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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018

임오검교공파보서(壬午檢校公派譜序) (2002년)

 동해(東海)의 푸른 바다와 월송정(月松亭)의 울창한 소나무 숲이 어우러진 평해월송리(平海月松里)는 중국 후한(後漢)(광무제(光武帝))의 학사(學士)를 지내시던 도시조(都始祖) 휘(諱)낙(洛)이 표착(漂著)하신지 이천여년의 유구한 세월동안 깊은 뿌리를 내리고 동해의 발원지에 재실(齋室)을 짓고, 설단(設壇)을 보위(保衛)한 것이 월송단(越松壇)이다. 자손(子孫)이 번창(繁昌)하여 70(七十)여만명에 이르러 월송단(越松壇)이 협소(狹小)해졌고, 사당(祠堂)이 부재(不在)한터라 2001(二○○一)년 제향일(祭享日)에 도시조(都始祖) 유적지(遺蹟地) 성역화(聖域化) 사업의 시공식(施工式)을 거행(擧行)하여 월송단(越松壇)을 확장(擴張)하고 사당(祠堂)을 신축(新築)하고 있는 것은 황씨종친(黃氏宗親)의 광영(光榮)이요 자손만대(子孫萬代) 길이 자랑할 문화유산(文化遺産)의 역사자료(歷史資料)가 될 것이다.
 가첩(家牒)을 편찬(編纂)하는 일 또한 조상(祖上)의 덕(德)을 기리고 자손만대(子孫萬代) 이어질 역사적 사료(史料)이기에 종장님들의 의견(意見)을 수렴(收斂)하고 병진보(丙辰譜) 이전 14(十四)차례 발간(發刊)된 가첩(家牒)을 참고로 정보화(情報化) 시대(時代)에 걸 맞는 임오보(壬午譜)를 편찬(編纂)하는데 최선(最善)을 다하였다.

 우리 가문(家門)은 고려시대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휘(諱) 유중(裕中),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지낸 휘(諱) 서(瑞), 영해부사(寧海府使)를 지낸 휘(諱) 원로(原老),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낸 휘(諱) 유정(有定) 등을 비롯한 여러 선조들이 국정(國政)을 보살피고 나라에 공을 세웠다. 고려조와 조선조에 수많은 공신(功臣)과 급제(及第)한 선조를 배출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人物)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휘(諱) 전(銓)은 지평을 역임(歷任)했고, 휘(諱) 현(鉉)은 태종과 세종대에 대사성을 지냈으며, 인수부윤(仁壽府尹)으로 가셨다가 다시 행(行)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역임하였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는 그를 “경서(經書)에 밝고 행동에 법도가 있어 세상의 사표가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휘(諱) 연(鋋)은 순흥(順興) 훈도(訓導)를 지내셨다. 휘(諱) 정(玎)(호(號) 불권헌(不倦軒))은 정원강시에서 장원하여 성종으로부터 말 한 필을 하사받았고, 성균관 전적과 시강원 찬독관을 거쳐 통훈대부가 되었다. 휘(諱) 준량(俊良)은 재기가 탁월하고 글을 잘 지어 퇴계선생(退溪先生)과 깊이 있는 학문을 논하였고, (《조선왕조실록) 명종 26(二十六)년, 《퇴계집(退溪集)》) 신녕현감(新寧縣監)ㆍ성주목사(星州牧使) 시절에 보인 치적 그리고 제자들과의 강론(講論) 등이 《목민심서(牧氏心書)》에 관리들의 모범으로 제시되어 있다. 이 밖에도 가문(家門)에는 200여명의 벼슬한 선조들이 백성의 칭송을 받았다.
 가문(家門)의 상징(象徵)이자 선조들의 면면(綿綿)한 숨결이 담긴 족보는 집에 불이 나거나 전란(戰亂) 속에서도 족보부터 챙겼고, 목숨보다 소중히 가문의 맥(脈)을 밝혀온 선조들의 위업을 이어받아 문중의 문헌(文獻)을 잘 보존하여 후손(後孫)에게 전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시대적 사명이라 여겨진다.
 족보는 문중의 역사이니 기회 있을 때마다 틀린 곳을 고치고, 빠진 곳을 더하여 가문의 내력(來歷)를 온전히 재현(再現)하는 것도 소중히 갈무리하는 일만큼이나 중차대한 일이거늘 병진년(丙辰年)(1976(一九七六)년)에 평해황씨 대동보(大同譜)를 낸 이후로 가첩(家牒)을 제대로 보수하지 못했다.
 급변하는 현대사회의 1(一)개월은 지난날의 1(一)년에 버금가며, 세상의 빠른 변화가 사람들의 관심거리까지 분산시키는지 조상의 행적을 살피고 그 얼을 이어받아 삶의 지표로 삼으려는 노력은 후대로 갈수록 점점 약해지는 듯하다. 이러한 변화에 대한 위기감도 우리가 족보 편찬을 서두르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현재와 미래의 세대들은 이 가첩을 통해 우리 가계(家系)의 영속성을 인식(認識)하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함으로써 지역, 사회, 국가, 세계로 발돋움하는 교두보(橋頭堡)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바야흐로 집에 앉아서 전 세계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국제화(國際化)ㆍ정보화(情報化) 시대가 도래했지만 세계를 향한 비상(飛翔)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에 든든한 디딤발을 두어야만 가능(可能)한 일이다. 지구촌 방방곡곡이 인터넷 정보망으로 연결되어있고 세계가 한 울타리의 카테고리 속으로 연결되는 추세에 발맞추어 종친들이 전 세계 모든 나라에 진출하여 역량을 발휘(發揮)하고 있는 현실에 부응하여 인터넷 홈페이지를 개설(www.hwang.or.kr)하였으며 실시간으로 채팅을 할 수 있고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선조등의 문화유산(文化遺産)을 동영상으로 볼 수 있는 SYSTEM을 갖추었다.
 임오보(壬午譜) 간행은 선조들의 숭고한 얼을 본받으면서도 변화하는 시대의 새로운 욕구를 충족할 수 있도록 하는데 주안점을 두었고, 다음과 같은 편제상(編制上)의 특징을 가진다. 첫째, 역사적 사실을 기록함에 있어 영조 모년(某年)과 같은 연대기(年代記)를 모두 현재 사용하고 있는 서기(西紀)로 통일하여 선명한 이해를 도우고자 하였다. 둘째, 가족간의 유대의식을 강화하고 가계의 맥락을 일목요연하게 기술하기 위하여 자(子)ㆍ녀(女)를 빠짐없이 기록하였다. 셋째, 후대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행장(行狀)과 묘비명(墓碑銘) 등의 한글표기를 함께 싣고, 기존에 간행한 족보의 서문도 모두 번역하여 실었으며, 묘소ㆍ추원재ㆍ선정비 등의 사진 자료를 첨부(添附)했다. 넷째, 지난날의 활자(活字)인쇄 방식이 지니던 번거로움을 피하고, 앞으로의 보완작업이 원활할 수 있도록 컴퓨터 족보편집 프로그램을 적극 활용하여 색인부에서 자신의 선조를 쉽게 검색할 수 있도록 하였다.
 관향(貫鄕)의 일은 청사(靑史)에 남는 일이기에 노력을 게을리 할 수 없다는 종친들의 불타는 사명감으로 재덕(才德)을 겸비(兼備)한 분들의 면밀한 계획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편찬위원회 실무를 총괄하여 시종(始終) 노고(勞苦)를 낙(樂)으로 삼아주신 집행부임직원(執行部任職員) 여러분들의 노고(勞苦)를 치하(致賀)하고 선인들의 간행취지를 우리말로 꼼꼼하게 옮겨준 강원대학교 학문학과 교수 재국(在國)께 심심한 감사(感謝)를 드리고, 전국(全國)에 산재(散在)해있는 선조들의 묘소(墓所)와 추원재 등의 사진을 촬영하여 편집(編輯)해준 족손(族孫) 병극(秉極)과 최신 족보편집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정성껏 전산화해 준 ㈜가승미디어 이병창(李丙昌) 사장(社長)을 비롯하여 전 직원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기존 가첩(家牒)에서 사실과 다른 내용을 고치고, 이전의 족보(族譜)에 실리지 않은 새로운 가계, 후손들을 보태는데 전심전력을 다하였지만 아직도 부족하고 보완되어야 할 것들이 많을 것이다. 우리 가문(家門)의 구성원들은 물론 강호제현(江湖諸賢)들의 질정(叱正)을 기다린다.
  2002년(二○○二年) 임오(壬午) 8월(八月) 후예손(後裔孫) 한문(漢紋) 삼가 짓다.

※ 한글을 한자에 병기하였음

a-018.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21 08:48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