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3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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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산황공(鶴山黃公) 묘갈명(墓碣銘) | + | ===학산황공(鶴山黃公) 묘갈명(墓碣銘)=== |
- | 공의 휘는 병년(昞年)이요'자는 희서(熙瑞)며, | + | <WRAP 37em justify> |
- | 황씨가 평해(平海)를 관(貫)으로 한 후부터 지내온 연대가 오래이다. 신라 유리왕(儒 | + | <typo ff:' |
- | 理王) 九년 임진(壬辰: | + | \_**학산황공(鶴山黃公) 묘갈명(墓碣銘)**\\ |
- | 신으로 봉해져 이웃 나라에 가다가 풍랑으로 인하여 신라의 기성(箕城)에 이르러 살 | + | \_공의 휘는 병년(昞年)이요, 자는 희서(熙瑞)며, |
- | 게 되었다. | + | 황씨가 평해(平海)를 관(貫)으로 한 후부터 지내온 연대가 오래이다. 신라 |
- | 신라가 망하고 여조(麗朝)에 들어와 금오위장군(金五衛將軍) 태자검교공(太子檢校 | + | 유리왕(儒理王) |
- | 公) 휘 온인(溫仁)이 관(貫)을 연 ㅡ세조이시며、四전하여 휘진(璡)·서(瑞)·용(𤨭) | + | 휘 낙(洛)께서 사신으로 봉해져 이웃 나라에 가다가 풍랑으로 인하여 신라의 기성(箕城)에 |
- | 은 우리 성씨 三파의 파조(派祖)이시다.백씨(伯氏)가 검교공(檢校公)이요, | + | 이르러 살게 되었다.\\ |
- | 氏)가 평리공(評理公)이요' | + | |
- | 조(派祖)이시다. 대광공(大匡公)의 증손은 천계(天繼)니 호는 잠재(潛齋)며 공양왕(恭 | + | |
- | 讓王)二년(一三九○)에 문과에 오르시어 삼도관찰사(三道觀察使)를 지내셨다.七전 | + | |
- | 하여 휘 맹춘(孟春)은 생원으로 승의랑(承議郎)이시다.... | + | |
- | 생원공의 손자에 휘 귀성(貴成)과 휘 한성(漢成)이 있으니, 백씨(伯氏)의 호는 만 | + | |
- | 휴당(晚休堂)이요계씨(季氏)의 호는 취적헌(取適軒)이며, | + | |
- | 두 문중의 분체조(分系祖)이시다. 조(分系祖)이시다. 고조 휘태친(泰鎭)의 호는 락서(洛西)요 증조 휘 | + | |
- | 오원(五源)의 호는 운파(雲坡)며, | + | \_신라가 망하고 여조(麗朝)에 들어와 금오위장군(金五衛將軍) 태자검교(太子檢校) |
- | 의 휘는 성구(成九)니 수(壽)로 종사랑(從仕郞)을 제수 받으셨다. | + | 휘 온인(溫仁)이 관(貫)을 연 1(ㅡ)세조이시며, |
- | 비(她)는 공인(恭人) 안동권씨(安東權氏) 명진(明鎮)의 따님으로 | + | 우리 성씨 3(三)파의 파조(派祖)이시다. 백씨(伯氏)가 검교공(檢校公)이요, |
- | 으니 셋째가 곧 공이시다. 고종(高宗) 갑오(甲午: | + | 중씨(仲氏)가 평리공(評理公)이요, |
- | 의 집에서 나시니 어려서부터 기량(器量)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생각이 깊고 신중(慎 | + | 파조(派祖)이시다. 대광공(大匡公)의 증손은 천계(天繼)니 호는 잠재(潛齋)며 |
- | 重)하였다.소시(少時)에 속됨을 가까이 하거나 비루(鄙陋)함의 실마리가 없었으며, | + | 공양왕(恭讓王) 2(二)년(1390(一三九○))에 문과에 오르시어 삼도관찰사(三道觀察使)를 |
- | 칠,팔세에 배움에 나아가 족대부(族大父) 도사(都事)공께 수업함에 재사(才思)가 | + | 지내셨다. 7(七)전하여 휘 맹춘(孟春)은 생원으로 승의랑(承議郎)이시다.\\ |
- | 범하여 수신제가(修身齊家)의 학문에서 이미 경학(經學)에 이름에 옛사람의 위기지 | + | |
- | 학(爲己之學)에 마음을 두었고, 학문을 연마하고 덕행을 닦음에 후세에 요점을 남겨 | + | \_생원공의 손자에 휘 귀성(貴成)과 휘 한성(漢成)이 있으니, 백씨(伯氏)의 호는 |
- | 주었으니, | + | 만휴당(晩休堂)이요, |
- | 을 상상할 수 있다. | + | 두 문중의 분계조(分系祖)이시다. 고조 휘 태진(泰鎭)의 호는 낙서(洛西)요 증조 휘 |
- | 또 형제 | + | |
- | 의 여러 선비들과 더불어 몸소 밭 갈고 학문을 독실히 함에 영화롭고자 함이 아니 | + | 오원(五源)의 호는 운파(雲坡)며, |
- | 라 늙으막에 자신의 바탕으로 삼고자하는 묘책이었다. 가법(家法)을 닦아 취적헌(取 | + | 고(考)의 휘는 성구(成九)니 수(壽)로 종사랑(從仕郞)을 제수 받으셨다.\\ |
- | 適軒)의 남은 실마리로 문호(門戶)를 부지(扶持)하였으며 늙어서 때때로 금주(錦洲) | + | |
+ | \_비(妣)는 공인(恭人) 안동권씨(安東權氏) 명진(明鎮)의 따님으로 | ||
+ | 두었으니 셋째가 곧 공이시다. 고종(高宗) 갑오(甲午)(: 1894(一八九四)) 정월 삼일에 | ||
+ | 목현(木峴)의 집에서 나시니 어려서부터 기량(器量)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생각이 깊고 | ||
+ | 신중(愼重)하였다. 소시(少時)에 속됨을 가까이 하거나 비루(鄙陋)함의 실마리가 없었으며, | ||
+ | 7~8세에 배움에 나아가 족대부(族大父) 도사(都事)공께 수업함에 재사(才思)가 | ||
+ | 비범하여 수신제가(修身齊家)의 학문에서 이미 경학(經學)에 이름에 옛사람의 | ||
+ |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마음을 두었고, 학문을 연마하고 덕행을 닦음에 후세에 요점을 남겨 | ||
+ | 주었으니, | ||
+ | 상상할 수 있다.\\ | ||
+ | |||
+ | \_또 형제 | ||
+ | 여러 선비들과 더불어 몸소 밭 갈고 학문을 독실히 함에 영화롭고자 함이 아니라 | ||
+ | 늙으막에 자신의 바탕으로 삼고자하는 묘책이었다. 가법(家法)을 닦아 | ||
+ | 취적헌(取適軒)의 남은 실마리로 문호(門戶)를 부지(扶持)하였으며 늙어서 때때로 금주(錦洲) | ||
족장(族丈)에게 질의(質疑)하여 늙어 존성(存省)하는 부적으로 삼았으니 이에 공의 | 족장(族丈)에게 질의(質疑)하여 늙어 존성(存省)하는 부적으로 삼았으니 이에 공의 | ||
- | 가법을 보존하고 지킴을 상상할 수 있다. | + | 가법을 보존하고 지킴을 상상할 수 있다.\\ |
+ | |||
+ | \_광복후 기사(1989(一九八九))년 9(九)월 1(一)일에 어쩔 수 없이 돌아가시니 향년이 | ||
+ | 96(九十六)이었다. 목현(木峴)의 후산(後山) 갑자(甲子)에 장사지내니 유인(孺人)과 쌍봉이다. | ||
+ | 배 단양우씨(丹陽禹氏)는 성원(聖源)의 따님으로 2(二)남 6(六)녀를 두었으니 | ||
+ | 남은 창기(彰起)·윤기(允起)며 여는 영양(英陽) 남상경(南相璟)·청주(淸州) 한일원(韓一元)·나주(羅州) 정해창(丁海昌)·해주(海州) 오세현(吳世鉉)·경주(慶州) 최덕환(崔德煥)·영양(英陽) 남도희(南度禧)에게 시집갔다. | ||
+ | 손자 석대(錫汏)는 맏이의 소생이요, | ||
- | 광복후 이사(九八九)년 九월 1일에 어쩔 수 없이 돌아가시니 향년이 九十六이 | + | \_공께서는 뭇 사람 보다 뛰어난 자질과 성품으로 정도(正道)를 지키고 조선(祖先)의 |
- | 었다.목현(木峴)의 흑산(後山) 갑자(甲子)에 장사지내니 유인(孺人)과 쌍봉이다. 배 | + | 여택(麗澤)(: 학문(學問)을 닦고 |
- | 단양우씨(丹陽禹氏)는 성원(聖源)의 따님으로 드남六혀를 두었으니 남은 창기(彰 | + | 남겨주었으니 후손을 교화(敎化)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 | 起)·윤기(允起)며 여는 영양(英陽) 남상경(南相璟)·청주(淸州) 한일원(韓一元)·나 | + | |
- | 주(羅州) 정해창(丁海昌)·해주(海州) 오세현(吳世鉉)·경주(慶州) 최덕환(崔德煥), | + | |
- | 영양(英陽) 남도희(南度禧)에게 시집갔다. 손자 석대(錫決)는 맏이의 소생이요' | + | |
- | (鉉浩)와 현수(鉉滩)는 둘째의 소생이며, | + | |
- | 갔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 + | |
- | 공께서는 뭇 사람 보다 뛰어난 자질과 성품으로 정도(正道)를 지키고 조선(祖先) | + | |
- | 의 여택(麗澤: | + | |
- | 남겨주었으니 후손을 교화(敎化)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 | |
- | 어느날 공의 둘째아들 동련(東鍊)군이 내가 머무는 영주(榮州)에 찾아와 묘도문을 | + | |
- | 부탁하기에 내가 글이 짧고 글이 궁색한지라 두 번 세 번 사양하다가 드디어 간략 | + | |
- | 하게 시말(始末)을 서술하고 이어서 명(銘)하노니, | + | |
- | 뿌리가 깊으면 잎은 마땅히 무성하고 근원이 깊으면 흐름은 장대하니라. | + | |
- | 어찌 소신(小臣)이라 이르겠는가 후손이 바야흐로 상서(祥瑞)로운데。 | + | |
- | 낙동강을 거슬려, 목현(木峴) 양치 | + | |
- | 우뚝한 사척(四尺) 봉우리는'공께서 형체를 감추신 곳이로다. | + | \_어느날 공의 둘째 아들 동련(東鍊)군이 내가 머무는 영주(榮州)에 찾아와 묘도문을 |
- | 이 사실을 금석(金石)에 새겨 천년토록 밝게 보이노라. | + | 부탁하기에 내가 글이 짧고 글이 궁색한지라 두 번 세 번 사양하다가 드디어 간략하게 |
- | 정축(丁丑: | + | 시말(始末)을 서술하고 이어서 명(銘)하노니, |
- | 은포공(垠浦公) 행적비문(行績碑文) | + | \\ |
- | 철 | + | 뿌리가 깊으면 잎은 마땅히 무성하고, |
- | 종후인(宗后人) 세섭(世燮) 삼가 글을 짓노라. | + | 어찌 소신(小臣)이라 이르겠는가, |
- | 공(公)의 휘(諱)는 전구(建九)요 초휘(初諱)는 찬봉(燦鳳)이며 자(字)는 주서(周瑞)이 | + | 낙동강을 거슬려, 목현(木峴) 양지녁. \\ |
- | 다. 황씨(黃氏)가 국내에 들어온 것은 신라유리왕(新羅儒理王) 五년(西紀 二十八년) | + | 우뚝한 사척(四尺) 봉우리는, 공께서 형체를 감추신 곳이로다.\\ |
- | 에 유신 황락(黃洛)이 교시국(지금 월남)에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오던중 풍랑을 만 | + | 이 사실을 금석(金石)에 새겨, 천년토록 밝게 보이노라.\\ |
- | 나 표류되어 동해기성(東海箕城: | + | \\ |
- | 오게 되었으며 누대(累代)를 전하여 고려 태자검교(太子檢校) 금오공(金吾公) 휘온 | + | \_\_정축(丁丑)(: 1997(一九九七))년 월\\ |
- | 인(溫仁)이 평해(平海)를 본관(本貫)으로 하였다. | + | \_\_종후인(宗后人) 세섭(世燮) 삼가 글을 짓노라. |
- | 四대를 전(傳)하여 휘 용(𤨭)은 백중계(伯仲季) 三파 중 계파조(季派祖)이니 벼슬이 | + | </ |
- | 삼중대광보극(三重大匡輔國)으로 시호(諡號)는 충경(忠敬)이다.三대를 전하여 휘 천 | + | </ |
- | 계(天繼)의 호는 잠재(潛齋)요 삼도관찰사(三道觀察使)이다.八대를 전하여 휘 귀성 | + | |
- | (貴成)의 호는 만휴당(晚休堂)이며 정략장군(定略將軍)이다.누대(累代)를 전하여 고 | + | |
- | 조(高祖)의 휘는 청하(定河)이며 자는 사일(士一)이요 증조(曾祖)의 휘는 종육(鍾六) | ||
- | 이며 호는 농암(農庵)이다.조(祖)의 휘는 경훈(景勛)이며 통덕랑(通德郎)이다.고 | ||
- | (考)의 휘는 인동(寅東)이며 호는 환초와(渙樵窩)이다. 비(她)는 밀양박씨(密陽朴氏) | ||
- | 며 사인대유(士人大有)의 따님이다. | ||
- | 서기 一八九八년 무술(戊戌) 二월 1일에 공(公)이 상인금(上仁今) 옛집에서 태어 | ||
- | 나 풍체가 우람하여 남들로부터 우러러보는 주손(胄孫)으로서 자질(資質)을 갖추었 | ||
- | 다는 인근사람들의 많은 칭송을 받아왔음이라。공은 시국(時局)과 현(現)상황을 밝 | ||
- | 게 판단하여 문내(門内)의 안정(安定)을 도모하여 왔으며 후일에 뜻을 가다듬고 성 | ||
- | 의(誠意)를 다했기에 혜택이 후손에 미쳤으니 이는 성현(聖賢)의 학문(學文)의 가르 | ||
- | 침에서 나온것이며 선세를 찬양하고 후손에게 알려주는 일에 거듭 감동되어 사모하 | ||
- | 는 것은 선조(先祖)의 업(業)에 성의(誠意)를 다함이라. | ||
- | 인금황씨(仁今黃氏)의 얼굴인 익양서당(益陽書堂) 증수문제(重修問題)를 수십차(數 | ||
- | 十次)문회(門會)를 소집(召集)하고 의논(議論)하여 말끔이 수리완료(修理完了)하였으며 더욱이 풍산시우동(豊山時雨洞) 二十一대조 감사공중조(監司公中祖)의 강당(講 | ||
- | 堂)이 없어 수백년을 두고 자손들이 염원(念願)하던 대(大) 역사를 은포공(垠浦公)의 | ||
- | 문중(門中)의 협조(協助)아래 완수(完遂)하였음은 선조(先祖)의 성덕(聖德)과 업적(業 | ||
- | 績)을 추모(追慕)하며 천양하고 효제지심(孝悌之心)과 승조(崇祖)이념이 남다름을 가 | ||
- | 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으랴。 | ||
- | 공(公)이 서기 一九六八년 무신(戊申) 음(陰) 十二월 十五일에 천수(天壽)를 다하여 | ||
- | 어담동(魚潭洞) 각곡중등(角谷中嶝) 임좌지원(壬坐之原)에 세상만사(世上萬事)를 다 | ||
- | 잊으시고 자연(自然)과 빗을 삼아 편히 잠들어 계시도다. | ||
- | 배(配)는 풍산류씨(豊山柳氏)며 구촌경심후천우(龜村景深后天佑)의 따님이시다. | ||
- | 슬하에 二남-녀를 두었으니 장자(長子)는 병순(昞舜)이고 차자(次子)는 병식(昞植) | ||
- | 이며 서(婿)에는 김상원(金相元)이다.병순(昞舜)의 남(男)은 철기(哲起) 성기(聖起) | ||
- | 순기(順起) 성기(成起) 춘기(春起)며 서(婿)에는 조봉규(趙鳳圭) 권춘경(權春景)이다. | ||
- | 병식(昞植)의 남(男)은 기일(起一) 기훈(起勳)이며 서(婿)에는 정재식(鄭在植) 조상래 | ||
- | (趙相來)이고 녀(女)는 춘연(春蓮)이다. 증손(曾孫) 이하는 생략하노라。 | ||
- | 효(孝)는 백행(百行)의 근본(根本)이며 적선(積善)은 후손의 근원(根源)이라 했는데 | ||
- | 필히 후손이 창성(昌盛)히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바이다. | ||
- | 재종숙(再從叔) 영구(英九)와 방예손(傍裔孫) 현우(鉉禹) 등(等)의 권유로 행적비 | ||
- | (行績碑)를 세울것을 결심(決心)했다면서 공(公)의 차자(次子) 병식씨(昞植氏)가 은포 | ||
- | 공(垠浦公)의 행장(行狀)을 가져와 졸렬(拙劣)한 나에게 부탁하니 어찌 내가 공(公) | ||
- | 의 심중(心中)을 헤아려 다 기록(記錄)하겠는가. 다만 후손들의 번창(繁昌)하기를 비 | ||
- | 는 바이다. | ||
- | 西紀 一九九九年 己卯 十月 日 | ||
- | 完山柳建基謹撰 |
c32-034.1749304929.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6/07 23:02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