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진대동보발(丙辰大同譜跋) (1976년)
병진대동보발
대저 상고 시대 성인(요 임금)의 세대에 말하기를 『구족(九族)을 친근히 한 연후에 백성이 이미 화목(和睦)하게 되었고 백성이 화목한 연후에 만방(萬邦)이 화합해서 교화(敎化)되었다』고 했다.
구족을 친근히 하는 도는 가히 사람들이 비로소 그 근원이 출발한 바를 궁구해 보면, 즉 조상을 존경하고 종친들을 공경하고 그 종친들을 공경해서 그 자손들 까지도 화목하여 친형제가 우애하는 것과 같은데 그 구족을 친근히 하는 도가 있다고 하겠다.
대개 이와 같이 하는 도는 일가들을 합쳐서 족보를 닦는 것 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일가를 합쳐서 족보를 닦으면 시조 이후로 세대의 역사적 문서(史籍)와 파의 계통(系統)의 내력이 심목(心目) 사이에 환하게 일목요연하게 되어서 효제(孝悌)하는 정성과 돈목하는 의리가 자연히 감발함에 서로 의논하거나 서로 확증을 하지 않고서도 근심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같게 되고 또 길흉간에 서로 도와서 마침내 천륜을 펴는 성대한 일이 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성씨가 고려조에 시작하여 조선조에 미치자 여러 고을에 흩어져 있어서 소원하게 지남이 오 나라와 촉 나라 사이가 그렇듯이 서로 남남처럼 멀게 지났으니 그 한(恨)됨이 심히 오래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제 문장(공문)을 돌리고 발의(發議)하여 각처에 단자(單子)를 닦아 본즉 집 호수와 어른과 아이들의 많은 숫자가 가히 우리 한족(漢族) 중의 거족이 될만함을 알겠다.
아! 옛날에 우리 학사공께서 처음으로 평해에 터전을 잡아 덕을 심은 것이 더욱 멀리 퍼지자 자손이 널리 번영하여 성대하였고 높은 벼슬이 서로 이어서 빛났고 또 우리 금계공(錦溪公)과 해월당(海月堂) 두 선생의 문장과 도학이 가장 나타나 뚜렷이 빛나고 있으니 실로 영험한 지초(단양, 금계공이 단양군수)의 뿌리와 단샘(예천, 해월공이 예천군수)의 근원이 이치가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종중(宗中)의 여러 중견 어른들이 아는 것도 없고 졸렬한 이사람으로 하여금 그 재정(財政)을 관장(管掌)하게 하고 그 역사(役事)를 도모하라고 했으니 그 책임이 막중하고 또 맨 끝에 발문을 기록하여 그 사실을 서술할 것을 나에게 명령하니 두려운 마음이 이 보다 더 심할 수가 없다.
장차 어떻게 능히 그 시종을 잘 해서 어른들이 또 나를 그렇게 생각해 주는 의리에 보답할 수 있으리오.
망령되이 몇 줄의 글을 초해서 경계하여 화수(花樹)의 정의를 단절되지 않게 하는 것은 다만 족보 만드는 일을 이루느냐 이루지 못하겠느냐 여하에 달려있다.
그러니 가히 두렵지 않겠는가? 가히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병진년(1976(一九七六)) 구월 하순에 후손 영종(永宗)은 삼가 발문을 짓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