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진대동보서(庚辰大同譜序) (1880년)
재확인 필요
경진대동보서
족보는 세대(世代)의 차서(次序)를 나타내고 효(孝)를 밝히고 친족들을 합치고 돈목
(敦睦)을 이루는 것이다.
멀리 떨어져 살게 되면 잊어버리기 쉽고 빠뜨려 지기 쉬우며 혹은 생략되게 되나니 어찌
효와 돈목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 성씨(姓氏)는 학사공(學士公)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온 때로부터 거의
2(二)천년이나 되어 세대의 등급과 파(派)의 계통이 증거 될만한 증빙이 없는 한탄을 면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 이는 족보가 전해지지 않은 까닭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침내 우리
선조인 금계(錦溪)선생이 처음으로 족보 초단(草單)을 수집하고, 해월(海月)선생과 남당공(南
塘公) 역시 각각 꾸민 바가 있었으나 모두 완성을 보지 못하였는데, 나의 고조부인 산남
(山南) 오류(梧柳) 형제분들께서 여러 구본(舊本)을 근거로 하여 널리 상고하고 상세히
그 틀린 바를 정정(訂正)하고 그 생략된 것을 보충하여 검교(檢校), 평리(評理), 대광(大匡)
공이 차례대로 형제 3(三)파가 됨을 밝히고, 그 외 여러 누락된 파가 증거 될만한 적(籍)이
있는 것은 부록(附錄)으로 남겨두어 훗날을 기다리게 하고, 합하여 한 부(一部)로 묶어
비로소 간행하니 이것이 바로 경인(庚寅, 1770(一七七○))년 본(本)인 대동보(大同譜)이다.
그 후 80(八十)년이 지난 경술(庚戌)년 (1850(一八五○))에 우리 아버지가 이어서 족보를 닦고,
또 계옥공파(啓沃公派)와 금오(金吾)공이 이하 시대의 믿을 만한 문적(文蹟)을 얻어서
처음에 읽어보니 선조가 후사가 없는 것을 탄식했는데, 비록 그 이유를 알지는 못하나
묵묵히 당시의 일을 이해해 보건대, 생각키로는 반드시 무슨 희미하고 어두운 일이 있어서
그러 했을 것이다.
대개 옛날에 빠졌던 것이 이제 존속되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다만 처음에 합했던 것을
다시 갈라서 파보(派譜)로 삼았으니, 이는 우리 아버지가 남기신 한(恨)이었다.
종중(宗中)의 의논이 이것으로 연유하여 폐기되지 않아서 곤돈(困敦) 즉 丙子년(1876(一八七六))
으로부터 시작하여 멀고 가까운 일가들이 모두 같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에 대부 범린(範鱗)씨와
재종숙(再從叔) 현주(顯周)씨와 평해 종친 정(瀞)씨가 그 일을 주간하여 유사(有司)를 정하고
족보에 실을 단자(單子)를 모아서 공사를 행할 장소를 금양(錦陽)에다 설치하고 초간(初刊),
중간(重刊)을 모두 여기에서 간행하였으며, 이어서 기적(紀蹟)을 모두 옛 계획대로 말미암아
구보(舊譜) 부록(附錄)에 있던 파(派)를 원보(原譜)에 올려서 계통을 이었으니, 이는 선대의
교훈을 따른 것이다.
다시 새로 들어온 사람이 있으면 부록(附錄)의 보책에 두었으니 이는 후일을 기다려
뒷사람의 일로 맡긴다는 뜻이다.
옛날에는 범례가 있었는데 이제는 별도로 파를 갈랐다가 다시 합쳤다. 제일 먼저 도유
(屠維, 기묘년 1879(一八七九))에 시작하여 상장(上章, 경진년 1880(一八八〇))에 넘어와서 마쳤으니 모두 아홉 권이 되었다.
아! 슬프도다.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학사공(學士公)의 자손들이 마땅히 여기에 그치지
않고 더 많을 것이나 상대(上代)의 문헌이 불행하게도 증거를 댈 수가 없으니, 어찌할 수가
없는 일이구나. 남아있는 각 파가 여러 도에 흩어져 거처하는 사람들이 또 불행하게도 모두
쇠잔하여 서로 친근히 지낼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제 단절되었던 자를 이어주고 누락된 자를
거두고 갈라져 있던 자를 합하여 완전한 족보를 만들었으니, 백 대가 하나의 계통으로 되고
천리나 되게 멀리 사는 사람들이 한 마을에 사는 것과 같이 되었다. 종친간에 가볍게 보고
또 멀게 보기를 뜬구름과 같이 하고, 소원히 여기기를 길가는 사람 같이 여겼으며, 막연히
서로 알 수 없던 사람들이 거의 이로 인하여 소홀히 여겨 잊어버리는 데에 이르지 않게 할
지어다. 우리 족보를 보는 자들은 유연하게 효도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생기고, 흡연하게
서로 두터이 돈목하는 기풍을 일으켜 가문의 운이 크게 좋아 돌아오는 것이 여기에서
시작될 것이니 어찌 다행이 아니겠는가?
지난 날 태평성세에 먼저 여러 어른들의 현명함과 효도함이 몇 대를 거치고 또 몇 대를
쌓아 왔어도 오히려 그 어려움을 한탄했거늘, 하물며 오늘날의 기세와 운수로서 능히 길지
않은 기간에 이것을 이루었으니, 누구의 공로인가? 이는 특별히 선조 들께서 쌓은 정성을
우리 후인들에게 남겨 줌에서 계승하여 이르게 했다는 것을 또한 여기에서 볼 수가 있다.
시경에 이르기를,「이제 그 덕을 닦아서 너의 조상을 더럽히지 말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을 이른 말일 것이다. 여러 종친들이 내가 금계(錦溪)공의 종손(宗孫)으로 이 족보
역사(役事)에 참여하여 들은 것이 있다는 이유로 참람되고 지나친 이름을 개의치 아니
하고 가만히 한 마디 말을 첨부하여 우리 아버지의 글 뒤에다 이어 놓으라고 하니, 감히
조술하는 바는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나, 오히려 더럽힐까 두렵기만 하다. 이미 이렇게
종친들에게 말씀을 드리고 또한 이것으로 후대의 사랑스런 후손들에게 권면하는 바이다.
경진(庚辰)년(1880(一八八〇)) 가을 9(九)월 후손 우진(宇鎭)은 삼가 서문을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