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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산황공(鶴山黃公) 묘갈명(墓碣銘) +===학산황공(鶴山黃公) 묘갈명(墓碣銘)=== 
-공의 휘는 병년(昞年)이요'자는 희서(熙瑞)며, 학산(鶴山)은 자호(自號)이다. 우리 +<WRAP 37em justify> 
-황씨가 평해(平海)를 관(貫)으로 한 후부터 지내온 연대가 오래이다. 신라 유리왕(儒 +<typo ff:'한양해서'; fs:1.2em; lh:1.5em> 
-理王) 九년 임진(壬辰: 서기 三十二)년 중국 후한 때에 유신(儒臣) 휘(洛)께서 사 +\_**학산황공(鶴山黃公) 묘갈명(墓碣銘)**\\ 
-신으로 봉해져 이웃 나라에 가다가 풍랑으로 인하여 신라의 기성(箕城)에 이르러 살 +\_공의 휘는 병년(昞年)이요자는 희서(熙瑞)며, 학산(鶴山)은 자호(自號)이다. 우리 
-게 되었다. +황씨가 평해(平海)를 관(貫)으로 한 후부터 지내온 연대가 오래이다. 신라  
-신라가 망하고 여조(麗朝)에 들어와 금오위장군(金五衛將軍) 태자검교공(太子檢校 +유리왕(儒理王) 9()년 임진(壬辰)(: 서기 32(三十二))년 중국 후한 때에 유신(儒臣)  
-公) 휘 온인(溫仁)이 관(貫)을 연 ㅡ세조이시며、四전하여 휘진(璡)·서(瑞)·용(𤨭) +휘 (洛)께서 사신으로 봉해져 이웃 나라에 가다가 풍랑으로 인하여 신라의 기성(箕城)에  
-은 우리 성씨 三파의 파조(派祖)이시다.백씨(伯氏)가 검교공(檢校公)이요, 중씨(仲 +이르러 살게 되었다.\\
-氏)가 평리공(評理公)이요'계씨(季氏)가 대광공(大匡公)으로 공께서 분파(分派)의 파 +
-조(派祖)이시다. 대광공(大匡公)의 증손은 천계(天繼)니 호는 잠재(潛齋)며 공양왕(恭 +
-讓王)二년(一三九○)에 문과에 오르시어 삼도관찰사(三道觀察使)를 지내셨다.七전 +
-하여 휘 맹춘(孟春)은 생원으로 승의랑(承議郎)이시다.... +
-생원공의 손자에 휘 귀성(貴成)과 휘 한성(漢成)이 있으니, 백씨(伯氏)의 호는 만 +
-휴당(晚休堂)이요계씨(季氏)의 호는 취적헌(取適軒)이며, 인금(仁今)과 목현(木峴) +
-두 문중의 분체조(分系祖)이시다. 조(分系祖)이시다. 고조 휘태친(泰鎭)의 호는 락서(洛西)요 증조 휘+
  
-오원(五源)의 호는 운파(雲坡)며, 조휘 종철(宗哲)의 호는 서산재(西山齋)요, 고(考) +\_신라가 망하고 여조(麗朝)에 들어와 금오위장군(金五衛將軍) 태자검교(太子檢校)  
-의 휘는 성구(成九)니 수(壽)로 종사랑(從仕郞)을 제수 받으셨다. +휘 온인(溫仁)이 관(貫)을 연 1(ㅡ)세조이시며, 4(四)전하여 휘 진(璡)·서(瑞)·용(𤨭)은  
-비()는 공인(恭人) 안동권씨(安東權氏) 명진(明鎮)의 따님으로 남 녀를 두었 +우리 성씨 3(三)파의 파조(派祖)이시다. 백씨(伯氏)가 검교공(檢校公)이요,  
-으니 셋째가 곧 공이시다. 고종(高宗) 갑오(甲午:一八九四) 정월 삼일에 목현(木峴) +중씨(仲氏)가 평리공(評理公)이요, 계씨(季氏)가 대광공(大匡公)으로 공께서 분파(分派)의  
-의 집에서 나시니 어려서부터 기량(器量)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생각이 깊고 신중(慎 +파조(派祖)이시다. 대광공(大匡公)의 증손은 천계(天繼)니 호는 잠재(潛齋)며  
-重)하였다.소시(少時)에 속됨을 가까이 하거나 비루(鄙陋)함의 실마리가 없었으며, +공양왕(恭讓王) 2(二)년(1390(一三九○))에 문과에 오르시어 삼도관찰사(三道觀察使)를  
-칠,팔세에 배움에 나아가 족대부(族大父) 도사(都事)공께 수업함에 재사(才思)가  +지내셨다. 7(七)전하여 휘 맹춘(孟春)은 생원으로 승의랑(承議郎)이시다.\\ 
-범하여 수신제가(修身齊家)의 학문에서 이미 경학(經學)에 이름에 옛사람의 위기지 + 
-학(爲己之學)에 마음을 두었고, 학문을 연마하고 덕행을 닦음에 후세에 요점을 남겨 +\_생원공의 손자에 휘 귀성(貴成)과 휘 한성(漢成)이 있으니, 백씨(伯氏)의 호는  
-주었으니, 오직 공의 행의(行義)에서 그 몸가짐을 조심함과 선(善)에 나아가는 대강 +만휴당(晩休堂)이요, 계씨(季氏)의 호는 취적헌(取適軒)이며, 인금(仁今)과 목현(木峴) 
-을 상상할 수 있다. +두 문중의 분계조(分系祖)이시다. 고조 휘 태진(泰鎭)의 호는 낙서(洛西)요 증조 휘 
-또 형제 인이 공의 삼방(三房)에 거하며 백씨·중씨와 계씨에 이르기까지 이웃 + 
-의 여러 선비들과 더불어 몸소 밭 갈고 학문을 독실히 함에 영화롭고자 함이 아니 +오원(五源)의 호는 운파(雲坡)며, 조휘 종철(宗哲)의 호는 서산재(西山齋)요,  
-라 늙으막에 자신의 바탕으로 삼고자하는 묘책이었다. 가법(家法)을 닦아 취적헌(取 +고(考)의 휘는 성구(成九)니 수(壽)로 종사랑(從仕郞)을 제수 받으셨다.\\ 
-適軒)의 남은 실마리로 문호(門戶)를 부지(扶持)하였으며 늙어서 때때로 금주(錦洲)+ 
 +\_비()는 공인(恭人) 안동권씨(安東權氏) 명진(明鎮)의 따님으로 4남 2녀를  
 +두었으니 셋째가 곧 공이시다. 고종(高宗) 갑오(甲午)(1894(一八九四)) 정월 삼일에  
 +목현(木峴)의 집에서 나시니 어려서부터 기량(器量)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생각이 깊고  
 +신중(重)하였다. 소시(少時)에 속됨을 가까이 하거나 비루(鄙陋)함의 실마리가 없었으며, 
 +7~8세에 배움에 나아가 족대부(族大父) 도사(都事)공께 수업함에 재사(才思)가  
 +범하여 수신제가(修身齊家)의 학문에서 이미 경학(經學)에 이름에 옛사람의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마음을 두었고, 학문을 연마하고 덕행을 닦음에 후세에 요점을 남겨 
 +주었으니, 오직 공의 행의(行義)에서 그 몸가짐을 조심함과 선(善)에 나아가는 대강을  
 +상상할 수 있다.\\ 
 + 
 +\_또 형제 4인이 공의 삼방(三房)에 거하며 백씨·중씨와 계씨에 이르기까지 이웃의  
 +여러 선비들과 더불어 몸소 밭 갈고 학문을 독실히 함에 영화롭고자 함이 아니라  
 +늙으막에 자신의 바탕으로 삼고자하는 묘책이었다. 가법(家法)을 닦아  
 +취적헌(取適軒)의 남은 실마리로 문호(門戶)를 부지(扶持)하였으며 늙어서 때때로 금주(錦洲)
 족장(族丈)에게 질의(質疑)하여 늙어 존성(存省)하는 부적으로 삼았으니 이에 공의 족장(族丈)에게 질의(質疑)하여 늙어 존성(存省)하는 부적으로 삼았으니 이에 공의
-가법을 보존하고 지킴을 상상할 수 있다.+가법을 보존하고 지킴을 상상할 수 있다.\\ 
 + 
 +\_광복후 기사(1989(一九八九))년 9(九)월 1(一)일에 어쩔 수 없이 돌아가시니 향년이  
 +96(九十六)이었다. 목현(木峴)의 후산(後山) 갑자(甲子)에 장사지내니 유인(孺人)과 쌍봉이다.  
 +배 단양우씨(丹陽禹氏)는 성원(聖源)의 따님으로 2(二)남 6(六)녀를 두었으니  
 +남은 창기(彰起)·윤기(允起)며 여는 영양(英陽) 남상경(南相璟)·청주(淸州) 한일원(韓一元)·나주(羅州) 정해창(丁海昌)·해주(海州) 오세현(吳世鉉)·경주(慶州) 최덕환(崔德煥)·영양(英陽) 남도희(南度禧)에게 시집갔다.  
 +손자 석대(錫汏)는 맏이의 소생이요, 현호(鉉浩)와 현수(鉉濉)는 둘째의 소생이며, 손녀는 함안(咸安) 조길제(趙吉濟)에게 시집갔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광복후 이사(九八九)년 九월 1일에 어쩔 수 없이 돌아가시니 향년이 九十六이 +\_공께서는 뭇 사람 보다 뛰어난 자질과 성품으로 정도(正道)를 지키고 조선(祖先)의  
-었다.목현(木峴)의 흑산(後山) 갑자(甲子)에 장사지내니 유인(孺人)과 쌍봉이다. 배 +여택(麗澤)(학문(學問)을 닦고 수양(修養)에 힘씀)에 잠심(潛心)하여 세덕(世德)을 후손에게 
-단양우씨(丹陽禹氏)는 성원(聖源)의 따님으로 드남六혀를 두었으니 남은 창기(彰 +남겨주었으니 후손을 교화(敎化)한 것이라 할 수 있다.\\
-起)·윤기(允起)며 여는 영양(英陽) 남상경(南相璟)·청주(淸州) 한일원(韓一元)·나 +
-주(羅州) 정해창(丁海昌)·해주(海州) 오세현(吳世鉉)·경주(慶州) 최덕환(崔德煥), +
-영양(英陽) 남도희(南度禧)에게 시집갔다. 손자 석대(錫決)는 맏이의 소생이요'현호 +
-(鉉浩)와 현수(鉉滩)는 둘째의 소생이며, 손녀는 함안(咸安) 조길제(趙吉濟)에게 시집 +
-갔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
-공께서는 뭇 사람 보다 뛰어난 자질과 성품으로 정도(正道)를 지키고 조선(祖先) +
-의 여택(麗澤:學問을 닦고 修養에 힘씀)에 잠심(潛心)하여 세덕(世德)을 후손에게 +
-남겨주었으니 후손을 교화(敎化)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어느날 공의 둘째아들 동련(東鍊)군이 내가 머무는 영주(榮州)에 찾아와 묘도문을 +
-부탁하기에 내가 글이 짧고 글이 궁색한지라 두 번 세 번 사양하다가 드디어 간략 +
-하게 시말(始末)을 서술하고 이어서 명(銘)하노니, +
-뿌리가 깊으면 잎은 마땅히 무성하고 근원이 깊으면 흐름은 장대하니라. +
-어찌 소신(小臣)이라 이르겠는가 후손이 바야흐로 상서(祥瑞)로운데。 +
-낙동강을 거슬려, 목현(木峴) 양치+
  
-우뚝한 사척(四尺) 봉우리는'공께서 형체를 감추신 곳이로다. +\_어느날 공의 둘째 아들 동련(東鍊)군이 내가 머무는 영주(榮州)에 찾아와 묘도문을 
-이 사실을 금석(金石)에 새겨 천년토록 밝게 보이노라. +부탁하기에 내가 글이 짧고 글이 궁색한지라 두 번 세 번 사양하다가 드디어 간략하게  
-정축(丁丑:一九九七)년 +시말(始末)을 서술하고 이어서 명(銘)하노니,\\ 
-은포공(垠浦公) 행적비문(行績碑文) +\\ 
-철 +뿌리가 깊으면 잎은 마땅히 무성하고, 근원이 깊으면 흐름은 장대하니라.\\ 
-종후인(宗后人) 세섭(世燮) 삼가 글을 짓노라. +어찌 소신(小臣)이라 이르겠는가, 후손이 바야흐로 상서(祥瑞)로운데.\\ 
-공(公)의 휘(諱)는 전구(建九)요 초휘(初諱)는 찬봉(燦鳳)이며 자(字)는 주서(周瑞)이 +낙동강을 거슬려, 목현(木峴) 양지녁. \\ 
-다. 황씨(黃氏)가 국내에 들어온 것은 신라유리왕(新羅儒理王) 五년(西紀 二十八년) +우뚝한 사척(四尺) 봉우리는공께서 형체를 감추신 곳이로다.\\ 
-에 유신 황락(黃洛)이 교시국(지금 월남)에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오던중 풍랑을 만 +이 사실을 금석(金石)에 새겨천년토록 밝게 보이노라.\\ 
-나 표류되어 동해기성(東海箕城: 지금 평해)에 표착하여 비로서 동극(東國)에 들어 +\\ 
-오게 되었으며 누대(累代)를 전하여 고려 태자검교(太子檢校) 금오공(金吾公) 휘온 +\_\_정축(丁丑)(1997(一九九七))년 월\\ 
-인(溫仁)이 평해(平海)를 본관(本貫)으로 하였다. +\_\_종후인(宗后人) 세섭(世燮) 삼가 글을 짓노라. 
-四대를 전(傳)하여 휘 용(𤨭)은 백중계(伯仲季) 三파 중 계파조(季派祖)이니 벼슬이 +</typo> 
-삼중대광보극(三重大匡輔國)으로 시호(諡號)는 충경(忠敬)이다.三대를 전하여 휘 천 +</WRAP>
-계(天繼)의 호는 잠재(潛齋)요 삼도관찰사(三道觀察使)이다.八대를 전하여 휘 귀성 +
-(貴成)의 호는 만휴당(晚休堂)이며 정략장군(定略將軍)이다.누대(累代)를 전하여 고+
  
-조(高祖)의 휘는 청하(定河)이며 자는 사일(士一)이요 증조(曾祖)의 휘는 종육(鍾六) 
-이며 호는 농암(農庵)이다.조(祖)의 휘는 경훈(景勛)이며 통덕랑(通德郎)이다.고 
-(考)의 휘는 인동(寅東)이며 호는 환초와(渙樵窩)이다. 비(她)는 밀양박씨(密陽朴氏) 
-며 사인대유(士人大有)의 따님이다. 
-서기 一八九八년 무술(戊戌) 二월 1일에 공(公)이 상인금(上仁今) 옛집에서 태어 
-나 풍체가 우람하여 남들로부터 우러러보는 주손(胄孫)으로서 자질(資質)을 갖추었 
-다는 인근사람들의 많은 칭송을 받아왔음이라。공은 시국(時局)과 현(現)상황을 밝 
-게 판단하여 문내(門内)의 안정(安定)을 도모하여 왔으며 후일에 뜻을 가다듬고 성 
-의(誠意)를 다했기에 혜택이 후손에 미쳤으니 이는 성현(聖賢)의 학문(學文)의 가르 
-침에서 나온것이며 선세를 찬양하고 후손에게 알려주는 일에 거듭 감동되어 사모하 
-는 것은 선조(先祖)의 업(業)에 성의(誠意)를 다함이라. 
-인금황씨(仁今黃氏)의 얼굴인 익양서당(益陽書堂) 증수문제(重修問題)를 수십차(數 
-十次)문회(門會)를 소집(召集)하고 의논(議論)하여 말끔이 수리완료(修理完了)하였으며 더욱이 풍산시우동(豊山時雨洞) 二十一대조 감사공중조(監司公中祖)의 강당(講 
-堂)이 없어 수백년을 두고 자손들이 염원(念願)하던 대(大) 역사를 은포공(垠浦公)의 
-문중(門中)의 협조(協助)아래 완수(完遂)하였음은 선조(先祖)의 성덕(聖德)과 업적(業 
-績)을 추모(追慕)하며 천양하고 효제지심(孝悌之心)과 승조(崇祖)이념이 남다름을 가 
  
-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으랴。 
-공(公)이 서기 一九六八년 무신(戊申) 음(陰) 十二월 十五일에 천수(天壽)를 다하여 
-어담동(魚潭洞) 각곡중등(角谷中嶝) 임좌지원(壬坐之原)에 세상만사(世上萬事)를 다 
-잊으시고 자연(自然)과 빗을 삼아 편히 잠들어 계시도다. 
-배(配)는 풍산류씨(豊山柳氏)며 구촌경심후천우(龜村景深后天佑)의 따님이시다. 
-슬하에 二남-녀를 두었으니 장자(長子)는 병순(昞舜)이고 차자(次子)는 병식(昞植) 
-이며 서(婿)에는 김상원(金相元)이다.병순(昞舜)의 남(男)은 철기(哲起) 성기(聖起) 
-순기(順起) 성기(成起) 춘기(春起)며 서(婿)에는 조봉규(趙鳳圭) 권춘경(權春景)이다. 
-병식(昞植)의 남(男)은 기일(起一) 기훈(起勳)이며 서(婿)에는 정재식(鄭在植) 조상래 
-(趙相來)이고 녀(女)는 춘연(春蓮)이다. 증손(曾孫) 이하는 생략하노라。 
-효(孝)는 백행(百行)의 근본(根本)이며 적선(積善)은 후손의 근원(根源)이라 했는데 
-필히 후손이 창성(昌盛)히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바이다. 
-재종숙(再從叔) 영구(英九)와 방예손(傍裔孫) 현우(鉉禹) 등(等)의 권유로 행적비 
-(行績碑)를 세울것을 결심(決心)했다면서 공(公)의 차자(次子) 병식씨(昞植氏)가 은포 
-공(垠浦公)의 행장(行狀)을 가져와 졸렬(拙劣)한 나에게 부탁하니 어찌 내가 공(公) 
-의 심중(心中)을 헤아려 다 기록(記錄)하겠는가. 다만 후손들의 번창(繁昌)하기를 비 
-는 바이다. 
-西紀 一九九九年 己卯 十月 日 
-完山柳建基謹撰 
c32-034.1749304929.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6/07 23:02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