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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9-021 [2025/06/19 20:59] – ssio2 | c9-021 [2025/06/19 20:59] (현재) – ssio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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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明\\ 후명|:::|弼復\\ 필복|:::| | | |:::|:::|:::|:::|:::|:::|後明\\ 후명|:::|弼復\\ 필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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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후면 현ㄷ토\\ | 비 후면 현토\\ |
공(公)은 평해황씨(平海黃氏) 온인(溫仁)의 14세손(十四世孫)이며 휘 징(諱澄) 진사(進士)요. 4세(四世)는 휘 용(諱𤨭)이요 고려조(高麗朝) 숭록대부삼중대광보국(崇祿大夫三重大匡輔國) 시 충경공(謚忠敬公)이고, 8세(八世)는 휘 희석(諱希碩)이요 조선조(朝鮮朝)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숭록대부(崇祿大夫)이며 봉 평해군(封平海君) 증 우의정(贈右議政) 시 양무공(謚襄武公)의 6대손(六代孫)이다. 공(公)의 5대조(五代祖)는 휘 린(諱麟) 자헌대부(資憲大夫) 예조판서(禮曹判書)이고, 고조(高祖)는 휘 보조(諱甫祖) 정헌대부(正憲大夫) 형조참판(刑曹參判)이며, 증조(曾祖)는 휘 건중(諱建中) 감사(監司)요, 조(祖)는 휘 처손(諱處孫) 판관(判官)이고, 선고(先考)는 휘 덕향(諱德香) 진사(進士) 참봉(參奉)이요 선비(先妣)는 연안이씨(延安李氏)며, 공(公)은 차자(次子, 연(淵)ㆍ징(澄)ㆍ청(淸)ㆍ염(濂))로 강원도(江原道) 고성군(高城郡) 거진읍(巨津邑)에서 탄생(誕生)하신 후 인조(仁祖) 13년(十三年) 을해(乙亥) 서기 1635년(西紀 一六三五年) 당시 32세(三十二歲)의 청장기(靑壯期)에 강릉군(江陵郡) 기풍방(岐豊坊) 평촌리(坪村里) 성황동(成黃洞)에 이거(移居) 후(後) 진사시(進士試)에 급제(及第)하여 가문(家門)은 번창(繁昌)하고 대성(大成)하였다. 비(妣)는 의인(宜人) 봉화이씨(奉化李氏)로 2남(二男) 중(中) 장남(長男)은 예남(禮男)이며 비(妣)는 정부인(貞夫人) 전주이씨(全州李氏)로 묘(墓)는 성황동(成黃洞) 고위묘(考位墓) 동원(同原) 우편(右便) 갑좌(甲坐)에 합폄(合窆)하고, 차자(次子)는 희남(禧男)으로 비(妣)는 수원백씨(水原白氏)며 사인(士人) 만걸(萬傑) 여(女)로 경북(慶北) 의성군(義城郡) 안사면(安寺面) 신수동(新水洞) 법방산(法防山) 해좌(亥坐)에 합폄(合窆)하였다. 솔하(率下) 장자(長子) 예남(禮男)의 손(孫)은 봉평(蓬坪)의 근원(根源)이요, 차자(次子) 희남(禧男)의 손(孫)은 의성(義城)의 초석(楚石)이라, 공(公)의 후덕(厚德)에 손(孫)은 번성(繁盛)하여 국가(國家)의 동량지재(棟梁之材)를 무수(無數)히 배출(輩出)하는 명문일가(名門一家)를 이루었다. 오대산(五臺山) 정기(精氣)를 이어받어 봉황(鳳凰)이 울며 영기(靈氣)로운 성황동(成黃洞) 기숡에 요호(龍虎)를 등에 업고 잠드신 공(公)의 유지(遺志)를 천세(千歲)까지 빛내기 위하여 후손(後孫)들은 거룩한 비(碑)를 한마음 한뜻으로 건립(建立)하고 추모(追慕)하면서 영원(永遠)한 명복(冥福)을 빕니다.\\ | 공(公)은 평해황씨(平海黃氏) 온인(溫仁)의 14세손(十四世孫)이며 휘 징(諱澄) 진사(進士)요. 4세(四世)는 휘 용(諱𤨭)이요 고려조(高麗朝) 숭록대부삼중대광보국(崇祿大夫三重大匡輔國) 시 충경공(謚忠敬公)이고, 8세(八世)는 휘 희석(諱希碩)이요 조선조(朝鮮朝)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숭록대부(崇祿大夫)이며 봉 평해군(封平海君) 증 우의정(贈右議政) 시 양무공(謚襄武公)의 6대손(六代孫)이다. 공(公)의 5대조(五代祖)는 휘 린(諱麟) 자헌대부(資憲大夫) 예조판서(禮曹判書)이고, 고조(高祖)는 휘 보조(諱甫祖) 정헌대부(正憲大夫) 형조참판(刑曹參判)이며, 증조(曾祖)는 휘 건중(諱建中) 감사(監司)요, 조(祖)는 휘 처손(諱處孫) 판관(判官)이고, 선고(先考)는 휘 덕향(諱德香) 진사(進士) 참봉(參奉)이요 선비(先妣)는 연안이씨(延安李氏)며, 공(公)은 차자(次子, 연(淵)ㆍ징(澄)ㆍ청(淸)ㆍ염(濂))로 강원도(江原道) 고성군(高城郡) 거진읍(巨津邑)에서 탄생(誕生)하신 후 인조(仁祖) 13년(十三年) 을해(乙亥) 서기 1635년(西紀 一六三五年) 당시 32세(三十二歲)의 청장기(靑壯期)에 강릉군(江陵郡) 기풍방(岐豊坊) 평촌리(坪村里) 성황동(成黃洞)에 이거(移居) 후(後) 진사시(進士試)에 급제(及第)하여 가문(家門)은 번창(繁昌)하고 대성(大成)하였다. 비(妣)는 의인(宜人) 봉화이씨(奉化李氏)로 2남(二男) 중(中) 장남(長男)은 예남(禮男)이며 비(妣)는 정부인(貞夫人) 전주이씨(全州李氏)로 묘(墓)는 성황동(成黃洞) 고위묘(考位墓) 동원(同原) 우편(右便) 갑좌(甲坐)에 합폄(合窆)하고, 차자(次子)는 희남(禧男)으로 비(妣)는 수원백씨(水原白氏)며 사인(士人) 만걸(萬傑) 여(女)로 경북(慶北) 의성군(義城郡) 안사면(安寺面) 신수동(新水洞) 법방산(法防山) 해좌(亥坐)에 합폄(合窆)하였다. 솔하(率下) 장자(長子) 예남(禮男)의 손(孫)은 봉평(蓬坪)의 근원(根源)이요, 차자(次子) 희남(禧男)의 손(孫)은 의성(義城)의 초석(楚石)이라, 공(公)의 후덕(厚德)에 손(孫)은 번성(繁盛)하여 국가(國家)의 동량지재(棟梁之材)를 무수(無數)히 배출(輩出)하는 명문일가(名門一家)를 이루었다. 오대산(五臺山) 정기(精氣)를 이어받어 봉황(鳳凰)이 울며 영기(靈氣)로운 성황동(成黃洞) 기숡에 요호(龍虎)를 등에 업고 잠드신 공(公)의 유지(遺志)를 천세(千歲)까지 빛내기 위하여 후손(後孫)들은 거룩한 비(碑)를 한마음 한뜻으로 건립(建立)하고 추모(追慕)하면서 영원(永遠)한 명복(冥福)을 빕니다.\\ |
\_\_서기 2001년(西紀二○○一年) 음10월 2일(陰十月二日)\\ | \_\_서기 2001년(西紀二○○一年) 음10월 2일(陰十月二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