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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헌대부공조판서미균황선생신도비(資憲大夫工曹判書米困黃先生神道碑)
자헌대부 공조판서 미균 황선생 신도비
옛날 강헌대왕(康獻大王)때에 자헌대부 공조판서 미균(未困)선생이 있었으니 사적(事跡)과
문헌(文獻)이 반드시 세상에 전해질 만한 것이 있었을 것인데 여러 차례 난리를 겪는 동안
불타서 유적(遺跡)이 없어지고 묘소도 영주(榮州) 동쪽 두월리(斗月里) 덕동산(德洞山)
을좌원(乙坐原)에 있었으나 자손들이 갈리어 흩어지고 연대가 더욱 오래되어 플 베는 아이나
목동(牧童)들의 입으로 여기가 황공의 산소라고 하는 구전(口傳)은 있었으나 눈으로 상세하게
징험을 거치지는 못하고 지나오고 있다.
아! 슬프도다. 세월이 너무나 오래되었구나. 당당한 여러 자손의 조상인데 어찌 높이 받들어
들이는 법이 없어서야 되리오. 이에 갑진(甲辰)(1424(一四二四))년 윤달에 여러 종친들이 제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받든지가 이미 수백년이나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의믈(儀物)과 사적(事跡)을 갖추지 못한 까닭으로 후손들이 한(恨)이 되고
있었는데 이제 무오년(一九七八) 가을 멀리 또는 가까이 살고 있는 여러 종친들이 함께
상의하여 돌을 잘라 다듬어 곧 신도비(神道碑)를 세우려고 하였다.
그 후손인 세섭(世燮) 선비가 두암 김공(斗庵金公)이 지은 단비문 한편을 싸가지고 나에게
찾아와 그 비의 명(銘)을 짓기를 청하거늘 생각하건대 두암(斗庵)공은 즉 조선 중세의 유학자로
크게 덕망이 높은 분이니 모든 근거를 상고(詳考)하여 심히 확고하게 글을 지었을 것이니
의당 후세에 신빙성 있고 만족하게 갖추어있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 부족하고 보잘 것 없고 글이 짧은 나 진수(晉秀)에게 지나치게 무거운
책임을 맡기니 어찌 함부로 사실에 없는 것을 더하거나 빼어 찬양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진실로 한사코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삼가 상고하건대 공의 휘는 유정(有定)이요 호는 미균(米菌)이고 황씨(黃氏)인데 본관은
평해(平海)이고 고려태자검교(高麗太子檢校) 휘 온인(溫仁)은 그의 시조이다.
4(四)대를 내려와 진(進)은 고려조에 검교rns자감(檢校軍資監)의 벼슬을 하였고 다음 대는
지정(之挺)이며 또 다음 대는 원로(原老)이니 호가 칠림정(七林亭)인데 과거에 올라
영해부사(寧海府使)가 되었고, 다음 대는 근(瑾)인데 문과에 올라 직제학까지 했으니 공(公)에게는
고조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가 된다.
공은 원나라 지정(至正) 3(三)년(1343(一三四三)) 계미(癸未)에 출생하여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한성부윤(漢城府尹)이 되었고, 예조(禮曹)와 형조(刑曹)의 판서(判書)를 역임했다.
젊어서부터 늙기에 이르기까지 논어(論語) 일부(一部)를 애송(愛誦)하셨으니 세상에서
미균(米囷)(: 쌀창고)선생이라고 칭찬하였다. 시문(詩文)은 당(唐)나라 풍조(風調)가 있었다.
벼슬에 나아가 조정 내직과 외직을 거치고 만년에는 병을 이유로 관직을 사양하고
낙향하여 집 이름을 소쇄헌(掃灑軒)이라고 현판을 구성산(龜城山)아래 있는 집에 달았으니 곧
삼판서(三判書) 옛집이 바로 여기다. 배(配)는 정부인(貞夫人)으로 봉화정씨(奉化鄭氏)이니
형부상서(刑部上書) 운경(云敬)의 딸이다. 3(三)남 1(ㅡ)여를 낳았으니 장남은 전(銓)인데
지평(持平)에 천거되었고, 차남은 현(鉉)이니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고 삼남은
연(鋋)이니 생원으로 훈도(訓導)요, 딸은 선성(宣城)김씨 소량(少良)에게 출가했는데 소량은
현령(縣令)이요, 병조판서에 증직(贈職)되었다. 전(銓)의 아들은 맹하(孟夏)니 생원이요,
둘째 아들 중하(仲夏)는 둘째 삼촌 현(鉉)의 후사로 출계(出系)하였다. 셋째 아들 계하
(季夏)는 감찰(監察)이다. 전(銓)의 딸은 안동권씨 효건(孝騫)에게 출가했는데 그는
진사(進士)다. 현(鉉)의 아들은 중하(仲夏)인데 생원이요, 손자(仲夏의 손자) 계옥(啓沃)이니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教)로 호(號)가 초곡(草谷)이다. 연(鋋)의 아들은 말손(末孫)이니
선교랑(宣教郎)이고 김소량 현령(公의 사위)의 아들은 담(淡)인데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이조판서였고, 시호(諡號)는 무절(文節)이다.
증손에 준량(俊良)이 있으니 문과(文科)로 군수이고 세상에서 금계선생(錦溪先生)이라고 불리었다. 또 연(鋋)의 아들은 계손(季孫)인데 학관(學官)이었고, 딸은 영천(永川) 이씨 오(塢)에게 출가했는데 그는 직제학(直提學)을 지냈다.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오호라! 공(公)의 태어난 세대(世代)가 오래 되었으니 바탕이 된 성품과 언행을 어떻게 상세히 알 수가 있으리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공은 항시 부지런해서 논어(魯傳)를 읽어 가히 모습과 언행의 아름다움과 실천이 돈독함을 알겠도다.
평화로운 세상을 두루 겪어 내직과 외직을 들날렸으니 또한 안고 있는 포부가 실(實)했고 경제(經濟)가 확충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당시에 조야(朝野)에서는 공의 시문을 논평하여 당나라 풍조가 있다고 하였고, 문장과 사행(事行)이 이미 세상에 나타났으니 가히 여기에서 백세(百世)까지 원대하게 전해갈 것을 가히 상상할 수 있다. 그러니 어찌 우둔한 말로 자질구레하게 군더더기 같은 말로 더 보태어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에 명(銘)을 짓노라.
명에 이르기를,
懿歟米老 아름답도다! 미균옹(未困翁)이여
邵代碩德 태평성대의 높은 덕망가였구나!
爱入國初 이에 조선 초에 들어와
擢拜崇爵 높은 관작(官爵)에 임명되었도다.
工深魯傳 공부는 논어(魯傳)에 깊었고,
詩合唐調 시(詩)는 당(唐)나라 풍조에 합치되었도다.
德業文章 덕업과 문장이
宜顯于世 지금 세상에 나타나야 마땅하나
間經兵燹 그 동안 병화(兵火)를 겪게 되자
家乘幾掃 집안의 역사가 거의 다 없어지고,
暨及墓所 묘소도 (매 한가지로)
久闕守護 오랫동안 수호를 못하니
兩世封塋 두 대(두代)의 무덤이
難析疑信 구분하기 어렵게 되었구나.
乃築祭壇 이에 제단(祭壇)을 쌓았으니
焄享歲薦 대대로 향불을 사루어 해마다 제향을 올리노라。
今竪顯碑 이제 뚜렷한 비를 세워서
昭揚厥蹟 그 자취를 밝게 선양하는 도다.
雲仍增悵 자손들은 슬픔을 더할 것이겠고,
路人必式 길가는 사람들은 반드시 허리 굽혀 예의를 표할 것이네
我銘其最 가장 단단한 좋은 돌에 새겨서
永詔千歷 그 가장 뛰어남을 영원한 미래에 천년에 갈 것을 말하노라.
단기 4311(四三一一년)(1978(一九七八)) 무오 1(一)월
연성후인(延城後人) 김진수(金晉秀) 삼가 짓고.
인동후인(仁同後人) 장건덕(張建德)은 삼가 쓰고.
19대손(一九代孫) 병익(秉益) 삼가 제(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