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보총편(世譜總編)
세보 총편(世譜總編)
평해군(平海郡)
동쪽으로 영해까지 7(七)리 남쪽으로 경북 영덕군 경계까지 24(二四)리. 서쪽으로 경북 영양군
경계까지 51(五一)리 북쪽으로 울진 경계까지 38(三八)리요. 서울과 6백60(六백六○)리 떨어져 있음.
본래 고구려 척을어현(斥乙於縣)인데 고려 초에 지금의 이름(평해)으로 바뀌었다.
현종(顯宗) 때에는 예주(禮州)에 속하였고 명종(明宗) 2(二)년(서기(西紀) 1172(一一七二))년에는 감무(監務)를
설치했고 충열왕 때는 이 고을 사람 황서(黃瑞)가 왕(王)을 따라 원(元)나라에 들어간
것으로 인하여 익대공신(翊戴功臣)이 되었으므로 이 현(縣)이 군(郡)으로 승격되었다.
조선조에서 이로 인해 책임 관료 이름을 군수(郡守)로 칭하게 되었다. 군(郡) 이름을 척을
어(斥乙於)하였으며 또 군 이름을 기성(箕城)이라 하였다.
시조 황락(始祖黃洛)
평해지(平海誌)에 적힌 바를 상고해 보면 신라조에 황장군과 구(丘)장군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어 동해로부터 배를 타고 평해 월송까지 이르러 산을 만들고 굴산(堀山) 북쪽
언덕에 살았는데 황씨로 평해에 관향을 한 사람은(평해황씨 사람은) 모두 이 사람 (황락)을
시조로 삼는다. 또 서애(西崖) 문충공(유성룡) 기사(記事)를 살펴보건데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四) 서기(西紀) 28(二八)년에 학사(學士) 황낙(黃洛)이 구(丘)장군 대림(大林)과 더불어 비로소 동국(東國)에 살았다.
후세에 갑고(甲古) 을고(乙古) 병고(丙古) 삼형제가 있어서 갑고(甲古)는 기성군(箕城君)이
되고 을고(乙古)는 장수군(長水君)이 되고 병고(丙古)는 창원백(昌原伯)이 되었다 등등」이라고
적혀 있다. 또 응교(應敎)였던 호가 초곡(草谷)인 황계옥(黃啓沃)공의 가첩(家牒)에 의하면
당나라 고종(高宗) 용삭(龍朔) 8(八)년(원래 용삭은 3(三)년 밖에 없었다. 오자인 듯(661(六六一) ~ 663(六六三))) 신라 문무왕 8(八)년(668(六六八))에 공(公)과 당(唐)나라 장군 이세적(李世勣)이 함께 동국에
들어왔다고 되어있다. 공은 즉 세적의 사위이다.
공은 그리하여 예국(穢國)(: 강릉) 기성(箕城) 남쪽 해안에 살게 되었는데 국학진사(國學進士)가
되었다. 근세에 와서 함남(咸南)의 이원(利原) 땅 강성우(姜聖宇) 집에 있는 만성보(萬姓譜)를
살펴보면 황씨 세계(世系)는 학사공으로부터 금오공(金吾公)(: 금오장군) 때까지 중간 5대(五代)의
성(姓)과 이름(諱)과 관직(官職)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고, 그리고 동쪽으로 배를 타고 온
연호 역시 초곡 가첩의 것과 동일하게 적어 놓고 있다.
대개 한나라에는 학사(學士)라는 칭호는 없고 당나라 조정에서 비로소 있으니 초곡의
자손 집에 가지고 있는 세첩(世牒)은 강씨 집에 있는 연대(年代)와 또한 서로 일치된다.
당나라 조정 때 동국에 살았다는 것은 믿을 만한 사적인 것 같다.
그러나 중간 세대의 차서(次序)는 즉 학사공(學士公)이 동쪽으로 배를 타고 건너 온 때인
신라 문무왕 8(八)년부터 문절공(文節公) 고려 충열왕 때까지가 600(六○○)여년이 되니 연대의
차가 어찌 9세(九世)에 그치고 있겠는가! (9세(九世)면 약 270(二七○)년 인데) 이는 대충 생각해도 신빙성이 없다. 잠시 세대(世代)의 차서(次序)를 기록하여 뒷날 고증의 근거를 삼아보자.
시조(始祖) 황락(黃洛) : 벼슬 학사, 당나라 고종 8(八)년 비로소 동국 평해현에 기거.
부인(配)은 이씨이며 당나라 이세적의 딸
이세(2세(二世)) 곤리(坤离) : 학사
삼세(3세(三世)) 삼마(三磨) : 문하시랑
사세(4세(四世)) 인구(仁君) : 학사
오세(5세(五世)) 수선(守先) : 문하시랑
육세(6세(六世)) 갑고(甲古)(: 기성군(箕城君)), 을고(乙古)(: 장수군(長水君)), 병고(丙古)(: 창원백(昌原伯))
칠세(7세(七世)) 온인(溫仁) : 태자검교
고려 말 이래로 바다 도적들이 몰려와서 묘소(의리지장(衣履之藏)1)) 역시 잃게 되어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고로 월송(月松)(또는 월송(越松))의 옛터에 단(壇)을 건축하고 매년 10(一〇)월 중순에 여러 자손들이
함께 모여 제사를 지내고 늘 상향(尙饗)을 한다.
그때 축문(祝文)에는 「중국조정에서 벼슬을 하고 바다에 뗏목을 타고 동으로 와서 능히
번창하게 하였으니 만세에 조종(祖宗)이 됨이로세」라고 되어 있다.
옛날이라 비갈도 없고 재사(齋舍) 전답(祭田)도 없어서 숭정(崇禎) 연호 후 두 번째
갑술년에 청안(淸安)(: 충북에 있음)의 여러 종친들이 비(碑)를 세우기로 의논을 모으고 그
후 기미년 봄에 다시 종회(宗會)에서 의논하여 재사(齋舍)를 건립하고 제전(祭田)을
장만하여 선조의 단(壇)을 수호하기로 했다.
고래(古來)의 단재(壇齋)가 쇠락해져 여러 자손들이 건의하고 성금을 모아 정미년에 재각
(齋閣)을 증축하고 을묘년에 옛날 재사(齋舍)를 다시 수리하였다.
가을이 되어 기성군(箕城君)과 금오공(金吾公)과 소윤공(少尹公)의 단(壇)에 위패(位牌)를 설치하고 다음해 봄에 단의 문을 구축함으로 윗분들을 배향(配享)하고 제사를 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