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묘대동보서(辛卯大同譜序) (1831년)
신묘대동보서
생민(生氏)에게 중요한 바는 성씨(姓氏)를 표시하고 족당(族黨)을 연합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은 없다.
성(姓)이란 것은 조종(祖宗)으로부터 나온 것이어서 모(某) 성(姓)이나 씨(氏)를 받는 것은 자손이 갈리는 바로서 그 관향(貫鄕)이 되는 것이다.
사족(士族)의 가문(家門)에서 반드시 족보 닦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그 큰 계통의 실마리를 고금(古今)에 밝히고 친애(親愛)를 유구한 장래에 존속시키기 위한 것이다.
주(周)나라의 제도는 사적(司啇)기관을 설치하여 받을 성(姓)을 관장하게 하고, 소사(小史)를 세워서 세대를 메는 것을 정했다. 씨성(氏姓)과 세족(世族)이 나라를 다스리는데 무슨 관계가 되기에 관직을 세워서 설치하는 것을 이와 같이 중요하게 여기고 또 중복되게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오직 한 사람의 교화(敎化)가 한 가문(家門)에 물려 지고 또 한 집에서 일족(一族)으로 확대되고 한 일족에서 나라로 확대가 되고 한 나라에서 천하를 교화(敎化)시키는데 이르게 된다. 씨족(氏族)이 성왕(聖王)의 정치에 있어서 가볍지 아니하고 중요한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니 어찌 한 사람과 한 가문의 사사로움 뿐이겠는가.
옛날에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가 스스로 자기네들의 세기(世紀)를 서술하되, 중려(重黎)씨에서 일어났다고 했고 (반고는 자기 조상을) 고욱(高頊)씨라고 했다.
구양수(歐陽修)도 역시 거슬러 올라가서 (자기 조상을) 우(禹)임금에 까지 소급시켰다. 이는 멀고먼 빛남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근본을 궁구(窮究)한다면 사람이 누군들 먼 실마리(근거)가 없을 수 있겠는가.
우리 황(黃)씨가 성(姓)을 받은 것은 그 유래가 또한 멀다. 중국의 성(姓)씨에 관해 엮은 책을 상고해 보건데, 육종(陸終)의 후예가 황(黃)땅에 봉(封)하여서 그로 인해 성씨가 되었다.육종은 전욱(顓頊)의 고손(高孫)이요 전욱은 황제(黃帝)의 손자이니, 중국의 성씨 황(黃)은 모두 여기에서 근원이 되었다.
우리 황씨의 선조도 역시 중국인이며 생각건대 그러면 우리 조상은 황제(皇帝)의 후예인가! 한(漢)나라 건무(建武)년간(25(二十五) ~ 54(五十四))에 휘(諱) 낙(洛)이라는 분이 비로소 동방으로 나와서 평해(平海)의 월송(越松)이란 곳에 거주(居住)하였다.
후에 아들 형제 세 사람이 있었으니 그 봉(封)한 것으로 인해서 그 관향(貫鄕)을 세웠는데, 나뉘어 기성(平海) 장수(長水) 창원(昌原)의 일가를 이루었다. 그래서 뿌리를 함께 한 그러한 정의(情誼)가 드디어 없어지게 되었다.
소씨(蘇氏)의 족보 서(序)에서 말하기를
처음은 모두 한 사람의 몸둥이었다. 한 사람의 몸인데 갈려서 나중에는 길가는 사람 관계처럼 서로 모르는 사람 사이가 되었도다 라고 했다. 대개 이것은 세대가 오래 갈수록 그 친근한 것이 소원해진 것을 상심한 말이었으니 실로 우리 종중(宗中)의 오늘날도 이와 같이 되고 말았다.
오직 우리 평해 황씨는 계보와 문적이 병화(兵火)를 겪으면서 흩어져 없어지고 기록이 남은 것이 겨우 유지되어 왔다.
금계(錦溪) 해월(海月) 두 선생이 나시어 여러 집안의 유적들을 널리 상고하고 먼 자손들의 없어진 집안 역사들을 수집하여서, 초안인 보첩(譜牒)을 처음으로 이루었으니, 그 먼 조상을 추모하고 그 종족을 수합한 의의(意義)가 자못 전에는 발현하지 못했던 바를 발현시킨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그것이 상세하지 못한 것이 한탄스러웠다.
그래서 후인들이 빠진 유적들이 문자(文字)간에 나타난 것을 추가로 수집하였다.
믿을만한 것을 근거로 하고 의심이 나는 것을 없애서 더욱 살피고 신중히 하여 경인(庚寅)년에 이르러서야 판각에 올려 인쇄하였으니, 우리 평해황씨의 족보가 여기에서부터 시작이 되었다. 그러나 바야흐로 그 족보를 할 적에 기호(畿湖)에 사는 여러 종친으로서 대광공파(大匡公派) 자손들이 함께 더불어 족보를 같이 했는데, 수춘(壽春)(=춘천)과 흥성(興城)의 일가들은 다 똑같이 양무공(襄武公)의 둘째 아들의 후손으로 함께 가보(家譜)를 지켰고, 지금까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근래에 익찬공(翊贊公)의 종씨(宗氏) 윤석(胤錫)이 자가(自家) 흥성(興城)의 묘(墓에)서 비갈(碑碣) 하나를 발견했는데, 14(十四)대 선조의 휘(諱)와 관명(官名)에 대해 의심이 일어나 이로 인해 따로이 그 족보에 기재하여 넣지 않았다.
묘갈(墓碣)이 비록 근거가 될만하다고는 하나, 이미 그 당위(當位)의 지석(誌石)을 묻은 것으로만은, 가히 의혹을 깨뜨릴만한 것은 못된다.
그런데 전대(前代)의 서로 전해오는 보첩(譜牒)의 기록을 버리고서, 후세에 의심을 일으킬 만한 논(論)을 따르고 있으니 너무 경솔하다는 비난이 없을 수 있겠는가. 두 가지 의혹사항을 서로 논란할만해서 족보 만드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니, 그리하면 중세의 아름다운 덕이나 드러난 문벌과 후손들의 파계(派系)가 장차 내세에 전달되지 못할까 걱정이다.
내가 이것이 두렵고 걱정이 되어 두 분의 휘(諱)를 다 존치 시켜서 합하여 한 족보를 이룰려 하노니 흥성(興城)의 종친은 혹시라도 나의 고심(苦心)을 양해할 수 있을 것인가.
가정에서 들은 바를 어기는 것만을 곤란하게 여겨서 기꺼이 통일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한 할아버지의 자손이 누구는 누락되기도 하고 누구는 들어가는 자도 있기도 할 것이니 어찌 상심되고 한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저으기 생각해 보건대 옛 족보가 간행되기 이미 한 주갑(一周甲)이 지나서 생존해 남아있는 이가 몇 분이 안된다. 또 태어나는 사람들은 날로 번창하니 뒤 이어서 추가하여 족보를 넓혀서 그 전하는 것을 더욱 오래 가게 하는 것은 실로 이는 전대(前代) 사람들이 후대(後代) 사람들에게 희망하는 바였다.
나 황도(黃燾)는 참람함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부족하고 외람됨을 무릅쓰고, 병술(丙戌)(1826(一八二六))년에 서신을 발송하여 널리 알렸으니 도모하는 뜻이 여러 종친들에게 알려져 을축(乙丑)(1829(一八二九))년 겨울에 몇몇 종친들 『평해의 규(圭), 관(琯), 장단(長湍)의 주로(周老), 풍기의 헌주(獻周), 강릉의 지선(之璿), 춘천의 묵(默), 경(炅), 영흥(永興)의 승후(升厚), 간성(杆城)의 찬(瓚), 북청(北靑)의 승종(昇鍾) 등』이 북쪽에 모여서, 계보(系譜)를 수합하여 책을 엮었는데 삼년이 지나서야 능히 일을 마쳤다.
상세히 기록하고 또 생략하는 것은 원래 첨부한 범례(凡例)를 한결같이 따랐고, 파보(派譜)에서 스스로 닦은 그 범례를 기준으로 하여 적당히 절충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아! 경인(庚寅)년의 족보는 실로, 금계(錦溪) 해월(海月) 두 선생이 힘쓰고 정밀히 탐구함과 양읍(兩邑)의 여러 종친들이 협력하여 함께 작업을 함으로 인한 것인즉, 자기 조상을 더럽히지 않고 부끄럽지 않게 이 족보(族譜)를 이루었으니 마땅히 가르는(갈리는) 바가 있어야 마땅할 텐데 풍기(豊基) 종친이 처음에는 함께 의논했다가 나중에 가서는 이의(異義)를 제기하고 고집을 내세웠으니, 천천히 그것을 궁구해보면 어찌 그것이 마음에 편안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의논이 갈린 데에 구애가 되어서 갑자기 이전 족보에 실린 것을 폐기한다면, 그 실정을 헤아리고 의(義)를 헤아릴 때에, 어떻게 무심할 수 있겠는가.
옛날에 간행(刊行)에 올린 것을 인하여 나머지 것은 뒷사람들에게 미루어 맡긴다면 나는 옛날을 생각하고 두터운 정을 남겨 놓는데 어긋나지 않는 일단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두 종친들은 나를 두고 뭐라고 할지 모르겠구나.
고인(古人)이 말하기를 “관록(官祿)과 지위는 없어도 군자가 있기만 하면 종족(宗族)이 비록 쇠하여도 이는 오히려 성창(盛昌)하는 것이고, 관록과 지위가 빛나고 영광스러워도 군자가 없으면 종족은 비록 번성하여도 오히려 쇠망하는 것과 같다”고 했으니 참으로 훌륭한 말이도다.
무릇 우리 족보를 한 사람들은 다 각기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도리를 힘써서 성씨가 사람을 귀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지 말고 반드시 사람으로서 성씨를 귀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여야 한다. 그리하면 곧 조상을 높이고 일가를 공경하는 근본이 여기에서 벗어나지 아니 할 것이다.
만약에 다만 본원(本源)을 상고하고 계파를 구분하는 일에 힘쓴다면, 이는 바로 오늘날의 족보를 닦는 뜻일 것이며, 또한 어찌 이른바 한 개인으로부터 한 일가로 미루어 나가고 그렇게 해서 천하를 감화시키는 데에까지 이른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인쇄가 완성됨에 종친들이 나에게 위촉하여 서문을 지으라고 하였다.
내가 그 적임자가 아니라고 사양하였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음에 간략하게 새로 계속해서 수보한 시종(始終)을 간략하게 서술하여 그것으로 옛 서문의 아래에다 첨부한다.
숭정기원후 네 번째 신묘년(1831년(一八三一)년) 임월하순
후손 통정대부 승정원 우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도(燾)는 삼가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