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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해황씨대동보 문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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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대동보서(庚戌大同譜序) (1850년)=== <WRAP 35em justify><hidden \_한문 원문 보기> <typo ff:'한양해서'> \_庚戌大同譜序\\ 吾姓之著箕鄕古矣譜板之在豊城久矣世代寢遠系牒無傳則派分而支流者殆未免 汾陽錯認之患後孫之責寧有甚於此時者哉粵在辛卯春川宗承旨燾氏設新譜于京 城之華藏寺而舊譜諸宗之多不入以箕豊兩派之俱不與也噫當日支吾者安知復有 今日者乎迺於戊申秋錦陽宗人發書示意是蓋不謀而合者遂設譜于豊取仍舊也維 我箕黃之盛際美績已備於前人之述今不必加屋疊床而學士公桴海錄出於東漢時 事凡貫箕而族黃者至今爲疑信古蹟近見族善宗大中家籍牒中唐朝學士八世配位 墓所不啻昭著今依此改正是則先世所未發之事似不免率爾之責然旣有信籍烏可 已也遂錄于世譜中以爲傳後辨破之蹟未知後世雲仍庶或賴此而益詳於數千載之 下乎蓋譜冊合爲三卷而始春終夏僉君子幹敏之功此可想矣今其主幹宗憲周甫卽 錦翁胄孫而號農隱者也精於譜學又能繼述先志著重刊記文事未就身先逝吾宗不 幸抑何知也不侫居在姓貫之鄕當窮助讐校之役老不能自力於越重嶺到岝㠋遂因 其所感之懷而略敍顚末且道我貫鄕不可無一語云爾\\ \_\_歲上章閹茂流頭月日裔孫龍九謹序 </typo> </hidden> \\ <typo ff:'바탕'; fs:0.8em; lh:1.5em> \_경술대동보서\\ \_우리 성(姓)씨가 평해(平海)에 뚜렷이 나타난 지가 오래되었다. 또한 보책의 목판(譜板)이 풍기에 있게된 것이 오래 되었다. 세대가 점차 멀어져서 보첩이 전하는 것이 없었으니 파가 나누어지고 지파가 갈려나간 것이 분양강(汾陽江)((분양왕(汾陽王)의 오류: 부록 곽자의 참조))이 서로 엇갈려 분간하기 어려운 것처럼 서로 조상과 파계를 모르게 되는 환난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_이러니 후손이 그런 것을 밝히지 못한 책임이 어찌 이때 보다 더 심한 때가 있었으리오.\\ \_지난 신묘년(1831(一八三一))에 춘천에 사는 종친인 승지(承旨) 벼슬한 도(燾)씨가 서울의 화장사(華藏寺)에 새로 보청을 설치했는데 옛 족보에 실렸던 여러 종친들이 거기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평해의 종친과 풍기의 종친 두 파들은 거기에 참여하지 아니한 까닭이었다.\\ \_아! 그 당일에 서로 엇갈리는 사람들이 어찌 다시 오늘날에도 있을 줄을 알았으리오. 이에 무신년(1848(一八四八)) 가을 금양에 사는 종인이 서신을 발송하여 뜻을 보였으니 이것은 대개 상의하지 않아도 다 뜻이 합쳐 동의하게 되는 것이었다. 드디어 풍기에다 보청을 설치하였으니 이는 옛 전례를 그냥 취한 것이다.\\ \_우리 평해 황씨가 성대하게 제우(군신간에 잘 만나는 것)한 아름다운 공적은 앞 사람 등의 서술에 잘 갖추어져 있으니 이제 구태여 옥상가옥으로 중언부언하여 더 보탤 것이 없겠다.\\ \_학사공이 바다에 뗏목을 타고 왔다는 부해록(桴海錄)이 동한(東漢) 때에 나온 일이었으니 무릇 관향을 기성(평해)으로 쓰고 일가를 황(黃)이라고 성씨를 쓰는 사람은 이제까지도 반신반의하는 고적(古蹟)으로 여기고 있다. 근래에 정선의 종친인 대중(大中)의 집 가적(家籍) 문적을 보니 그 보첩 가운데 당나라의 조정의 학사공 8(八)세 배위(配位)의 묘소가 뚜렷하게 의심할 나위 없이 나타났으니 지금 여기에 의하여 개정을 하노니 선세(先世)에 이것을 발견하지 못한 바의 일이다. 이것이 너무 경솔하다는 책망을 면하지 못할 것 같으나(옛날에 없었던 것을 지금에 왜 넣느냐는 점에서) 그러나 이미 믿을 만한 전적이 있으니 어찌 아니할 수 있으리오. 드디어 세보 중에 그것을 기록하여 그렇게 함으로써 뒤에 전하여 분변하여서 의혹을 깨뜨려 버리는 자취를 삼노니 알 수는 없으나 후세의 자손들이 혹시 이것에 힘입어 수 천년 아래에서 더욱 상세하게 할 수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_대개 보첩이 합쳐서 3(三)권이 되었는데 봄에 시작하여 가을에 끝맺게 되었다. 여러 군자들이 민첩하게 노력한 공을 여기에서 상상할 수 있다. 이제 주간한 종친 헌주(憲周)씨는 즉 금계옹(錦溪翁)의 종손(宗孫)인데 호를 농은(農隱)이라고 하였다. 그는 보학에 정통하고 또 능히 선대의 뜻을 계승하여 중간기문(重刊記文)을 저술하려고 했는데 일이 아직 이루어지기 전에 먼저 죽었으니 우리 종중의 불행함이 또한 생각건대 어떠하겠는가.\\ \_내가 우리 황씨 관향인 평해에 살고 있어서 내가 마땅히 몸소 교정의 일을 도와야 할 것이나, 늙어서 스스로 거듭 재(嶺)를 넘어 산 높고 험악한 곳에 도달할 수 없었다.\\ \_드디어 느낀 바의 감회를 인하여 간략하게 시종(始終)을 서술하였으니 우리 관향을 말함에 한마디 말이 없을 수 없다고 여겨 이에 적노라.\\ \_\_경술(庚戌)년(1850(一八五○)) 6월(流頭月) 일 후손 용구(龍九)는 삼가 서(序)를 짓는다. </typo> </WR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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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28 07:22 저자
ssi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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