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검교공파보 편집후기(壬午檢校公派譜 編輯後記) (2002년)
한 종족(宗族)이 보첩(譜牒)을 편찬(編纂)한다는 뜻은 즉(卽) 성씨(姓氏)에 대(對)한 계대(系代)와 내력(來歷)을 분명(分明)히 밝히고 역대(歷代) 선조(先祖)님들의 업적(業績)을 유지보존(維持保存)하며 같은 피를 받은 동족(同族)끼리 우의(友誼)를 더욱 돈독(敦篤)히 하여 총화발전(總和發展)하는데 그 목적(目的)이 있다고 보겠습니다.
이러한 의도로써 예부터 조상(祖上)님들께서는 생활환경(生活環境)이 지극히 어려운 시기(時期)에도 도보(徒步)로 산(山)을 넘고 강(江)을 건너 천리(千里)길을 멀다하지 않고 전국(全國) 방방곡곡(坊坊曲曲)의 일가들을 찾아 단자(單子)를 4(四) ~ 5년(五年)씩 걸려 닦아 그 내용(內容)들을 목판(木板)에 새겨 정성(精誠)스러이 한지(韓紙)에 한 장 한 장 찍어 책을 메어 우리들 각(各) 가정(家庭)에 반질(頒帙)된 것이 오늘날 우리가 자랑하며 보는 역대(歷代) 보첩(譜牒)인 것입니다.
그러한 보책(譜冊)들을 볼 때마다 우리 조상(祖上)님들께서 이렇듯 숱한 역경(逆境)을 딛고 대대(代代)로 종사(宗史)의 맥(脈)을 이어온 노고(勞苦)에 대(對)하여 진심(眞心)으로 머리숙여 감사(感謝)의 추모(追慕)를 드리는 바입니다.
그러나 조상(祖上)님들의 이러한 취지(趣旨)에도 불구(不拘)하고 한말(韓末) 개화기(開化期)에 접어들면서부터 일제 강점기(日帝時代)와 8ㆍ15(八ㆍ一五) 해방이후(解放以後) 서구화시대(西歐化時代)를 거치는 약(約) 1세기(一世紀)동안은 우리가 세계만방(世界萬放)에 크게 자랑하는 족보(族譜)를 불행(不幸)하게도 소홀(疎忽)하게 취급(取扱)하여 보첩(譜牒)을 소장(所藏)하지 못한 후손(後孫)들이 많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절(時節)에도 그 나름대로 이유(理由)가 있는 것이 국가(國家)나 문중(門中)에서 보첩(譜牒)에 대(對)한 관리(管理)를 하지 않는데다가 생활여건(生活與件)이 곤란(困難)했기 때문에 족보(族譜)를 하지 않아도 아무런 제재(制裁)를 받지 않았으므로 누보자(漏譜者)가 많게 되었다고 사료(思料)됩니다.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 당시(當時)는 대부분(大部分)의 사람들이 식생활(食生活)에 급급(汲汲)하여 어지간히 여유(餘裕)가 있는 집을 빼놓고는 보첩(譜牒)에 관심(關心)을 쓸 여지(餘地)가 없었던 것도 사실(事實)입니다.
종장(宗長)님 여러분!
지금은 세월(歲月)이 많이 변(變)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이제는 생활정도(生活程度)가 식생활(食生活)은 해결(解決)되어 국가차원(國家次元)에서도 전통(傳統)의 주체성(主體性)을 강조(强調)하여 여러 면으로 활발(活潑)하게 역사(歷史) 바로 세우기 운동을 전개(展開)하고 있습니다. 이의 일환으로 각급(各級) 학교(學校)를 통(通)하여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뿌리찾기 운동(運勳)이라』하여 조상(祖上)에 대(對)한 [얼]을 상고(祥考)하는 이때를 즈음하여 우리 황씨(黃氏)도 이에 발맞추어 지난 1976년(一九七六年) 병진보(丙辰譜) 발간시(發刊時) 수단자(修單者)가 약(約) 6천여명(六千餘名)에 불과(不過)하던 것이 이번 수단시(修單時)에는
약(約) 6만여명(六萬餘名)으로 약(約) 10배(十倍) 불어 났습니다.
여기에는 남여(男女)같이 단자(單子)를 닦은 이유(理由)도 있겠습니다만 이만큼 늘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차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또 지평공(持平公)ㆍ대사성공(大司成公)ㆍ훈도공(訓導公)ㆍ중랑장공(中郞將公)ㆍ전서공(典書公)ㆍ서정공(西挺公) 6(六)집이 단결(團結)하여 이렇게 많이 수단(修單)에 참여(叅與)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라고 보아집니다,
참으로 이번 임오보(壬午譜)야 말로 우리 검교공파(檢校公派)로서는 대동보(大同譜)인 것입니다.
이번에 이토록 많은 종인(宗人)들이 수단(修單)에 참여 했음은 본인(本人)들의 성의(誠意)는 물론 각(各) 문중(門中)의 수단(修單)을 맡아보신 여러분들이 심혈(心血)을 기울인 결과(結果)라고 저는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 바입니다.
그동안 일부(一部) 종장(宗長)님들 중(中)에는 편찬(編纂)에 이견(異見)도 있었으나 끝내는 여러 종장(宗長)님들의 현명(賢明)한 종의(宗意)를 한데 모아 성과(成果)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편집위원(編輯委員) 여러분께서 잘 아시다시피 편집과정(編輯過程)에 있어서 훌륭한 보첩(譜牒)을 성질(成帙)시키기 위(爲)하여 2000년(二000年) 7월(七月) 1일(一日)부터 약(約) 2년(二年)여 동안 여러차례의 회의(會議)를 거쳐 현대(現代) 후손(後孫)들이 알아 보기 쉽도록 편집(編輯)하는데 최선(最善)을 다하였습니다.
이렇게 편집(編輯)한 내용을 일일이 다 열거(列擧)하지는 못하나 간단(簡單)하게 몇가지만 예(例)를 들면
1(一), 수권(卷首)에 실려있는 순한문(純漢文)으로 된 문헌일체(文獻一切)를 각(各) 원문(原文)밑에 한글로 해석(解釋)을 붙였으며,
2(二), 연도표시(年度表示)는 왕조연호(王朝年號)와 간지(幹支)로만 된 것을 서기연호(西紀年號)를 첨가(添加)했으며,
3(三), 휘자(諱字)나 함자(啣字) 밑에 국문표기(國文標記)를 했으며,
4(四), 여러 종인(宗人)들이 보첩(譜牒)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색인부(索引簿)를 작성(作成)했으며,
5(五), 정보화시대(情報化時代)를 맞아 앞으로 자라나는 후손(後孫)들을 위(爲)하여『인터넷』검색도 되도록 했으며,
6(六), CD ROM도 재작(裁作)할 수 있도록 하는
등(等) 이외(以外)에도 여러 가지가 수권(首卷)에 상세(詳細)하게 열거(列擧)되어 있사오니 참고(叅考)하시기 바랍니다.
이번 보첩(譜牒)이 획기적(劃期的)으로 편찬(編纂)된데 대(對)하여는 거듭 말씀 드리거니와 편집위원(編輯委員)들과 교정위원(校正委員)들의 각고(刻苦) 끝에 얻은 결과(結果)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특(特)히 강원대학교(江原大學校) 재국(在國) 교수(敎授)는 수권(首卷)의 문헌해석(文獻解釋)에 노고(勞苦)가 많았으며 가승(家乘) 이병창(李丙昌) 사장(社長)과 직원(職員)들의 많은 배헌(配憲)에도 심심(深深)한 감사(感謝)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렇듯 편찬(編纂)된 보첩(譜牒)은 우리 종사(宗史)에 영구히 기록(記錄)될 임오보(壬午譜)로 탄생(誕生)된 것입니다.
1질(一帙)의 보첩(譜牒)이 성질(成帙)되어 보책(譜冊) 말미(末尾)에 편찬과정(編纂過程)을 상세(詳細)히 기록(記錄)할 글을 붙여야 하는데 이는 우리 문중(門中)에 유능(有能)한 종장(宗長)님들이 많이 계심에도 불구(不拘)하고 불초(不肖)한 저에게 말을 하라고 한 것은 편찬과정(編纂過程)에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叅與)해서 전말(顚末)을 잘 알고 있을 것으로 믿고 부탁하는 만큼 사양(謝讓)하지 못하고 외람되게 사실(事實)대로 몇마디 글을 써서 붙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이 보첩(譜牒)을 소장(所藏)한 후 보첩(譜牒)을 중심(中心)으로 한데 뭉쳐 선대(先代) 현명(賢明)하신 조상(祖上)님들의 유지(遺志)에 어긋남이 없이 천추만대(千秋萬代)에 무궁(無窮)한 발전(發展)을 기원(祈願)하면서 편찬사(編纂辭)에 가름합니다.
서기(西紀) 2002년(二000二年) 임오(壬午) 8월(八月) 일(日)
후예손(後裔孫) 무섭(武燮)1) 근서(謹書)
※ 한글을 한자에 병기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