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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2-034 [2025/06/08 07:53] ssio2c32-034 [2025/06/08 20:23] (현재) ssi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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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포공(垠浦公) 행적비문(行績碑文)===+===학산황공(鶴山黃公) 묘갈명(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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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ypo ff:'한양해서'; fs:1.2em; lh:1.5em> <typo ff:'한양해서'; fs:1.2em; lh:1.5em>
-\_**은포공(垠浦公) 행적비문(行績碑文)**\\ +\_**학산황공(鶴山黃公) 묘갈명(墓碣銘)**\\ 
-\_공(公)의 휘(諱)는 건구(建九)요 초휘(初諱)는 찬봉(燦鳳)며 ()는  +\_공의 휘는 병년(昞年), 자는 희서(熙瑞)며, 학산(鶴山)은 자호(自號)이다. 우리 
-주서(周瑞)이다. 황씨(黃氏)가 국에 들어온 것은 신라(新羅) 유리왕(儒理王)  +황씨가 평해(平海)를 관(貫)으로 한 후부터 지내온 연대가 오래이다. 신라  
-5()년(서기(西紀) 28(十八))에 유신 낙(洛)이 교지국(지금 월남)에 사신(使臣)으로 다가 오던 중 풍랑을  +유리왕(儒理王) 9()년 임진(壬辰)(: 서기 32(三十二))년 중국 후한 때에 유신(儒臣)  
-만나 표류되어 동해(東海) 기성(箕城)(: 지금 평해)에 표착하여 비로서 동극(東國)에  +휘 낙(洛)께서 사신으로 봉해져 이웃 나라에 가다가 풍랑으로 인하여 신라의 기성(箕城)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누대(累代)를 전하여 고려 태자검교(太子檢校) 금오공(金吾公) 휘 +이르러 살게 되었다.\\
-온인(溫仁)이 평해(平海)를 본관(本貫)으로 하였다.\\+
  
-\_4()대를 전()하여 휘 용(𤨭)은 백중계(伯仲季) 3(三)파 중 계파조(派祖)이니 벼슬이 +\_신라가 망하고 여조(麗朝)에 들어와 금오위장군(金五衛將軍) 태자검교(太子檢校)  
-중대광보극(三重大匡輔國)으로 시호(諡號)는 충경(忠敬)이다. 3()대를 전하여 휘  +휘 온인(溫仁)이 관()을 연 1()세조이시며, 4(四)전하여 휘 진(璡)·서(瑞)·용(𤨭)은  
-천계(天繼)의 호는 잠재(潛齋)요 삼도관찰사(三道觀察使)이다. 8(八)대를 전하여 휘  +우리 성씨 3(三)파의 파조(派祖)이시다. 백씨(伯氏)가 검교공(檢校公)요,  
-귀성(貴成)의 호는 만휴당(晩休堂)이며 정략장군(定略將軍)이다. 누대(累代)를 전하여  +씨(仲氏)가 평리공(評理公)이요, 계씨(季氏)가 대광(大匡)으로 공께서 분파(分派)의  
-고조(高祖)의 는 청하(定河)이며 자는 사일(士一)이요 증조(曾祖)의 휘는 종육(鍾六)이며  +파조(派祖)이다. 대광공(大匡公)의 증손은 천계(天繼)니 호는 잠재(潛齋)며  
-호는 농암(農庵)이다. 조(祖)의 휘는 경훈(景勛)이며 통덕랑(通德郎)이다. +공양왕(恭讓王) 2(二)년(1390(一三九○))에 문과에 오르시어 삼도관찰사(三道觀察使)를  
-고(考)의 휘는 인동(寅東)이며 호는 환초와(渙樵窩)이다. 비(妣)는 밀양박씨(密陽朴氏)며  +지내셨다. 7()전하여 휘 맹춘(孟春)은 생원으로 승의랑(承議郎)이다.\\
-사인(士人) 대유大有)의 따님이다.\\+
  
-\_서기 1898(一八九八)년 무술(戊戌2()월 1()일에 공()이 인금(仁今) 옛집에서  +\_생원공의 손자에 휘 귀성(貴成)과 휘 한성(漢成)이 있으니, 백씨(伯氏)의 호는  
-태어나 풍체가 우람하여 남들로부터 우러러보는 주손(胄孫)으로서 자질(資質)을  +만휴당(晩休堂)이요, 계씨(季氏)의 호는 취적헌(取適軒)이며, 인금(仁今)과 현(木峴
-갖추었다는 인근 사람들의 많은 칭송을 받아왔음이라. 공은 시국(時局)과 현()상황을 밝게  +두 의 분계조(分系祖)이시조 휘 태진(泰鎭)의 호는 낙서(洛西)요 증조 
-판단하여 내(門内)의 안정(安定)을 도모하여 왔으며 후일에 뜻을 가고  +
-성의(誠意)를 다했기에 혜택이 후손에 미쳤으니 이는 성현(聖賢)의 학문(學文)의  +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며 선세를 찬양하고 후손에게 알려주는 일에 거듭 감동되어 사모하는  +
-것은 선(先祖)의 업(業)에 성의(誠意)를 다함이라.\\+
  
-\_인금황씨(仁今黃氏)의 얼굴인 익양서당(益陽書堂중수문제(重修問題)를  +오원(五源)의 호는 운파(雲坡)며, 조휘 종철(宗哲)의 호는 서(西)요,  
-수십차(數十次) 문회(門會)를 소집(召集)하고 논(議論)하여 말끔이  +()의 휘는 성구(成九)니 수()로 종(從仕郞)을 제수 받으셨다.\\
-수리완료(修理完了)하였으며 더욱이 풍산(山) 시우동(時雨洞) 21(二十一)대조  +
-감사공(監司公) 중조(中祖)의 강당(講堂)이 없어 백년을 두고 자손들이 염원(念願)하던  +
-대(大) 역를 은포공(垠浦公)의 +
-문중(門中)의 협조(協助)아래 완수(完遂)하였음은 선조(先祖)의 성덕(聖德)과  +
-업적(業績)을 추모(追慕)하며 천양하고 효지심(孝悌之心)과 승조(崇祖)이념이 남름을  +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으랴.\\+
  
-\_공()이 서기 1969(一九六八)년 무신(戊申(12(十二)월 15(十五)일에 천수(天壽)를 다하여 +\_비(妣)는 (恭人안동권씨(安東權氏명진(明鎮)의 따님으로 4남 2녀를  
-담동(魚潭洞) 각곡(角谷) (中嶝임좌지원(壬坐之原)에 세상만사(世上萬事)를 다 +두었으니 셋째가 곧 공이시다. 고종(高宗갑오(甲午)(: 1894(一八九四)) 정월 삼일에  
-잊으시고 연(自然)과 빗을 아 편히 잠들어 계시도다.\\+목현(木峴)의 집에서 나시니 려서부터 기량(器量)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생이 깊고  
 +중(愼重)하였다. 소시(少時)에 속됨을 가까이 하거나 비루(鄙陋)함의 실마리가 없었으며, 
 +7~8에 배움에 나아가 족대부(族大父) 도사(事)공께 수업함에 재사(才思)가  
 +비범하여 수신제가(修身齊家)의 학문에서 이미 경학(經學)에 이름에 옛사람의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마음을 두었, 학문을 마하고 덕행을 닦음에 후세에 요점을 남겨 
 +주었으니, 오직 공의 행의(行義)에서 그 몸가짐을 조심함과 선(善)에 나가는 대강을  
 +상상할 수 있다.\\
  
-\_()는 풍산류(豊山柳氏)며 구촌(龜村) 경심(景深) 후(后) 천우(天佑)의 따님시다. +\_또 형제 4인이 공의 삼방(三房)에 거하며 백·중씨와 계씨에 이르기까지 이웃의  
-슬하에 2(二)남 1(一)녀를 두었니 장(長子)는 병순(昞舜)고 차자(次子)는  +여러 선비들과 더불어 몸소 밭 갈고 학문을 독실히 함에 영화롭고자 함이 아니라  
-병식(昞植)이며 서(婿)에는 김상원(金相元)이다. 병순(昞舜)의 남(男)은 철기(哲起성기(聖起) +늙으막에 자신의 바탕로 삼고는 묘책었다. 가법(家法)을 닦아  
-순기(順起) 성기(成起) 춘기(春起)며 서(婿)에는 조봉규(趙鳳圭) 권춘경(權春景)이다. +취적헌(取適軒)의 남은 실마리로 문호(門戶)를 부지(扶持)하였으며 늙어서 때때로 금주(錦洲
-병식(昞植)의 ()은 기일(起一) 기훈(起勳)이며 서(婿)는 정재식(鄭在植)  +족장(族丈)에게 질의(質疑)하여 늙어 존성(存省)하는 부적으로 삼았으니 이에 공의 
-래(趙相來)이고 녀(女)는 춘연(春蓮)이. 증손(曾孫) 이하는 생략하노라.\\+가법을 보존하고 지킴을 상할 수 있다.\\
  
-\_()는 백행(百行)의 근본(根本)이며 적선(積善)은 후손의 원(源)이라 했 +\_광복후 기사(1989(一九八九))년 9()월 1()일에 어쩔 수 없이 돌아가시니 향년이  
-필히 후손이 창성(昌盛)히리라 믿어 심치 않는 바이다.\\+96(九十六)이었다. 목현(木峴)의 후산(後山) 갑자(甲子)에 장사지내니 유인(孺人)과 쌍봉이다.  
 +배 단양우씨(丹陽禹氏)는 성원(源)의 따님으로 2(二)남 6(六)녀를 두었으니  
 +남은 창기(彰起)·윤기(允起)며 여는 영양(英陽) 남상경(南相璟)·청주(淸州) 한일원(韓一元)·나주(羅州) 정해창(丁海昌)·해주(海州) 오세현(吳世鉉)·경주(慶州) 최덕환(崔德煥)·영양(英陽) 남도희(南度禧)에게 시집갔다.  
 +자 석대(錫汏)는 맏의 소생이요, 현호(鉉浩)와 현수(鉉濉)는 둘째의 소생이며, 손녀는 함안(咸安) 조길제(趙吉濟)에게 시집갔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_재종숙(再從叔영구(英九)와 방예손(傍裔孫현우(鉉禹) 등()의 권유로  +\_공께서는 뭇 사람 보다 뛰어난 자질과 성품으로 정도(正道)를 지키고 조선(祖先)의  
-행적비(行績碑)를 세울 것을 결심(心)했다면서 공()의 차자(次子병식(昞植氏)씨가  +여택(麗澤)(: 학문(學問)을 닦고 수양(修養)에 힘씀)에 잠심(心)하여 세덕(世德)을 후손에게 
-은포(垠浦公)의 행장(行狀)을 져와 졸렬(拙劣)한 나게 부탁하니 어찌 내가 공(公)의  +남겨주었으니 후손을 교화(敎化)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심중(心中)을 헤아려 다 기록(記錄)하겠는가. 다만 후손들의 번창(繁昌)하기를 비는 이다.\\ + 
-\_\_서기(西紀1999년(一九九九年기묘(己卯10(十月) 일(日)\\ +\_어느날 공의 둘째 아들 동련(東鍊)군이 내가 머무는 영주(榮州)에 찾아와 묘도문을 
-\_\_완산(完山유건기(柳建基) 근찬(謹撰)+부탁하기에 내가 글이 짧고 글이 궁색한지라 두 번 세 번 사양하다가 드디어 간략하게  
 +시말(始末)을 서술하고 이어서 명()하노니,\\ 
 +\\ 
 +뿌리가 깊으면 잎은 마땅히 무성하고, 근원이 깊으면 흐름은 장대하니라.\\ 
 +어찌 소신(小臣)이라 이르겠는가후손이 바야흐로 상서(祥瑞)로운데.\\ 
 +낙동강을 거슬려, 목현(木峴) 양지녁. \\ 
 +우뚝한 사척(四尺) 봉우리, 공께서 형체를 감추신 곳다.\\ 
 +이 사실을 금석(金石)에 새겨, 천년토록 밝게 보이노라.\\ 
 +\\ 
 +\_\_정축(丁丑)(: 1997(一九九))년 월\\ 
 +\_\_종후인(宗后人세섭(世燮삼가 글을 짓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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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2-034.1749336814.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6/08 07:53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