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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2-034

학산황공(鶴山黃公) 묘갈명(墓碣銘)

학산황공(鶴山黃公) 묘갈명(墓碣銘)
 공의 휘는 병년(昞年)이요, 자는 희서(熙瑞)며, 학산(鶴山)은 자호(自號)이다. 우리 황씨가 평해(平海)를 관(貫)으로 한 후부터 지내온 연대가 오래이다. 신라 유리왕(儒理王) 9(九)년 임진(壬辰)(: 서기 32(三十二))년 중국 후한 때에 유신(儒臣) 휘 낙(洛)께서 사신으로 봉해져 이웃 나라에 가다가 풍랑으로 인하여 신라의 기성(箕城)에 이르러 살게 되었다.
 신라가 망하고 여조(麗朝)에 들어와 금오위장군(金五衛將軍) 태자검교(太子檢校) 휘 온인(溫仁)이 관(貫)을 연 1(ㅡ)세조이시며, 4(四)전하여 휘 진(璡)·서(瑞)·용(𤨭)은 우리 성씨 3(三)파의 파조(派祖)이시다. 백씨(伯氏)가 검교공(檢校公)이요, 중씨(仲氏)가 평리공(評理公)이요, 계씨(季氏)가 대광공(大匡公)으로 공께서 분파(分派)의 파조(派祖)이시다. 대광공(大匡公)의 증손은 천계(天繼)니 호는 잠재(潛齋)며 공양왕(恭讓王) 2(二)년(1390(一三九○))에 문과에 오르시어 삼도관찰사(三道觀察使)를 지내셨다. 7(七)전하여 휘 맹춘(孟春)은 생원으로 승의랑(承議郎)이시다.
 생원공의 손자에 휘 귀성(貴成)과 휘 한성(漢成)이 있으니, 백씨(伯氏)의 호는 만휴당(晩休堂)이요, 계씨(季氏)의 호는 취적헌(取適軒)이며, 인금(仁今)과 목현(木峴) 두 문중의 분계조(分系祖)이시다. 고조 휘 태진(泰鎭)의 호는 낙서(洛西)요 증조 휘 오원(五源)의 호는 운파(雲坡)며, 조휘 종철(宗哲)의 호는 서산재(西山齋)요, 고(考)의 휘는 성구(成九)니 수(壽)로 종사랑(從仕郞)을 제수 받으셨다.
 비(妣)는 공인(恭人) 안동권씨(安東權氏) 명진(明鎮)의 따님으로 4남 2녀를 두었으니 셋째가 곧 공이시다. 고종(高宗) 갑오(甲午)(: 1894(一八九四)) 정월 삼일에 목현(木峴)의 집에서 나시니 어려서부터 기량(器量)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생각이 깊고 신중(愼重)하였다. 소시(少時)에 속됨을 가까이 하거나 비루(鄙陋)함의 실마리가 없었으며, 7~8세에 배움에 나아가 족대부(族大父) 도사(都事)공께 수업함에 재사(才思)가 비범하여 수신제가(修身齊家)의 학문에서 이미 경학(經學)에 이름에 옛사람의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마음을 두었고, 학문을 연마하고 덕행을 닦음에 후세에 요점을 남겨 주었으니, 오직 공의 행의(行義)에서 그 몸가짐을 조심함과 선(善)에 나아가는 대강을 상상할 수 있다.
 또 형제 4인이 공의 삼방(三房)에 거하며 백씨·중씨와 계씨에 이르기까지 이웃의 여러 선비들과 더불어 몸소 밭 갈고 학문을 독실히 함에 영화롭고자 함이 아니라 늙으막에 자신의 바탕으로 삼고자하는 묘책이었다. 가법(家法)을 닦아 취적헌(取適軒)의 남은 실마리로 문호(門戶)를 부지(扶持)하였으며 늙어서 때때로 금주(錦洲) 족장(族丈)에게 질의(質疑)하여 늙어 존성(存省)하는 부적으로 삼았으니 이에 공의 가법을 보존하고 지킴을 상상할 수 있다.
 광복후 기사(1989(一九八九))년 9(九)월 1(一)일에 어쩔 수 없이 돌아가시니 향년이 96(九十六)이었다. 목현(木峴)의 후산(後山) 갑자(甲子)에 장사지내니 유인(孺人)과 쌍봉이다. 배 단양우씨(丹陽禹氏)는 성원(聖源)의 따님으로 2(二)남 6(六)녀를 두었으니 남은 창기(彰起)·윤기(允起)며 여는 영양(英陽) 남상경(南相璟)·청주(淸州) 한일원(韓一元)·나주(羅州) 정해창(丁海昌)·해주(海州) 오세현(吳世鉉)·경주(慶州) 최덕환(崔德煥)·영양(英陽) 남도희(南度禧)에게 시집갔다. 손자 석대(錫汏)는 맏이의 소생이요, 현호(鉉浩)와 현수(鉉濉)는 둘째의 소생이며, 손녀는 함안(咸安) 조길제(趙吉濟)에게 시집갔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공께서는 뭇 사람 보다 뛰어난 자질과 성품으로 정도(正道)를 지키고 조선(祖先)의 여택(麗澤)(: 학문(學問)을 닦고 수양(修養)에 힘씀)에 잠심(潛心)하여 세덕(世德)을 후손에게 남겨주었으니 후손을 교화(敎化)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느날 공의 둘째 아들 동련(東鍊)군이 내가 머무는 영주(榮州)에 찾아와 묘도문을 부탁하기에 내가 글이 짧고 글이 궁색한지라 두 번 세 번 사양하다가 드디어 간략하게 시말(始末)을 서술하고 이어서 명(銘)하노니,

뿌리가 깊으면 잎은 마땅히 무성하고, 근원이 깊으면 흐름은 장대하니라.
어찌 소신(小臣)이라 이르겠는가, 후손이 바야흐로 상서(祥瑞)로운데.
낙동강을 거슬려, 목현(木峴) 양지녁.
우뚝한 사척(四尺) 봉우리는, 공께서 형체를 감추신 곳이로다.
이 사실을 금석(金石)에 새겨, 천년토록 밝게 보이노라.

  정축(丁丑)(: 1997(一九九七))년 월
  종후인(宗后人) 세섭(世燮) 삼가 글을 짓노라.

c32-034.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6/08 20:23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