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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검교공세보서(己亥檢校公世譜序) (195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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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검교공세보서
우리 황씨黃氏의 파보派譜는 일찍이 임술년壬戌年(1922)에 종백宗伯 종형從兄 영래永來씨氏가 일가一家의 사첩史牒을 수정하여 편찬한 것이다。
36三十六년 뒤 무술년戊戌年(1958)에 금양정사錦陽精舍에서 다시 편찬하였는데 통첩通牒이 등장하자 멀든 가깝든 한 목소리를 내었고 함께 모여 힘을 다하였다。
객客이 나를 방문하여 물었다。
『그대는 「족族」과 「보譜」의 뜻에 대해 알고 있는지요? 천하가 형성된 것이 오래 되었는데、 집이 생기니 종족이 생기고、 종족이 생기니 족보가 생겨났습니다。 「족族」은 「진溱(모으다)」이니、 그 종족을 모아 소원한 이들을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보譜」는 「보普(두루 미치다)」이니、 그 기록을 두루 미치게 하여 빠져있는 것을 채우는 것입니다。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이르기를 「큰 덕을 두루 밝히어、 9족九族을 친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요堯임금의 덕으로 9족九族이 밝혀진 연후에 휼륭한 정치를 하였습니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족보族譜의 계열系列을 밝히고 종법宗法을 세워 천하의 인심을 통괄한다。 족보의 계열이 뚜렷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내력을 알지 못하여 왕왕 친분이 끊기지 않았는데도 알아보지 못한다。 이 어찌 다른 사람들에게 조상을 숭배하고 친족을 거두는 도리라고 가르치겠는가! 모름지기 빠짐없이 모으고 자세히 기록한다면 백대百代라도 한 갈래이며 천리라도 한 마을이니、 이를 명심하여 소홀히 하거나 잊어먹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 뜻은 참으로 중차대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사마천司馬遷의 자서自序、 반고班固의 서전敍傳은 그 가업家業을 스스로 기술한 것에 불과할 따름이었고、 노릉廬陵의 구양수歐陽修、 미산眉山의 소식蘇軾도 본시 집안의 계보系譜를 기술하여 종족의 내력과 항렬의 계통을 밝힌 연후에 가히 요순堯舜의 혈통血統이라는 점에 의심 없기를 바랬습니다。
지금 황씨黃氏의 족보族譜는 위아래로 400四百여 대代에 걸쳐 재차 인쇄하고 연이어 새긴 것이 여러 번입니다。시조始祖의 입장에서 보자면 모두 자손이건만、 당신의 대에 이르러 친한 사람들이 나뉘고 멀어졌으며 모인 사람들이 흩어지고 갈라졌으니、 족보族譜의 참뜻은 어디에서 찾겠습니까?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나는 말했다。
『그러지요。 비록 말하고 싶지 않지만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우리 황씨黃氏가 우리나라에 등장한 것은 오래 되었습니다。 전욱顓頊 시대부터 황씨黃氏 성을 받아 수천년을 거치며 천하를 가득 채운 사람들이 다 조상이었고 중국에서 생을 마감하였지만、 당唐 학사學士(황낙黃洛)께서 동쪽으로 배타고 이주해 오신 이후로 갑甲、 을乙、 병丙 3三형제가 분봉分封을 받아 기성箕城(평해平海)、 장수長水、 창원昌原에 본관本貫을 세웠으니、 세대가 요원하여 사실을 밝힐 자료는 없지만 기성箕城의 황씨黃氏가 가장 멀고 오래되었습니다。
금오공金吾公(검교공檢校公) 이래로 평리공評理公、 대광공大匡公 등 3三형제가 또 나뉘어 3파三派를 이루었는데、 이름난 대부와 뛰어난 재상이 청사靑史에 빛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 차례 전쟁을 거치면서 문헌이 일실되어 같은 조상을 둔 사람들이 누가 누군지를 몰라 마치 서로 진秦나라와 월越나라 사람들처럼 대하니 탄식을 금할 수 없군요。
우리 선조 금계선생錦溪先生께서 깊이 생각하시고 여러 사람들이 기꺼이 협조하여 비로소 초보草譜가 편찬되었고 연이어 해월선생海月先生께서 편찬한 족보가 등장한 후에야 비로서 만갈래의 물이 하나의 근원에서 시작되고 만갈래의 가지가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계통이 다시 밝혀지고 내력來歷도 순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황씨가 전국에 흩어져 있어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데、 더욱이 온나라가 진동하고 남북이 분열되어 있으며、 헤어져 갈라진 사람들은 근본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없고 파派가 먼 사람들은 근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뜻이 없습니다。
또한 평해平海、 청안淸安 두 파의 종친들이 작업의 방대함을 꺼리고、 각자 그 조상을 숭배하고 각자 자신의 파派를 정비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나아가 하나의 완결된 족보를 만들 수 없음은 족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처럼 시간이 있을 때 만약 서둘러 정비하고 수합收合하지 않는다면 더욱 모호해질 것이며、 또한 어린 아이들이 어찌 천년전의 조상이 누구인지 알겠습니까?
나는 이를 두려워하여 족숙族叔 정진正鎭、 태진泰鎭과 개별적인 자료들을 모아서 검교공檢校公 이후로 일가一家의 사첩私牒을 만들기로 상의한 것이지、 결코 나누고 가르는데 뜻을 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제 말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금수산錦水山 위를 한번 봐주십시오。 한 조각 떠가는 구름은 무심히 모였다가 무심히 홀어지는데、 사람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도 일정치 않으니 바로 그와 같은 것입니다。 제가 어찌 그 사이에 간여하겠습니다까?』
객은 그저 「예예」하며 대답하고는 물러났다。
모든 종친들이 내가 대책없이 이 일에 착수한 것을 듣고서도 분수에 어긋난다고 여기거나 나무라지 않고 도리어 세대가 뒤섞인 것을 바로 잡아주고 내력이 잘못된 것을 밝혀주었다。
주해가 붙어있거나 관직이 틀린 것은 모두 옛 제도를 따랐으며、 잘못된 것은 교정하고 누락된 것은 채웠으며、 끊어진 것은 잇고 붙어있는 것은 올려、 크고 작은 것을 모두 다 거론하였으니 또한 일가가 하나로 통일된 것이다。
아! 성대聖代에 사셨던 부로父老의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정성스럽고 간절함이 3三대를 살면서 살펴보아도 그 비길 데 없음을 오히려 감탄하였다。
지금 운수가 액운을 밀어내고 있어、 1一년 사이에 족보를 완성했으니 이는 누구의 하사품인가? 이는 다만 조상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쌓여있는 음덕이 우리 후손들에게 드리워진 것이다。
또한 태진泰鎭이 바쁜 일을 제켜두고 뜻을 받들어 부지런히 도와주었기에 이에 이룰 수 있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스스로 그 덕을 닦아、 조상들을 욕되게 하지 않으리』라고 하였다。
무릇 우리 모든 종친이 선조의 깊은 인의仁慈와 두터운 은혜를 본받고 존중하며、 전하신 가르침에 충실하여 효성스럽고 우애가 돈독하며 화목함에 힘쓴다면 머지않아 가문의 운수가 번창할 것이니、 가히 이를 확신해도 좋으리라。
시보始譜와 전말顚末은 옛 족보의 서문에 수록되어 있으니、 내가 굳이 다시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조선 개국 568년 기해년(1959) 후예손 통사랑권지 권지(權知)(: 벼슬 이름 앞에 붙어 그것이 임시직(臨時職)임을 나타내는 말) 승문원부정 자 헌이 삼가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