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술대동보서(甲戌大同譜序) (1934년)
갑술대동보서
대저 우리 성씨가 기성(평해(平海)의 옛 이름)에서 비롯되어 평해를 본관으로 쓴 것이 이미 옛날부터이고 우리 종친들이 세계(世系)를 닦아서 보첩을 이룬 것도 또한 여러 번이다.
경인년(1770(一七七○))에 보판을 간행한 때로부터 경술(1850(一八五○))ㆍ경진(1880(一八八○))ㆍ임인(1902(日九○二))년에 이르게까지 무릇 네 번이나 간행했는데 일찍이 선생과 부로(父老)들의 밝은 문장과 정필(正筆)로 서발을 기술한 것이 많았다. 이들 서문은 혹은 상세하기도 하고 혹은 간략하기도 하였는데 각각 시대가 다름으로 인해서 문장은 다르나 일을 닦는 것인즉 도(道)는 같았다. 틀린 것은 고치고 오류된 것을 바로 잡아서 기강을 부축하고 질서를 펴고 엄하게 규범을 잡아 놓았으니 일을 후에 하는 자들은 마땅히 옛것을 모방하고 전례를 의거해서 가보(家譜)의 규칙을 실추시키지 아니하여야 할 것이다. 이제 난리의 운세(運勢)에 즈음하여 재난의 액운을 당하여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로 되듯 변괴와 난리가 장차 어떻게 변해갈지 알 수 없으며 만약에 그대로 미루기만 하여 얼마간의 세월을 지나게 되면 다시는 옛 세대의 의전(儀典)과 모범을 볼 수가 없게 될 것이다.
아! 불쌍하다. 우리 천한 포로가 된 여러 종친들은 모두 나라를 떠나고 관향을 잃은 종족으로서 천민과 종이 되어서 끝내는 호소할 데가 없는 곳으로 귀결 될 것이니 시초의 우리 조상들이 휼륭했던 것을 궁구해 본다면 어찌 통한(痛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제 다행히도 종중(宗中)에 뜻있는 군자들이 저으기 한줄기의 도통이 맥을 이은 기운이 나와 특별히 대동(大同)을 하자는(대동보를 만들자는) 의논을 발의하여서 보소(譜所)를 옛날 평해의 월송리(月松里)의 추원재(追遠齋)에 설치하여 이름을 붙이기를 관향보(貫鄕譜)라고 한 것은 선대의 덕을 준수하고 후손들에게 훈계를 삼아서 관향을 지키는 큰 뜻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미리 염려되는 것은 난리를 겪어서 다 쓰러져 없어져 소탕이 된 나머지 문헌이 아주 황량하고 거칠게되어 증빙마저 없어질까 걱정이다. 그러므로 멀고 가까운 곳에 글을 보내서 같은 종중들을 규합하여 보았으나 호응을 하는 이가 열 명 중 다섯 명 정도여서(一五) 태반이 보단이 들어오지 않아 족보를 원만하게 할 수가 없었다. 형세가 이러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선대 옛날로부터 검교공(檢校公)ㆍ평리공(評理公)ㆍ대광공(大匡公) 세 종파(宗派)가 합동하여 단자(單子)를 묶어 함께 일을 이루면 이것이 대동보일 것이다. 그런데, 각각 파의 후손들이 거기에 붙이기를 원하는 이들로 단자를 엮어서 수선하는 것은 당연하나 족보의 규격이 엄격하니 다만 때에 따라 내력이 어떠했는가를 살펴 고찰하여 보고 또 틀렸던 것을 수정하고 끊어졌던 것을 계속하여 돈목(敦睦)을 힘써서 보첩을 계획해서 각 구역에 널리 배포하려고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행히도 터럭하나와 같은 것도 백세 후세까지 보존하게 된다면 관향의 이름이 없어지지 않게 될 것이니 성씨의 전하는 것이 어찌 이것을 힘입어 영구히 갈 것임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훗날 보는 자로 하여금 책을 열고 주목하여 보면 선대의 훈공과 큰 벼슬한 것과 문장이 휼륭한 것과 도덕이 뚜렷했던 것이 환하게 빛남을 알 수 있을 것이며 역대 선조들의 깊은 근원과 두터운 뿌리인 만대(萬代)의 기업이 무궁히 내려 갈 것이니 우리 종친의 다행함이 무엇이 이보다 더 크겠는가. 지금 더불어 족보를 함께하는 사람들은 학사공學士公과 금오공(金吾公)의 자손 아닌 사람이 없으니 선대를 조술해서 후대를 여유있게 해주는 도리가 이보다 더 우선 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나 일은 거창하고 힘은 모자라 능히 구보(舊譜)의 양식을 준행해서 꾸밀 수는 없는 형편이다.
그리하여 활판(活板)으로 인쇄를 하여 책의 권수를 줄여서 15권으로 한 질(帙)을 만들었으니 이제처럼 재정이 어렵고 물가가 높은 때에는 또한 참으로 요행한 일이다. 만약에 주관하는 사람들이 경제를 능력있게 처리하지 못하고 계획을 면밀하게 하지 않았다면 어찌 능히 시작을 경영해서 끝까지 이룰 수 있었으리오. 이것은 모두 중곤(中坤) 종친과 만영(萬英)과
병(昞)1)과 사흠(思欽) 선비의 조리(條理)있게 처리한데서 나온 결과이다.
이들의 재덕(才德)이 있어 오히려 공사에 분주히 시달린 그 공로는 이루 말할 수가 없고 여러 종친 유사(有司)가 한 해를 넘기고도 몇 달 동안 걸친 피곤한 것에 대해서 또한 감사를 드린다. 족보가 이미 이루어짐에 거기에 실을 서문(序文)은 4(四)편 혹은 5(五)편에 그치지 않을 것이나 종중(宗中)의 모든 의논들이 관향(貫鄕)의 일(관향보(貫鄕譜))은 천년만에 한번 있는 일이니 풍기(豊基)에 사는 큰 집 파(派)에서 한마디 말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해서 정중하게 요구하거늘 나와 같은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는 사람으로서 서문(序文)을 감당할 수가 없으나 이미 상우(相遇)씨와 함께 일에 종사했고, 여러 사람들의 생각이 진지함에 만 분의 일이나마 받들어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 준열함을 무릅쓰고, 시종(始終)을 간략하게 진술하는 바이다.
갑술(1934)년 4(四)월 상순에 후손 영래(永來)는 삼가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