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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9-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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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9-025 [2026/09/22 10:10] – 만듦 ssio2c9-025 [2026/09/23 20:59] (현재) – ssi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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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은공 황하흠 행장(稼隱公 黃夏欽 行狀)=== ===가은공 황하흠 행장(稼隱公 黃夏欽 行狀)===
-<WRAP 42em justify>+<WRAP 37em justi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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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 Batang, AppleMyungjo, serif>+<ff Batang, AppleMyungjo, serif>趍
 <typo fs:1.2em; lh:1,5em> <typo fs:1.2em; lh:1,5em>
 **稼隱黃公行狀**\\ **稼隱黃公行狀**\\
-黃氏之貫平海出身自新羅謹學士洛其鼻祖也 本朝有諱希碩以開國功封府院君諡襄武自是珪笏相承中世諱德弼號詠而始居靑鳧生諱元兆號羞菴於公五世以上也高祖曰彩文贈寺正曾祖曰昌大贈參贊祖曰喜鍾贈戶判考曰載坤壽陞中樞妣恩津宋氏秉燮女 哲宗壬戌三月某甲生公于靑雲里第諱應錫字孝若兄弟二人公居秀氣稟淳朴才性寬厚甫受學于萬隱伯公而粗知義方云篤孝父母侍側不離維悅親義爲日用事而日復一日少不解弛和愉之色恍然形於面柔溫之聲翕然發於言語莫非天出而自然也 課農幹務而備供甘而用天之道因地之利溢愼節成就養左右有隱無方臾水而漁費爲度閣之需臾山而樵炊給堂室之溫時累而日蓄月貯而歲積晨昏之奉朝夕之具未嘗忘于己而察諸身少無矯揉造爲之狀言雖分處幷室食不能先於口衣不得先於身自家機杼之出田園之物鎬釜之味一不敢自私而隣比之饋親戚之幣城市之珍必獻其親而藏之待乏自由見信於人而與其兄弟相處一被連業無宿怨而無僞嘉有事則必問於謀成有味則必同於共餐始終無違一於孝悌 聞其古今賢孝子弟嘉言善行則記之以不忘踐之有造言非孝悌則不口行非孝弟則不趍緖其本然之天而覺其良知行其良能物物平繩事事緖度三百閭閻十百童冠咸曰孝子稱言公年〇數十而歲値壬辰某丁內艱哀毁過半踰月求山安厝未定爲請地師曰吉地乃積善人所得而如我喪人則徒爲母氏體魄之便安處取己云云其時所與地師感其言激其誠不得任諸意決之踏山日久誠力至勤山日丁午凶鳥弔其喪子而告吉啞啞而去地師怪其鳥而親其翔下處則可謂地秘之穴瞠然而揖日余多點穴來始有見此云云天必使斯人身在凶疾之中而鑒其誠神及處以示其明徵乎及其襄禮之日役塋等輩弔喪賓明無不悅服而願表其情實于時大人公在其位而止之曰夫烏之啼樂如孝非常何指此子所以乎盛論直爲我而亦誤吾兒〇抑亦家庭之規必由自來矣聞世稱黃處士㶅晩翠翁公之傍先也〇彼青中有黃豈非斯翁之德之始也哉 免闋三年後事其大人公尤致服勤至死不懈口有三問之節而曰安則喜動於面若曰否則憂懣於己夜以禱天晝以祈山請身願代嘗糞自試誠必復其常而止之此乃人子之當爲而世級日降民鮮久矣其能强勉而能之乎 六年丁酉某丁外艱其前日親病差有減勢而公方釋慮擬以出外之意放于洞門則庭狗猝然吠走而報凶天不使斯人己存平易之間而奈其精力逼處以示其閔極乎免經歛襄後父兄諸親願成而方說呈官之議公泫然環願曰前喪之時吾大人之說有若聽信則今此大人之喪又發此論如爲吾而反僖吾親〇自處之道亦由所受也 見述其家狀萬隱公公之伯康也吁嗟乎有時兄有時弟豈非公家之法之刱也哉其後禮成無憾而其畢公自身專力於耕稼而隱迹於雲山之中故而稼隱爲號也 庚戌三月某甲以疾終于居第享四十九葬于南柯村細谷壬向之原配坡平尹氏通政光宗女合祔子悳潤道潤女林永洛林在賢悳潤四男一女觀模復模艮模恒模女幼道潤三男東模西模南模餘幼不錄 鳴呼公以寬朴之姿良知之能自成乎百行之源而有始有終一於孝而以至動天激物所以見於日用之問者無孝出於儒家之模範夫豈無所本而能如是哉 公沒後三十餘載而家狀褒彰稧帖序墓碣銘等券數年編成於是乎忠厚之德著於鄕仁孝之政施於家上有壽〇西樞恩榮溢於泉壤下及慶流後毘蘭玉〇於庭砌則天之所以善人是耶公之長子悳潤甫以感慕之誠屢請余叙次之役辭之不得乃按据遺事而第錄如右以塞孝子之請\\ +<wrap hanmun> 
- +黃氏之貫平海出自新羅漢學士洛其鼻祖也至 本朝有諱希碩以 
-甲戌秀葽節完山柳東夔 謹書+開國功封府院君 諡襄武自是珪笏相承中世諱德弼號詠而始居靑 
 +鳧生諱元兆號羞菴於公五世以上也高祖曰彩文贈寺正曾祖曰昌 
 +大 贈參贊祖曰喜鍾 贈戶判考曰載坤壽陞中樞妣恩津宋氏秉燮 
 +女 哲宗壬戌三月某甲生公于靑雲里第諱應錫字孝若兄弟二人公 
 +居季氣稟淳朴才性寬厚甫受學于萬隱伯公而粗知義方云篤孝父母 
 +侍側不離怡悅親意爲日用事而日復一日少不懈弛和愉之色恍然形於面 
 +柔溫之聲翕然發書言語莫非天出而自然也課農幹務而備供甘而用天之道因 
 +地之利謹愼節制就養左右有隱無方或水而漁費爲庋閣之需或山而樵炊 
 +給堂室之溫時累而日蓄月貯而歲積晨昏之奉朝夕之具未嘗忘于心而察諸 
 +身少無矯揉造爲之狀焉雖分處異室食不能先於口衣不得先於身自家 
 +機杼之出田園之物鍋釜之味一不敢自私而隣比之饋親戚之幣城市之珍必獻其親 
 +而藏之待乏自由見信於人而與其兄弟相處一被連業無宿怨而無僞喜有 
 +事則必問於謀成有味則必同於共餐始終無違一於孝悌聞其古今賢 
 +孝子弟嘉言善行則記之以不忘踐之以有造言非孝悌則不口行非孝弟則 
 +不趨循其本然之天而覺其良知行其良能物々平繩事々循度三百閭閻十百 
 +童冠咸曰孝子稱焉公年纔數十而歲値壬辰某甲丁內艱哀毁過制踰月 
 +求山安厝未定爲請地師曰吉地乃積善人所得而如我喪人則徒爲母氏體 
 +魄之便安處取己云々其時所與地師感其言激其誠不得任諸意決之踏 
 +山日久誠力至勤山日正午凶鳥弔其喪子而告吉啞々而去師怪其鳥而親其翔 
 +下處則可謂地秘之穴瞠然而揖曰余多點穴來始有見此云天必使斯人身在凶疾 
 +之中而鑒其誠神及處以示其明徵乎及其襄樹之日塋役等輩遠外賓明無不 
 +悅服而欲表其情實于時大人公在其位而止之曰夫烏之啼集如或非常何指此 
 +子所以乎盛論直爲我而亦誤吾兒爾抑亦家庭之規必由自來也夫世稱黃處 
 +士㶅晩翠翁公之傍先也噫彼靑中有黃豈非斯翁之德之始也歟旣闋三年後 
 +事其大人公尤致服勤至死不懈日有三問之節而曰安則喜動於面若曰否則憂懣 
 +於心夜以禱天晝以祈山請身欲代嘗糞自試誠必復其常而止之此乃人子之當 
 +爲而世級日降民鮮久矣其能强勉而能之乎六年丁酉某甲丁外艱其前日親病差 
 +有減勢而公方釋慮擬以出外之意放于洞門則庭狗卒然吠走而報凶天不使斯人 
 +心存平易之間而察其情力逼處以示其閔極乎旣經歛襄後父兄諸親欣感而方說 
 +呈官之議公泫然環顧曰前喪之時吾大人之說有若聽信則今此大人之喪又發此論如 
 +爲吾而反背吾親爾自處之道亦由所受也夫述其家狀者萬隱公公之伯康也吁此 
 +有時兄有時弟豈非公家之法之刱也歟其後禮制無憾而已畢公自身專力於耕稼 
 +而隱跡於雲山之中故而稼隱爲號也庚戌三月某甲以疾終于居第享四十九葬于 
 +南柯村細谷壬丙之原配坡平尹氏通政光宗女合祔子悳潤道潤女林永洛林在賢 
 +悳潤四男一女觀模復模艮模恒模女幼道潤三男東模西模南模餘幼不錄嗚呼公 
 +以寬朴之姿良知之能自成乎百行之源而有始有終一於孝而以至動天格物所以見 
 +於日用之間者無或出於儒家之模範夫豈無所本而能如是哉公沒後三十餘載 
 +而家狀褒彰稧帖序墓碣銘等券數年內編成於是乎忠厚之德著於鄕仁孝之 
 +政施於家上有壽躋西樞恩榮溢於泉壤下及慶流後昆蘭玉滿於庭砌則天之 
 +所以報施善人是耶曰公之長子悳潤甫以感慕之誠屢請余敍次之役辭之不得乃按 
 +据遺事而第錄如右以塞孝子之請\\ 
 +</wrap> 
 +  鮮曆甲戌秀葽節完山柳東夔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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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ypo ff:'바탕'; fs:1em; lh:1.5em> <typo ff:'바탕'; fs:1em; lh:1.5em>
-**가은황공행장((이 행장은 청송군 청송읍 송생리에 살던 학남 류동기(鶴南 柳東蘷) 선생이 1934년(갑술년)에 지은 것이다. 한지에 붓글씨로 썼으며, 크기는 가로 109.6㎝, 세로 43.7㎝이다. 주손 황병상이 선대로부터 물려받아 표구하여 소장하고 있다. ))**\\+**가은황공행장((이 행장은  
 +청송군 청송읍 송생리에 살던 학남 류동기(鶴南 柳東蘷) 선생이  
 +1934년(갑술년)에 지은 것이다. 한지에 붓글씨로 썼으며, 크기는 가로 109.6㎝, 세로 43.7㎝이다.  
 +주손 황병상이 선대로부터 물려받아 표구하여 소장하고 있다. ))**\\
  
-공의 휘는 극일(克一)이며 자는 복원(復元)으로 평해의 저명한 집안이다. 학사 휘 황락(黃洛)의 후손 개국일등좌명공신 평해부원군((실제로는 개국 2등공신이며, 평해군(平海君)이다(황병상 주).)) +\_황씨의 관은 평해(平海)니 신라로부터 났으며 근학사 락(洛)이 그 시조이다.  
- 양무공(襄武公) 휘 희석(希碩)의 팔대손이다. 증조의 휘는 후만(後萬)이며, 조부는 휘 덕필(德弼)인데 통정대부이다. 아버지 휘는 원기(元奇)인데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이며, 어머니는 울진장씨 홍원(弘遠)의 따님이다.\\+본조(조선조)에 휘 희석(希碩)은 개국공신으로 부원군에 봉을 받고  
 +시호는 양무(襄武)이시다. 이로부터 벼슬을 서로 이어왔다.  
 +중세 휘는 덕필(德弼) 호는 영이(詠而)며, 처음으로 청부(청송)에 살았고,  
 +아들의 휘는 원조(元兆)며 호는 수암(羞菴)이며 공의 5세 이상이라.  
 +고조는 채문이며 증사정이며, 증조는 창대며 증참찬이며,  
 +조는 희종이며 증호판이며, 아버지는 재곤이며 수승(壽陞) 중추(中樞)이며, 어머니는 은진송씨 병섭의 따님이다.\\
 \\ \\
-숭정 경자년 12월 27일 부치(府治)((부치(府治) : 부(府)의 소재지.)) +\_철종 임술(壬戌)(( 1862년이다.)) 
- 내 송생리(松生里) 집에서 공이 태어났다. 겨우 일곱 여덟 살부터 놀이하는 것이 범상하지 않고 기개가 뛰어났다. 서사(書史)를 힘써 기억하였고 병서까지 정통하였다. 이에 문(文)을 버리고 무(武)를 취하여 이미 세상에 쓰일 뜻을 품고 있었다. 일찍이 마문연(馬文淵)((마문연(馬文淵) : 문연은 후한 때의 장군 마원(馬援, 기원전 14~49)의 자이다(노성두 주). ))의  + 3월 모갑에 공이 청운리재(( 경북 청송군 청송읍 청운리이다.))서 났으니,  
-과시(裹屍)((과시(裹屍) : 마원이 “대장부는 변방 싸움터에서 죽어 말가죽에 시체가 싸여 돌아올 뿐 어찌 병석에 누워 아녀자의 손에서 죽겠는가.”라고 하며 다시 흉노(匈奴)와 오환(烏桓)을 정벌하러 떠났다고 한다(노성두 주).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실려 있다(황씨중앙종친회, 1973: 194).))에  +휘는 응석(應錫)(( 족보상의 휘는 하흠(夏欽)이다. 조선 개국공신  
-대한 설과 윤길보(尹吉甫)((윤길보(尹吉甫) : 주 선왕(周宣王) 때 북벌(北伐)을 담당한 장군이다(노성두 주).))의  +양무공 황희석 장군의 18세손이다.))이요, 자는 효약(孝若)이며,  
-만방위헌(萬邦爲憲)((만방위헌(萬邦爲憲) : 《시경(詩經)》 소아(小雅) 유월(六月) 에 “문무를 겸비한 장군 윤길보여, 그야말로 만국의 법도가 되리로다[文武吉甫 萬邦爲憲]” 하였다(노성두 주).))에  +형과 동생 둘이었다. 기품이 순박하고 재성이 관후하고 어려서  
-대한 구절을 읽고는 무릎을 치면서 탄복하며 말하기를, “대장부는 살아도 이처럼 살아야 하고 죽어도 이처럼 죽어야 한다.”고 하였다. \\+만은(萬隱) 백공(큰아버지)에 글을 배워서 일찍이 의방(義方)을 알았다.  
 +부모에게 효도를 돈독히 하고 부모의 곁을 떠나지 않으며  
 +오직 부모의 뜻을 즐겁게 하였으며 하루 할 일을 매일 하루 같이  
 +고하는 것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아니하고, 부드러운 빛으로 순하고  
 +황홀한 모습을 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용하게 말씀을 올리니  
 +하늘이 내린 군자라 아니하지 못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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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21살에 경신년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숭정 병자년 겨울에 오랑캐가 노략질을 하자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파천을 하여 국가의 위급함이 조석에 달렸다. 공은 강개하여 몸을 떨쳐서 어버이에게 고하기를, “지금 종사가 매우 어려워 임금이 몽진을 하고 있는 상황이므로 신자(臣子)로서 마땅히 적개심을 가질 때입니다. 더구나 무과를 통해 발신하였으니, 개미같은 미미한 정성이라도 다 바치고 나라와 함께 사생을 같이해야 할 때입니다.” 하고는 마침내 칼을 뽑아들고 서쪽으로 가서 상국(相國)((상국(相國) :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통틀어 이르는 말(표준국어대사전).)) +\_과농(課農)을 하고 여가가 있으면 부모에게 드릴 음식을 준비하고  
- 이완(李莞)((행장에 있는 ‘이완(李莞)’이라는 한자 표기는 잘못된 것이다. 이완(李浣)이 맞다(황병상 주). 1602년(선조 35년)에 태어나 1624년(인조 2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평안도병마절도사를 거쳐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의 별장(別將)으로 출전해 정방산성(正方山城)을 지켰는데, 적을 동선령(洞仙嶺)으로 유인해 복병을 이용해 크게 무찔러 공을 세웠다. 효종이 북벌을 추진하면서 북벌의 선봉부대인 어영청의 대장이 된 후 훈련대장을 겸직하였고, 1674년(현종 15년) 5월에 우의정에 제수되었다가 6월에 별세하였다. 시호는 정익(貞翼)이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하늘의 이치를 따라 땅으로 인한 이 일의 비결을 성취하여 좌우에게  
-따라 한 마음으로 보좌하고 계획하여 호휘하는 공로가 매우 많았으므로 조정에서 공에서 선략장군 훈련원권지봉사(宣略將軍 訓鍊院權知奉事)라는 벼슬로 포상하였다. \\+저축은 있으되 낭비는 없음을 가르쳤다.  
 +잠깐 강(江)에 가서 고기를 잡아 찬장에 반찬을 갖추어 놓고,  
 +잠깐 산에 가서 땔나무를 하여서 방이 따스하도록 불을 지피고,  
 +날로 모으고 달로 저축하여 해마다 모았고,  
 +새벽과 밤의 받듬과 조석으로 갖춤(음식)을 몸소 모든 것을 살펴  
 +조금도 실수가 없었다. 비록 방을 따로 거처하나 밥은 능히 먼저  
 +입에 넣지 아니하며, 새 옷은 몸에 먼저 입지 아니하며,  
 +집에 베틀을 놓아 베를 짜고, 들에서 나오는 물건과 솥에서  
 +만드는 음식(떡)을 한 번도 감히 미리 맛보지를 아니하고  
 +이웃에서 들어온 음식과 친척들이 보내온 예물과 시장에 나는  
 +진귀한 음식은 반드시 부모에게 드리고, 남은 것은 두었다가  
 +대접을 하며 스스로 사람들에게 믿음을 보이고,  
 +그 형제 간에 서로 한 곳에 살며, 한 농장을 지어도 원망이 없고  
 +거짓말을 하는 일이 없어, 반드시 의론을 물어 뜻을 이루고,  
 +같은 반찬을 같이 먹고 시종 한 번도 효도하고 공경함을 어긴 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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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성이 위태로움에 빠져서 한 손으로 강을 막을 수 없는 형세와 작은 막대기로 큰 집을 지탱할 수 없는 힘으로 성하지맹(城下之盟)((성하지맹(城下之盟) : 초(楚)나라가 교(絞)나라를 정벌할 때 술책을 써서 대패시킨 다음 교의 성 아래에서 항복의 맹약을 맺은 데서 나온 말로 청나라에 패배하여 조선이 굴욕적인 강화를 맺은 것을 말한다(노성두 주).))을  +\_그 옛적이나 지금이나 어진 자와 효자제와 가언과 선행을 들은즉  
-맺을 지경에 이르러, 공이 통곡하고 성을 나오자, 임금이 채선(綵線 오색실)으로 그의 손을 감싸고, 또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에 제수하여 그 어버이를 영광되게 하였으니 참으로 특별한 은전이었다. 본가에서는 공의 생사를 몰라 가동(家僮) 충립(忠立)이 가보기를 청하여 도중에 서로 만나본 즉 공의 두 발에 모두 행기(行器)((행기(行器) : 밖으로 나갈 때 가지고 가는 명기(明器)라는 정보가 있는데 자세한 것을 알 수가 없다(노성두 주).))를  +기록함은 지나온 자취를 잊지 않으려고 하는 것인데 말로 지음이 있음이라.  
-부착한 채 오고 있었다. 그의 충분액완(忠憤扼腕)((충분액완(忠憤扼腕) : 충의에 격분하여 주먹을 움켜쥠(노성두 주).))의  +효제(孝悌)가 아니면 입으로 행하지 말 것이며, 효제가 아니면  
-통절함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어서 행기를 밟고 있는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추서(덤비는 것)를 아니 하는 것이 그 본연일 것이다.  
 +하늘은 그 양지(良知)를 알 것이니 그 양능(良能)을 행하고  
 +만물을 평승(平繩)케하고 사물의 근본을 바로 잡는다면 삼백 고을의  
 +수 천명의 어른과 아이들이 모두 말하기를 효자라 칭할 것이로다. \\
 \\ \\
-천계(天啓) 5년(1625년)에 조정에서 공로에 보답하는 은전을 내렸으니, 원종기린제일인(原從麒麟第一人)의 상(賞)을 모두 기록하고, 이미 웅비불아심(熊羆不二心)의 신하로 정봉(定封)되자 이에 비로소 은총이 내려, 공에게 진무원종공신녹권(振武原從功臣錄券)을 내렸다.\\+\_공의 나이 겨우 수 십세 때 임진년(壬辰年)(( 1892년이다. 공이 31세 때이다.))에  
 +모부인(어머니) 상을 당하여 달이 넘도록 산지(장지)를 구하였으나  
 +모실 자리를 정하지 못하였다. 지사(地師 : 풍수)에 청해 가로되  
 +길지는 적선한 사람이 얻는 바라 나와 같은 상주는  
 +다만 어머니의 체백(體魄)이 편한 곳이면 쓰겠노라 하였다.  
 +그 때에 그 자리에 같이 있던 지사가 그 말에 감격하고  
 +그 정성에 격렬하여 마음대로 못하고 뜻을 결정하여  
 +산을 밟은 오랫동안에 정성을 다하여 부지런히 찾고 있었는데,  
 +해가 정오 때에 까마귀가 그 상주를 조문하듯이 아아 울면서  
 +길조를 고하는 것 같았다. 지사가 그 까마귀가 괴이하게 생각되어  
 +그 날아내린 곳을 가서 보니 가히 지비(地秘)의 혈당(穴瞠)이라.  
 +그러나 날마다 내가 많은 곳을 점혈을 하여 왔는데 비로소  
 +이에 자리가 있었음을 보는구나. 하늘이 반드시 이 사람의 몸이 병중에  
 +있는 중에 그 정성을 살피고 신(神)으로 하여금 이곳에 이르도록 한 것이  
 +그 밝게 증험을 보인 것이로다. 그 양례일 산역을 하는 사람들과  
 +조상 빙우들이 열복(기뻐함) 아니 하는 이가 없었고 그 정실을 표할려고  
 +할 때에 대인공(아버지)이 그 위치에 있다가 말려 가로되  
 +대개 까마귀는 울면서 즐기는 것인데 효(孝)라함은 떳떳하지 못하도다.  
 +어찌 이 자식의 소이라 가르치리요. 성론(盛論)은 곧 나를 위함이며  
 +또한 나의 아이들에게도 옳지 않은 일이라. 진실로 또한 가정의 예법을  
 +반드시 옛과 같이 이어 가리라 하였다.  
 +듣건데 세칭 황처사는 만취(晩翠) 황학(黃㶅)선생(( 황학(黃㶅) 선생은  
 +양무공의 15세손이자 영수당 황덕진공의 9세손이다.  
 +1758년(영조 34)에 태어나 1804년(순조 4)에 별세했다.  
 +조선 후기 유학자로 자(字)는 학중(學中)이고, 호는 만취동(晩翠洞)이다.  
 +경상북도 청송(靑松) 청운리에서 태어났다. 후암(厚庵) 권렴(權濂)의 문하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수학하였고,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의  
 +문하에서 <대학(大學)>과 <논어(論語)> 등을 수학하였다.  
 +학문과 사변(思辨)에 힘썼으며, 말과 행동을 신중히 하였다.  
 +배위는 영해박씨(寧海朴氏)이다. 묘는 경상북도 청송 나갈동(蘿葛洞)에 있다.  
 +문집으로 <만취동일고(晩翠洞逸稿)>가 있다.  
 +공이 강학하던 장소에 후손 황대손이 1843년에 건립한 만취서당(晩翠書堂)이 있으며,  
 +1847년에 공의 장수지소(藏修之所)에 세운 만취정(晩翠亭)이 있다(청운리 산35번지).  
 +공의 위패를 모신 송벽사(松碧祠)는 청송읍 송생리에 있다.))이  
 +방선(方先)이라. 탄식하도다 저 청중유황(푸른 가운데 누른 빛이 있다)이라 하더니  
 +어찌 이 옹(翁)의 덕의 비롯함이 아니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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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년 2월 19일 천수를 다하고 침소에서 돌아가시니 수명이 71살이었다. 묘는 부(府)의 소재지 안 북쪽 노래산(老萊山) 자좌(子坐) 언덕이다. 배위는 함안조씨 대익(大益)의 따님으로 공의 묘 왼쪽에 부장(附葬)하였다. 두 아들을 낳았으니 우청(遇淸)은 통정대부이며, 경청(慶淸)은 학생이다. 딸은 권진한(權震漢)에게 시집갔다. 우청의 아들은 광헌(光憲), 광수(光秀), 광혁(光赫)이며, 경청의 아들은 유헌(有憲), 신헌(信憲)이며, 권진한의 아들은 도규(道揆)이다. 증손 현손 이하는 약간의 명수가 있다. \\+\_상을 면한 후 3년 후 그 대인공(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더욱 슬픔을 참지 못하여 죽음에 이르게 되어도 쉬지 아니하였다.  
 +입으로 세 번 묻는 삼문의 절차가 있으니 가로되 편안한 즉  
 +기쁨을 얼굴에 나타내고 그렇지 아니하면 근심을 몸으로 번민하여  
 +밤에는 하늘에 빌고 낮에는 산에 빌어 내몸이 아픔을 대신하여  
 +달라고 청하고 대소변을 치우는데 정성을 다했으며 반드시  
 +그 평상시와 같이 깨끗이 하는데 정성을 다하는 것이 사람의 자식의  
 +당연한 도리이나 세덕이 날로 퇴폐해서 많은 사람 중에 이같은 사람은  
 +흔하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도다. 그 능히 힘쓰고 애쓰는 것이 거룩하지 아니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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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공의 8세손((실제로는 9세손이므로 오기(誤記)이다(황병상 주).)) +\_그 후 6년 정유(丁酉)(( 1837년이다. 공이 36세 때이다.))에  
- 경한(慶漢)이 그 아들 상룡(相龍)((황상룡은 1946년에 청송읍 청운마을에 있는 영이정을 이건할 때 영이정상량문(詠而亭上樑文)을 썼으며, 진무공의 10세 주손(胄孫)이다(황병상 주).))을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다. 그 전일 어버이의 병의 차도가 조금  
-시켜 녹권과 집안에서 전하는 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면서 말하기를, “우리 집안이 탕탁(蕩柝)을 겪어 자손이 영락하고, 선조들이 평소에 사용하던 갑옷과 활과 화살을 가묘(家廟)에 보관하던 것이 또 없어져서 보존하지 못하였으니, 하물며 여기 보여드리는 변변찮은 것이야 말할 게 있겠습니까? 선조의 자취가 날로 실추되는 것이 매우 두려워서 (후대에) 전할 수 있는 말씀 한마디를 구하여 후손들에게 보여줄 자료로 삼고 싶습니다.”하였다. 내가 문장에 능하지 못하니 어찌 감히 이 일을 하겠는가만 조상에게 효도하려는 간절함에 감동하여 사양하지 못하였다.\\+좋아지는 것 같아서 공이 쌀을 씻으러 동문 밖에 이르렀을 때  
 +집의 개가 갑자기 짖으면서 흉보를 전하였고 하늘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이미 평이지간(平易之間)에 있지 못하시니 어찌 그 정력이 다한 처지라  
 +그 민극(閔極)함을 보리요. 대렴을 마친 후 부형들과 모든 친척들이  
 +성복을 이룬 후 방향으로 관아에 올릴 의론을 하므로 공이 흔연히 돌아보고  
 +하는 말이 전상(前喪)의 때는 나의 대인의 말씀을 귀담아 들었는데  
 +이제 또 대인의 상에 또 이 의론을 발설함은 나를 위함이며  
 +나의 어버이도 기뻐하지 않으려니 옛 법도를 또한 이어 받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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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공이 그 직위를 얻고 그 재주를 발휘하였다면 옛날 끝없는 공을 세운 명장일지라도 이 경지를 넘어서지 못한다. 먼 시골구석의 외로운 몸으로 한손으로 어려움을 딛고 정성을 다하여 호가(扈駕)하며 험하고 어려움을 꺼리지 않았으니, 충(忠)이 지극한 것이요, 몸을 온전히 하여 집으로 돌아와서 정성을 다하여 부모를 모시고 처음부터 끝까지 서운함이 없게 하였으니, 효성이 지극한 것이다. 그러니 충과 효를 모두 겸한 것을 신명에게 물어 증명할 수 있다. 전하는 말에, “나무의 기운은 열매에 전하고, 사람의 기운은 후손에 전한다”고 하였으니, 공이 수립한 공은 양무공(襄武公)에게서 배태한 것이 아니라고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세대가 너무 멀어지고 증거 삼을 문헌이 없어져서 공의 행실을 수습한 것이, 솥 안의 고기 한 점((솥 안의 고기 한 점 : 원래는 《회남자(淮南子)》〈설림훈(說林訓)〉에, “한 점의 고기를 맛보고서 온 솥의 고기 맛을 안다.[嘗一臠肉, 而知一鑊之味.]”라고 한 데서 나왔다(노성두 주).))이나  +\_가장(家狀)을 지은 자 만은(萬隱)공은 공의 백강(큰아버지)이다.  
-구포(九苞)((구포(九苞) : ‘구포(九苞)’는 봉황의 아홉 가지 특징을 이르는 말로, 봉황의 별칭으로 쓰인다(노성두 주).))의  +아아 슬프도다. 이에 형이 있고 이에 아우가 있으니  
-터럭 한 개에 불과한 것이 백세토록 후손들의 유감이니, 반드시 큰 문장가가 나와서 채택하여 옛일을 논할 것이다.\\+어찌 공의 집의 법도의 창작이 아니리요. 그후 예성(禮成)을  
 +유감없이 마치고 공 자신이 농사에 힘을 다하고 운산(雲山)의  
 +속에 자취를 감춘 고로 가은(稼隱)이라 호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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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경술(庚戌)(( 1910년이다.)) 
 + 3월에 병으로 세상에 삶을 마치니 향년이 49세라.  
 +남아촌 세곡 임향원에 장사지내니 배 파평윤씨 통정대부(通政大夫)  
 +광종의 따님과 합봉을 했다.  
 +아들은 덕윤(悳潤)과 도윤(道潤)이며, 딸은 임영락, 임재현에 출가시켰다.  
 +덕윤에 4남 1녀가 있으니 관모, 복모, 간모, 항모, 딸은 어리다.  
 +도윤에 3남이 있으니 동모, 서모, 남모이며, 다음은 어려서 기록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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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오호라 공은 너그럽고 순박한 모습으로 양지로 훌륭함을 스스로 이루었음이라.  
 +백행의 근원으로 유시유종(처음부터 끝까지) 효성이 한결같아서 하늘이 감동하여  
 +사물을 격동시킨 소이에 이르렀다. 일용의 일을 부모에게 물어서  
 +행하는 것을 볼진대 효가 없이 어찌 유가의 모범이 될 수 있으며  
 +또한 어찌 근본이 없이 능히 이와 같이 되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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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공이 세상을 떠난 후 30여 년이 되어 가장과 포창(褒彰)(( 유림(儒林)의  
 +선비들이 공의 효행을 천거하여 1932년에  
 +'공부자성적도 속수 오륜 행실중간 연원  
 +유림향약본소'(孔夫子聖蹟圖 續修 五倫 行實重刊 淵源 儒林  
 +鄕約本所)에서 내린 포창완의문을 말하며, 공의 주손인 황병상이  
 +물려받아 소장하고 있다. 공의 효행을 기려 1966년에는 청운마을에 정효각(㫌孝閣)이 세워졌다.)),  
 +계첩서문, 묘갈명(墓碣銘) 등의 문서를 수년간 편성하여 이에 이르렀음이라.  
 +충후한 덕을 마을에 펴고 인과 효를 가정에 베풀어 위로 수제와 서추(西樞)를 두고  
 +은혜와 영화는 천양(저승)에 가득 차서 아래로 경사가 후곤(後昆)에 흘러서  
 +자손이 뜰에 가득 찼으니 하늘이 내린 선인(善人)이 아니겠는가.  
 +공의 장자 덕윤군이 감모(感慕)의 정성을 여러 번 나에게 청하는지라  
 +서차의 일을 사양하였으니 얻지 못하고 이에 유사를 안을 하여  
 +위와 같이 기록하여 효자의 청에 답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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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_갑술(甲戌)(( 1934년이다.)) 
 + 수요절(秀葽節) 
 +완산(完山) 류동기(柳東夔)(( 류동기 선생은 자(字)가 선초(善初), 호는 학남(鶴南)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883년(고종 계미년)에 태어나 1968년에 돌아가셨다(향년 86세). 아버지는 천산재 류연호(天山齋 柳淵好) 선생이다. 손자인 류남기(柳湳基) 선생이 2008년에 학남선생의 글을 모아 펴낸 학남유고(鶴南遺稿)가 있다. 학남선생은 140수의 시가 담긴 시집을 남긴 황간모(黃艮模, 가은 황하흠 공의 손자) 선생의 스승이기도 하다. 현재 송생리에 류남기 선생이 살고 있으며, 지금도 후손들 간에 왕래가 있다.)) 
 + 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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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전행청송부사 평산 신관조 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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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번역원 노성두 번역, 정책학박사 황병상 수정 (2024.2.19.)\\+전(前) 청송문화원 원장 심명택(沈明澤) 번역\\ 
 +가은공 5세 주손(胄孫), 한국기술혁신학회 회장 황병상(黃昞相) 교정,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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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9-025.1790039402.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6/09/22 10:10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