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해선생행장(大海先生行狀)
大海先生行狀
선생(先生)의 휘(諱)는 응청(應淸)이요 자(字)는 청지(淸之)며 자호(自號)를 대해(大海)라 하다.
고려(高麗) 첨의평리(僉議評理) 휘(諱) 서(瑞)의 후손(後孫)이다. 증조(曾祖)의 휘(諱) 옥숭(玉崇)은 한성판관(漢城判官)이요,
조(祖)의 휘(諱) 보곤(輔坤)은 생원(生員)이요, 고(考)는 휘(諱) 우(瑀)는 통훈대부(通訓大夫) 성주목사(星州牧使)이며,
비(妣)는 삼척(三陟) 김씨(金氏) 휘(諱) 빈(濱)의 여(女)이다. 가정(嘉靖) 갑신년(甲申年)에 선생(先生)이 나셨으며
어려서부터 특이(特異)한 품질(稟質)이 있어서 학(學)을 좋아하고 힘쓰더니
임자년(壬子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合格)되었다가 경신년(庚申年)에 별과(別科)에 입시(入試)하여
책문(策文)의 제목(題目)이 착하지 못한 말을 보고 대답(對答)하지 않고 퇴장(退場)하였다 한다.
이로부터 문(門)을 닫고 학업(學業)에 힘쓰며 덕행(德行)을 닦으니 원근(遠近) 사람들이
모두 그 고상(高尙)한 인격(人格)에 칭송(稱頌)이 자자(藉藉)하였다 한다.
이로 갑신년(甲申年)에 조정(朝廷)의
천용(薦用)으로 예빈(禮賓) 참봉(參奉)을 삼았으나 이에 부임(赴任)하지 않았으며 다시
연은전(延恩殿) 참봉(參奉)을 제수(除授)하니 거듭 사퇴(辭退)할 수 없어 부득이(不得已) 부임(赴任)하였다.
그러므로 위에는 특명(特命)하여 공(公)으로
하여금 박연(朴淵) 폭포(爆布) 개성(開城) 일대(一帶)의 관광(觀光)을 임의(任意)로 감상(鑑賞)케 하는 특전(特典)을
내렸다. 그리고 얼마 후 갑오년(甲午年)에 장악원(掌樂院) 별좌(別坐)를 제수(除授)하였더니
때마침 임금의 대가(大駕)가 의주(義州)로부터 돌아오니, 선생(先生)은 스스로
신분(身分)에 맞지 않음을 느껴 억지로 허리를 구부려 궐하(闕下)에 나아가서
사폐어(四弊語)를 글로서 올린 것이 심(甚)히 절중(切中)하여 임금이 이를 즐겁게
받아들이고 드디어 진보(眞寶) 현감(縣監)으로 뽑아 쓰는지라. 곧
부임(赴任)하여 전란(戰亂)으로 흩어지고 도망한 백성(百姓)들을 모아 잘 무마(撫摩)하여
재건(再建)하니 고을이 다시 완전(完全)히 회복(回復)되었더라. 그 후(後) 사직(辭職)하고
돌아와 정침(正寢)에서 고종(考終)하니 호전(虎田) 임좌(壬坐)에 장사(葬事)하였다.
선생(先生)의 인격(人格)은 충효(忠孝)가 출천(出天)하여 정성지례(定省之禮)와 지감봉양(旨甘奉養)을
처음부터 끝까지 게으르지 않고 평생(平生)을 한결같이 섬기매
원근(遠近) 사람들이 평해(平海) 황문(黃門)에 문증(文曾)이 새로 탄생(誕生)하였다고
칭송(稱頌)이 자자(藉藉)하였다. 내간상(內艱喪)을 당(當)하니 호천통곡(呼天痛哭)하는 중 피를
토(吐)하였으며 묘하(墓下)에서 2년간(二年間)을 여묘(蘆墓)살이를 하는데 끝마치는
날까지 죽(粥)으로 생활(生活)하였다. 그러나 부친(父親)의 침소(寢所)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새벽 일찍이 문안(問安)드리고 내정(內庭)에는 들르는
일이 없이 여막(蘆幕)으로 다시 올라갔다.
그 후(後) 다시 외간상(外艱喪)을 당(當)하니 그 애모(哀慕)함이 전상(前喪)과 조금도
다름이 없어 그 출천(出天)의 지성(至誠)이 관민(官民)을 감동(感動)시켜 드디어
관(官)에서 나라에 그 효성(孝誠)을 장계(狀啓)하여 만력(萬歷) 무인년(戊寅年)에 조정(朝廷)에서
선생(先生)을 효자(孝子)로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表彰)하였다.
선생(先生)은 천품(天稟)이 신중(愼重)하여 그 언어(言語)와 동작(動作)이 사람으로 하여금
모르는 사이에 머리가 수그러지도록 하는 천만근(千萬斤)의 무게가 있었다.
평소(平素)의 기거(起居)는 옛날 성현(聖賢)들의 참된 인생(人生)의 법도(法度)를 따라 징결(澄潔)한
일실(一室)에 단정(端正)히 앉아 항시 경서(經書)를 탐독(耽讀)하며 그 실천(實踐)에 힘썼다.
실내(室內) 4벽상(四壁上)에는 성구(聖句) 등(等)을 써서 붙여 좌우명(左右銘)으로 삼았다.
또 시(詩)짓기를 좋아하였는데 그 중(中)의 한 구절(句節)을 소개(紹介)하면
黎羹栗飯養殘軀 (여갱속반양잔구) 명아주국 조밥에 늙은 몸이 수양(修養)되니
晨起衣冠讀典謨 (신기의관독전모) 새벽녁에 일어나서 의관(衣冠)을 정제하니, 나홀로 옛 사람의 모범이 되었은 즉
莫道先生無用處 (막도선생무용처) 선생은 나더러 쓸모없다 말을 마소.
一身都是一唐虞 (일신도시일당우) 내 한몸은 도무지 당우(唐虞)와도 같아서.
그 자득(自得)의 즐거움은 대개
이것으로서 가(可)히 생각(生覺)해 볼 일이다. 나이 많고 덕(德)이 높음에
원근(遠近) 학도(學徒)들이 많이 모여들어도 훈회(訓誨)에게 으르지 않으며,
관혼상제(冠婚喪祭) 4례(四禮)에도 밝아 깨닫기 어려운 대문을 잘 강론(講論)하며
이해(理解)케 하였으며,
월천(月川) 조(趙) 선생(先生) 목(穆)1)과
대암(大庵) 박(朴) 선생(先生) 성(惺)2)과 같은
명사(名士)들과도 서소(書疏)로 왕복(往復)하여 서로 닦고 행함을 같이하니,
향읍(鄕邑)이 모두 따라 변화(變化)함에 사람들이 평해(平海) 고을은
예의(禮儀)의 문이라 일컬었더라.
선생(先生)이 사문(斯文)의 공(功)이 이와 같이 크니 당시 평해(平海)에
귀양살이하던 아계(鵝溪) 이상국(李相國)이 그 덕행(德行)을 크게 모열(慕悅)하고
평상시(平常時) 공(公)의 덕행(德行)에 관(關)한 기록(記錄)을 읽고 얻음이 컸다 하니,
선생(先生)이 이르기를 나는 학(學)에 종사(從事)한 바 아니나 다만 내가
동정득실(動靜得失)3)을 대강 얻었음이라 하고 비유하기를, 비로 먼지를
요란(撓亂)하게 쓸어 붙이면 먼지가 쓴 것보다 더 일어나는 법이니
이와 같이 부산하게 쓸어서 먼지를
일으키느니보다 오히려 쓸지 않아 먼지가 일어나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 비유키를 우물을 치는데 요란하게 물을 흔들어도
오히려 우물이 더 탁(濁)하여지는 이보다는 우물을 가만히 두어
스스로 맑아지는 것이 오히려 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이와 같이 정(靜)은 동(動)보다 힘이 크다는 데 있음을 말하였다.
이에 아계(鵝溪)가 탄복(嘆服)하고
정명촌기(正明村記)4)를 저술(著述)하여 스스로 깨우침으로
했다. 선생(先生)은 정(靜)으로서 신인합일(神人合一)의 신비경(神秘境)을 깨달아 인간(人間)의
덕의(德義)의 도(道)를 실천(實踐)하는데 새 힘을 얻었던 것이다. 선생(先生)이 몰(歿)한
뒤에 고을 사람들이 선생(先生)을 추모(追慕)하여 사당(祠堂)을 세우고
조두(俎豆)로써 향기(享祈)하였다 한다.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5) 찬(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