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대동보서(庚寅大同譜序) (1770년)
경인대동보서
평해에 우리 씨족이 있게 된 것이 후한 건무(建武) 연대(年代) 25(二五) ~ 54(五四)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제까지 천칠백사십여년이 되었다. 바다에서 배를 타고 한(漢)으로부터 온 것과 포송(浦松)이 옮겨 온 것과 황장군이 산을 만들었다는 것이 기성(평해(平海))의 고사(古事)로 전해지고 있으나 모두 년대가 멀어서 그것을 무어라 일컬어 기술(記述)할 수가 없다.
신라를 거쳐서 고려까지 벼슬이 높게 이어졌고 큰 선비와 이름난 사람들이 역사에 빛난 것이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문적(文籍)이 증거될 만한 것이 없고, 보첩(譜牒)이 전해지지 않아 자손들이 각각 흩어져 옮겨 간 곳 이름을 따라 각각 관향(貫鄕)을 정했다.
그리하여 평해의 적(籍)을 잃지 않고 파계를 접하여 원계를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는 것이니 우리 금오공(金吾公)으로 중시조(中始祖)를 삼을 수 있다.
가정(嘉靖) 연간(1522(一五二二) ~ 1566(一五六六))에 금계(錦溪)선생이 처음으로 수집하여 족보의 초고(草稿)를 만들었고 계속하여 해월(海月)선생과 남당(南塘)공이 닦은 바의 족보가 있게 되었으며 근래에 또 증숙조(曾叔祖) 처정(處正)이 수록을 하고 삼종부(三從父)인 상종(尙鍾)이 이를 베끼고 널리 수탐을 하고 상세히 근거를 대서 거의 완전한 족보를 이룰 수 있게 되었으나 아직도 간행할 할 겨를은 없었다.
갑○(아마 갑신년(甲申年) 1764(一七六四))년에 장단에 사는 종친 섭(燮)과 외손 김여강(金汝綱)이 합의하여 새 족보를 만들었는데 먼저 양무공(襄武公)파 한권을 인쇄해서 천리를 달려와 그것을 보여주었는데 그 성의는 부지런하고 진지하였으나 그 실린 바 계첩(系牒)이 어긋나고 틀린 것이 많았다.2(二)년이 지난 술○(戌○)(아마 병술년(丙戌年) 1766(一七六六))년에 의논해서 보첩하는 장소를 풍기의 금양(錦陽)으로 옮기고 그 이듬해 가을에 섭(燮)이 상복을 입은 채로 큰 고개를 넘어 와서 종친 일(鎰)에게 맡겨 그 일을 주관하게 했다.
유사를 정해서 파계의 단자를 거두었다. 기(축)(己(丑))년(1769(一七六九)) 여름에 이르러 비로소 인쇄공에게 넘기었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6(六)년이 걸려서야 족보의 역사(役事)가 대강 완료되었으니 이는 실로 한 종친간의 큰 다행한 일이다. 지난날 해월(海月)선생이 족보를 할 적에는 미처 금오공 후손이 되는 줄 몰랐는데 한편 유서(遺書)를 지은 것에는 한 조상이 되는지 아닌지 상세하지 못하다고 한 갓 탄식만 하였다. 이번에 장단(長端)의 족보가 새로 이루어지자 또한 그 대광공(大匡公)의 차서를 살피지 못하였으니 그 당시에 박학한 선비들이 순 임금과 우 임금 세계(世系) 의심(옛날 사람이라 누구 누구인지 모르는 의심)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제 모두 서로 이것 저것 참고하고 연구해서 환하게 수정을 하여서 이미 평리공(評理公)은 금오공의 후손이 되고 대광공은 평리공의 아우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세파(世派)의 차례와 항렬의 순서가 질서정연하게 볼 만하게 되어 뒤를 이어 오는 우리 쇠잔한 후손들이 이에 유감이 없게 되었으니 이것이 크게 다행한 중에도 가장 크게 다행한 일이다. 그 밖에 부록은 여러 파가 장적(帳籍)과 개인 족보의 근거가 될 만한 것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이미 옛 족보에는 누락이 된지라 또한 감히 다른 대(代)의 것을 곧바로 매어 놓지 못하니 이것은 부득불 훗날로 미루어야 되겠다. 족보가 이미 이루어지자 여러 종친들이 나 윤구(潤九)가 금계공의 종손(宗嗣)이 되고 또 보소(譜所)의 곁에 살고 있어서 처음부터 나중까지 참여해서 여러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고 여겨서 나로 하여금 몇 줄의 말을 지어 서술하도록 명하였다. 이미 종사(宗事)에 매였기 때문에, 또한 불초하다는 이유를 들어 감히 사양하지 못하겠다.
오호라 우리 황씨의 연유한 근원이 멀도다. 족보 중에 기재되었듯이 공신이나 현인이나 석학 유덕자(有德者)들이 뚜렷하게 나타나 일컬을 수 있어서 모두가 종족이 된 자손(子姓)들이 가히 의법(儀法)으로 삼을 바가 될 만 했다. 무릇 우리 여러 종친 후사(後嗣)들로서 이 족보를 보는 자가 또한 의당히 면려하여 조상이 남긴 덕을 더럽히지 말자는 것으로서 서로 돕고 힘써야만 비로소 능히 종족을 거두어 족보를 합한 부지런한 뜻을 저버림이 없게 될 것이니 각기 힘쓸 지어다.
족보를 닦은 역사(役事)의 시종(始終)과 사용한 비용의 내역은 스스로 나의 아우가 이 책 끝에 기록하여 첨부한 것이 있으니 지금 여기에서는 같은 말을 다시 하지 않는 바이다.
현재 임금(영조) 46(四十六)년 경인(1770(一七七○) 이른 봄에 후손 윤구(潤九)는 삼가 서(序)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