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3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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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포공(垠浦公) 행적비문(行績碑文)=== | + | ===학산황공(鶴山黃公) 묘갈명(墓碣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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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_**은포공(垠浦公) 행적비문(行績碑文)**\\ | + | \_**학산황공(鶴山黃公) 묘갈명(墓碣銘)**\\ |
- | \_공(公)의 휘(諱)는 건구(建九)요 초휘(初諱)는 찬봉(燦鳳)이며 자(字)는 | + | \_공의 휘는 |
- | 주서(周瑞)이다. 황씨(黃氏)가 국내에 들어온 것은 | + | 황씨가 평해(平海)를 관(貫)으로 한 후부터 지내온 |
- | 5(五)년(서기(西紀) 28(二十八)년)에 유신 | + | 유리왕(儒理王) |
- | 만나 표류되어 동해(東海) | + | 휘 낙(洛)께서 |
- | 들어오게 되었으며 누대(累代)를 전하여 고려 태자검교(太子檢校) 금오공(金吾公) 휘 | + | 이르러 살게 되었다.\\ |
- | 온인(溫仁)이 평해(平海)를 본관(本貫)으로 하였다.\\ | + | |
- | \_4(四)대를 전(傳)하여 휘 용(𤨭)은 | + | \_신라가 망하고 여조(麗朝)에 들어와 금오위장군(金五衛將軍) 태자검교(太子檢校) |
- | 삼중대광보극(三重大匡輔國)으로 | + | 휘 온인(溫仁)이 관(貫)을 연 1(ㅡ)세조이시며, |
- | 천계(天繼)의 호는 잠재(潛齋)요 삼도관찰사(三道觀察使)이다. 8(八)대를 전하여 휘 | + | 우리 성씨 |
- | 귀성(貴成)의 호는 만휴당(晩休堂)이며 정략장군(定略將軍)이다. 누대(累代)를 전하여 | + | 중씨(仲氏)가 평리공(評理公)이요, |
- | 고조(高祖)의 | + | 파조(派祖)이시다. 대광공(大匡公)의 증손은 |
- | 호는 농암(農庵)이다. 조(祖)의 휘는 경훈(景勛)이며 통덕랑(通德郎)이다. | + | 공양왕(恭讓王) 2(二)년(1390(一三九○))에 문과에 오르시어 |
- | 고(考)의 휘는 인동(寅東)이며 호는 환초와(渙樵窩)이다. 비(妣)는 밀양박씨(密陽朴氏)며 | + | 지내셨다. 7(七)전하여 휘 맹춘(孟春)은 생원으로 승의랑(承議郎)이시다.\\ |
- | 사인(士人) 대유大有)의 따님이다.\\ | + | |
- | \_서기 1898(一八九八)년 무술(戊戌) 2(二)월 1(一)일에 공(公)이 상인금(上仁今) 옛집에서 | + | \_생원공의 손자에 휘 귀성(貴成)과 휘 한성(漢成)이 있으니, 백씨(伯氏)의 호는 |
- | 태어나 풍체가 우람하여 남들로부터 우러러보는 주손(胄孫)으로서 자질(資質)을 | + | 만휴당(晩休堂)이요, 계씨(季氏)의 호는 취적헌(取適軒)이며, 인금(仁今)과 |
- | 갖추었다는 인근 사람들의 많은 칭송을 받아왔음이라. 공은 시국(時局)과 현(現)상황을 밝게 | + | 두 문중의 분계조(分系祖)이시다. 고조 휘 태진(泰鎭)의 호는 낙서(洛西)요 증조 휘 |
- | 판단하여 | + | |
- | 성의(誠意)를 다했기에 혜택이 후손에 미쳤으니 이는 성현(聖賢)의 학문(學文)의 | + | |
- |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며 선세를 찬양하고 후손에게 알려주는 일에 거듭 감동되어 사모하는 | + | |
- | 것은 선조(先祖)의 업(業)에 성의(誠意)를 다함이라.\\ | + | |
- | \_인금황씨(仁今黃氏)의 얼굴인 익양서당(益陽書堂) 중수문제(重修問題)를 | + | 오원(五源)의 호는 운파(雲坡)며, 조휘 종철(宗哲)의 호는 서산재(西山齋)요, |
- | 수십차(數十次) 문회(門會)를 소집(召集)하고 | + | 고(考)의 휘는 성구(成九)니 수(壽)로 종사랑(從仕郞)을 제수 받으셨다.\\ |
- | 수리완료(修理完了)하였으며 더욱이 풍산(豊山) 시우동(時雨洞) 21(二十一)대조 | + | |
- | 감사공(監司公) 중조(中祖)의 강당(講堂)이 없어 | + | |
- | 대(大) 역사를 은포공(垠浦公)의 | + | |
- | 문중(門中)의 협조(協助)아래 완수(完遂)하였음은 선조(先祖)의 성덕(聖德)과 | + | |
- | 업적(業績)을 추모(追慕)하며 천양하고 효제지심(孝悌之心)과 승조(崇祖)이념이 남다름을 | + | |
- |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으랴.\\ | + | |
- | \_공(公)이 서기 1969(一九六八)년 무신(戊申) 음(陰) 12(十二)월 15(十五)일에 | + | \_비(妣)는 |
- | 어담동(魚潭洞) 각곡(角谷) | + | 두었으니 셋째가 곧 공이시다. 고종(高宗) 갑오(甲午)(: 1894(一八九四)) 정월 삼일에 |
- | 잊으시고 자연(自然)과 빗을 삼아 편히 잠들어 계시도다.\\ | + | 목현(木峴)의 집에서 나시니 |
+ | 신중(愼重)하였다. 소시(少時)에 속됨을 가까이 하거나 비루(鄙陋)함의 실마리가 없었으며, | ||
+ | 7~8세에 배움에 나아가 족대부(族大父) 도사(都事)공께 수업함에 재사(才思)가 | ||
+ | 비범하여 수신제가(修身齊家)의 학문에서 이미 경학(經學)에 이름에 옛사람의 | ||
+ |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마음을 두었고, 학문을 | ||
+ | 주었으니, | ||
+ | 상상할 수 있다.\\ | ||
- | \_배(配)는 풍산류씨(豊山柳氏)며 구촌(龜村) 경심(景深) 후(后) 천우(天佑)의 따님이시다. | + | \_또 형제 4인이 공의 삼방(三房)에 거하며 백씨·중씨와 계씨에 이르기까지 이웃의 |
- | 슬하에 2(二)남 1(一)녀를 두었으니 장자(長子)는 병순(昞舜)이고 차자(次子)는 | + | 여러 선비들과 더불어 몸소 밭 갈고 학문을 독실히 함에 영화롭고자 함이 아니라 |
- | 병식(昞植)이며 서(婿)에는 김상원(金相元)이다. 병순(昞舜)의 남(男)은 철기(哲起) 성기(聖起) | + | 늙으막에 자신의 바탕으로 삼고자하는 묘책이었다. 가법(家法)을 닦아 |
- | 순기(順起) 성기(成起) 춘기(春起)며 서(婿)에는 조봉규(趙鳳圭) 권춘경(權春景)이다. | + | 취적헌(取適軒)의 남은 |
- | 병식(昞植)의 남(男)은 기일(起一) 기훈(起勳)이며 서(婿)에는 정재식(鄭在植) | + | 족장(族丈)에게 질의(質疑)하여 늙어 존성(存省)하는 부적으로 삼았으니 |
- | 조상래(趙相來)이고 녀(女)는 춘연(春蓮)이다. 증손(曾孫) 이하는 생략하노라.\\ | + | 가법을 보존하고 지킴을 |
- | \_효(孝)는 백행(百行)의 근본(根本)이며 적선(積善)은 후손의 근원(根源)이라 했는데 | + | \_광복후 기사(1989(一九八九))년 9(九)월 1(一)일에 어쩔 수 없이 돌아가시니 향년이 |
- | 필히 후손이 | + | 96(九十六)이었다. 목현(木峴)의 후산(後山) 갑자(甲子)에 장사지내니 유인(孺人)과 쌍봉이다. |
+ | 배 단양우씨(丹陽禹氏)는 성원(聖源)의 따님으로 2(二)남 6(六)녀를 두었으니 | ||
+ | 남은 창기(彰起)·윤기(允起)며 여는 영양(英陽) 남상경(南相璟)·청주(淸州) 한일원(韓一元)·나주(羅州) 정해창(丁海昌)·해주(海州) 오세현(吳世鉉)·경주(慶州) 최덕환(崔德煥)·영양(英陽) 남도희(南度禧)에게 시집갔다. | ||
+ | 손자 석대(錫汏)는 맏이의 소생이요, | ||
- | \_재종숙(再從叔) 영구(英九)와 방예손(傍裔孫) 현우(鉉禹) 등(等)의 권유로 | + | \_공께서는 뭇 사람 보다 뛰어난 자질과 성품으로 정도(正道)를 지키고 조선(祖先)의 |
- | 행적비(行績碑)를 세울 것을 결심(決心)했다면서 공(公)의 차자(次子) 병식(昞植氏)씨가 | + | 여택(麗澤)(: 학문(學問)을 닦고 수양(修養)에 힘씀)에 잠심(潛心)하여 세덕(世德)을 후손에게 |
- | 은포공(垠浦公)의 행장(行狀)을 가져와 졸렬(拙劣)한 나에게 부탁하니 어찌 | + | 남겨주었으니 후손을 교화(敎化)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 | 심중(心中)을 헤아려 다 기록(記錄)하겠는가. 다만 | + | |
- | \_\_서기(西紀) 1999년(一九九九年) 기묘(己卯) 10월(十月) 일(日)\\ | + | \_어느날 |
- | \_\_완산(完山) 유건기(柳建基) 근찬(謹撰) | + | 부탁하기에 |
+ | 시말(始末)을 서술하고 이어서 명(銘)하노니,\\ | ||
+ | \\ | ||
+ | 뿌리가 깊으면 잎은 마땅히 무성하고, | ||
+ | 어찌 소신(小臣)이라 이르겠는가, 후손이 바야흐로 상서(祥瑞)로운데.\\ | ||
+ | 낙동강을 거슬려, 목현(木峴) 양지녁. \\ | ||
+ | 우뚝한 사척(四尺) 봉우리는, 공께서 형체를 감추신 곳이로다.\\ | ||
+ | 이 사실을 금석(金石)에 새겨, 천년토록 밝게 보이노라.\\ | ||
+ | \\ | ||
+ | \_\_정축(丁丑)(: 1997(一九九七))년 월\\ | ||
+ | \_\_종후인(宗后人) 세섭(世燮) 삼가 글을 짓노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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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32-034.1749336814.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6/08 07:53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