)하고 어질었네. | + | |
- | 어질고 선한 행실(行實) 있었기에' | + | |
- | 목현(木峴)의 사척(四尺) 봉우리' | + | |
- | 옥돌에 글을 새겨 천년 토록 밝게 비추노라. | + | |
- | 기묘(己卯: | + | |
- | 야은참봉(野隱參奉) 행적비(行蹟碑) | + | |
- | 순천후인(順天后人) 장재호(張在鎬) 삼가 지음。 | + | |
- | 지금부터 三千여년전 중국 고대 삼황오제(三皇五帝)의 황제(黃帝) 후손 휘 육종(陸 | + | |
- | 終) 후세 삼형제 중 둘째 휘락(洛) 할아버지(東國 黃氏 始祖)께옵서 서기 二十八년 | + | |
- | (新羅儒理王 五년 戊子년)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월송북록(越松北麓)에 표착(漂着) | + | |
c32-028.1749272284.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6/07 13:58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