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자휘헌묘갈명(副正字諱[土憲]墓碣銘)
부정자 휘 헌 묘갈명
우리나라 과거제도의 폐지는 광무(光武) 갑오(甲午) 1894(一八九四)년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80(八十)년이되었으니 후배나 신진들이 거의 그 연혁의 유구함을 알지 못한 것이
오래되었다. 이내 풍기(豊基) 고을에 황정자(黃正字) 휘(諱) 헌([土憲]) 자(字) 경도(景度)가
있는데, 공(公)은 과거가 폐지되기 전에 태어나시어 98(九十)八세의 수를 누리셨다.
당시 문과(文科)에 급제하신 분을 둘러서 찾아보면 전극을 통틀어 오직 한 분이시니 이
얼마나 대단하신가!
나는 일찍이 공의 명성을 듣고 흠모하여 매번 왕래하는 사람을 통해 서신을 주고 받았으며
공이 돌아가심에 이르러 글을 부쳐 애도했는데, 지금 다시 공의 분묘에 명문(銘文)을 쓰게 되니
북받쳐 오르는 슬픔을 누를 길 없다. 황씨(黃氏)의 선조는 중국에서 왔는데, 당(唐) 한림학사(翰林學士) 낙(洛)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평해(平海)에 이르러 관적(貫籍)을 삼았다.
중세(中世)에 영천(榮川)(: 풍기(豊基))으로 옮겼으며, 금계(錦溪) 선생(先生) 휘(諱) 준량(俊良)은 도사(陶山) 이황(李滉) 문하의 높은 선비로 사림(士林)들이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공은 그 분의 후손이시다.
증조부는 휘(諱)는 이린(漓鱗)이고, 조부의 휘(諱)는 석주(奭周)로 진사(進士)이며, 부친은 세진(世鎭)으로 호는 죽한당(竹閑堂)이며, 모친은 진성(眞城) 이씨(李氏)로 퇴계(退溪) 선생(先生)의 후손 만기(晩箕)의 따님이다. 고종황제(高宗皇帝) 을해(乙亥) 1875(一八七五)년(年)에
태어나셨는데, 용모가 주수하고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으며 시와 문장에 능하여 명성을
크게 떨치셨다. 17(十七)세 때인 신묘(辛卯) 1891(一八九一)년(年)에 별시(別試)에 응시하여
일거에 합격하시니
사람들이 모두 공의 빠른 급제를 축하했다. 이듬해에 권지(權知)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가 되었고 임시로 주서(注書)의 직책도 맡으셨는데 뛰어난 재주로 동료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했다. 그러나 당시에 적신(賊臣)이 권력을 잡아 사람을 재능에 따라 등용하지
않는지라 능력있는 사람들이 두루 기용되지 못했다.
또한 왜국 오랑캐들이 그 틈을 타서 권력을 좌우하며 해악을 끼치니 갑오(甲午) 1894(一八九四)년(年)에
관방(官方)을 고친 일과 을미(乙未) 1895(一八九五)년(年) 궁중의 변고가 이에 일어났고,
마침내 을사(乙巳) 1905(一九○五)년(年)의 불평등한 협약과 경술(庚戌) 1910(一九一○)년(年)의 국치(國恥)에 이르게 되었음은 물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공은 스스로 시국을 헤아려 어떻게 할 수 없음을 알고, 더욱 그릇된 행동을 삼가고
의(義)를 굽히지 않으셨다. 마침내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시어 살던 마을의 이름인
육금(郁錦)에서 취하여 자호(自號)를 금주(錦洲)라 하고 일체 바깥 나들이를 하지 않고
지내시며 금계(錦溪) 선조(先祖)를 그리워하셨다. 집안에서 늘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셨다.
『오백 년 종묘사직이 이에 멸망하고, 수천만 백성들이 영원히 회생할 가망이 없구나!』 일찍이 시를 지어 스스로 읊으시기를 『翠蕨羞霑周雨露 푸른 고사리도 비와 이슬에 젖기를 부끄러워
하고, 丹心不改韓衣冠 붉은 마음은 우리나라 의관을 고치지 않으리』라고
하셨다. 또한 때때로 〈출사표(出師表)〉와
〈양보음(梁甫吟)1)〉을 읊으시며 울분을 쏟아내기도 하셨다.
그러자 왜놈 앞잡이들이 이것을 듣고 사람을 보내 사실 여부를 조사하고 또한 사진을 찍고
녹음을 해서 가려했다. 공은 곧바로 이치를 들어 말하길 『망국(亡國)의 적포로 신세에 무슨 전할
말이나 모습이 있겠나?』하시며 엄격히 그들을 막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손들이 심히
많았는데 혹 신학문 배우는 것을 권하는 자가 있으면 공은 엄히 막고 허락하지 않으며
말씀하셨다. 소위 신학문이라는 것은 무뢰한 사람들의 도이며, 단지 원수와 적들 앞에 노
예의 얼굴을 하고 노비처럼 굽신거리게 될 뿐이니, 이것을 어찌 참을 수 있겠나?』공은
집안에 계실 때면 인륜을 돈독히 하고 조상을 받들고 아랫사람들을 거느리며 한결같이
법도를 지키셨다. 책상 위에는 항상 옛 경전(經典), 자서(子書), 사서(史書)를 펼쳐두고
밤낮으로 읽으며 쉬지 않으셨고, 혹 후생이나 찾아온 학자들을 지도하시고, 혹 먼저 자문을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조언을 해주기도 하셨다.
연세가 높아질수록 덕망도 더불어 높아지셨고, 살림이 줄어도 뜻은 축소되지 않으셨으니
마을 사람들이 공을 의지하며 중히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포악하고 태만한 자도 공에게는
공손하게 대할 줄 알았고, 다툼이 있는 사람들은 법원으로 가지 않고 왕왕 공에게 와서
판결을 구했으니 공의 높은 덕망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래서 특별히 이 글을 써서 후인들에게 분명히 밝혀도 공의 조선 관리로서의 위엄에는
해가 되지 않으리라 본다.
공은 세 번 혼인을 하셨다. 첫째 부인은 숙인(淑人)나주(羅州) 정씨(丁氏) 대홍(大洪)의 따님이시며, 둘째 부인은 숙인(淑人) 함양(咸陽) 박씨(朴氏) 준석(俊碩)의 따님이신데 모두 자식이 없었다.
셋째 부인은 숙인(淑人) 영양(英陽) 김씨金氏) 석환(錫煥)의 따님이신데 4(四)남 3(三)녀를 낳으셨다.
아들은 병룡(秉龍), 병봉(秉鳳), 병린(秉麟), 병구(秉龜)이고, 사위는 오건조(吳鍵祚),
권희(權熺), 이동택(李東澤)이다. 병룡(秉龍)은 아들 천섭(天燮)을 두었고, 딸은
김재구(金在救)에게 시집을 갔다. 병봉(秉鳳)은 아들 태섭(泰燮), 정섭(鼎燮)을 두었다. 병린(秉麟)은
무섭(武燮), 원섭(元燮), 흥섭(興燮)을 두었고, 딸은 김광열(金光烈)에게 시집을 갔다.
병구(秉龜)는 아들 한섭(漢燮), 우섭(虞燮)을 두었고, 딸은 박형수(朴亨秀)에게 시집을
갔다. 증손, 현손 이하는 자손이 많으니 열록(例錄)에 의함이 마땅하다.
공이 돌아가신 해는 우리나라 광복 28(二十八)년 임자(壬子) 1972(一九七二)년(年) 4(四)월 상순이며, 장지는
풍기(豊基) 내미곡(內味谷)의 풍치 좋은 곳으로 공의 유언을 따랐다. 장자 병룡(秉龍)이 공의
유사(遺事)를 초안하여 이웃 사람 강신혁(姜信赫)에게 부탁하여 행장(行狀)을 쓰게 했는데
이미 완성되었다.
일전에 막내 병구(秉龜)가 신혁(信赫)군과 함께 와서 이것을 보여주며 청하길래,
그 원본을 살피고 요점을 간추려서 위처럼 썼다.
인하여 명(銘)을 덧붙이노니
尊兼三達 존귀함은 3달(三達)(작(爵), 치(齒), 덕(德))(: 지위, 연세, 덕행)을 겸하셨고,
名動衆聽 명성은 뭇 사람들에게 떨치셨으며,
如虎在山 호랑이가 산에 있는 듯하고
如蘭播馨 난초가 향기를 풍기는 듯하며
天佑完人 하늘이 인사(人事)를 마칠 수 있도록 도우시어
歸之永寧 영원한 안식으로 돌아가시니
有銘于石 돌에 명(銘)을 새겨
尙徵典刑 법도로 숭상하고 밝힌다.
의성(義城) 김황(金榥)이 쓰다.
제(齊)나라 경공(景公)에게 용사(勇士)가 있었으니, 진개강(陳開彊)과 고야자(顧冶子)ㆍ공손첩(公孫捷) 세 사람이었다. 안영(晏嬰)이 말하기를 “대왕은 복숭아 세 개를 따서 그 중에 하나는 직접 드시고 나머지는 세 용사로 하여금 각각 공(功)을 말하게 하여 높은 자에게 하나씩 주소서.” 하였다. 이에 진개강과 고야자가 먹었는데 공손첩이 부끄러워 스스로 목을 찔러 죽자, 진개강과 고야자는 부끄러운 마음을 품고 또한 따라서 목을 찔러 죽었다.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제(齊)나라 성을 거닐다가 이들의 세 무덤을 보고 이 시(詩)를 지어 한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