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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122

세보총편(世譜總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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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譜總編
平海郡東至海岸七里南至慶北盈德郡界二十四里西至慶北英陽郡界五十一里北至蔚珍界三十八里距京六百六十里本高句麗斥乙於縣高
 麗初改今名顯宗時屬禮州明宗二年置監務忠烈王時以縣人黃瑞從王入元有翊
 戴功陞縣爲郡本朝因之官員郡守〇郡名斥乙於〇箕城
始祖黃洛
 按平海誌云新羅朝有稱黃將軍丘將軍者自東海舟到于平海月松造山補缺居於
 崛山北原而黃之貫平海者皆鼻祖於此人云云〇又按西崖柳文忠公記事云漢光武
 建武四年學士黃洛與丘將軍大林始居東國後世有甲古乙古丙古三兄弟而甲古爲
 箕城君乙古爲長水君丙古爲昌原伯云云〇又按應敎草谷公黃啓沃家古來之世牒云唐高宗
 龍朔八年新羅文武王八年戊辰公與唐將李世勣同入東國公即世勣之婿也公因居
 穢國箕南海岸爲國學進士云穢卽江陵箕卽箕城縣近世按咸南利原姜聖宇家萬姓譜黃氏
 世系則自學士公至金吾公詳載中間五代姓諱及官職而東舟年號亦同草谷家牒盖
 漢無學士之稱而唐朝始有之且草谷則子孫家世牒而姜氏家年代又相符合唐朝之
 入居東國似爲信蹟然但中間代序自學士公東渡時新羅文武王八年至文節公高
 麗忠烈王朝洽爲六百有餘年年代之差豈止於九世乎此不可遽爲憑信而姑記世
 以備後日之考據

始祖黃洛子 坤离子 三磨子 仁君子 守先子 甲古子 溫仁
 官學士
唐高宗龍朔
 八年始居
 東國平海
 縣
配李氏唐貞
 武公世勣
 女
學士 門下侍郞 學士 門下侍郞 箕城君 太子檢校
子 乙古
長水君
子 丙古
昌原伯

 自麗季以來海寇充斥衣履之藏亦失其傳故築壇月松遺墟每歲十月中丁士庶諸
 孫齊會祭祀其常饗祝文曰中朝玉佩桴海而東克開克昌萬世爲宗古無碑且無祭
 田 崇禎再甲戌平海豊基淸安諸宗建議立碑其後己未春復因宗議建齋置田守
 護先壇〇按古來之壇齋剝落諸孫建議鳩財丁未增築齋閣乙卯重修舊齋當秋增
 設位箕城君金吾公少尹公侍中公壇翌春構壇門以配享行祀焉


 세보 총편(世譜總編)

평해군(平海郡) 동쪽으로 영해까지 7(七)리 남쪽으로 경북 영덕군 경계까지 24(二四)리. 서쪽으로 경북 영양군 경계까지 51(五一)리 북쪽으로 울진 경계까지 38(三八)리요. 서울과 6백60(六백六○)리 떨어져 있음.
 본래 고구려 척을어현(斥乙於縣)인데 고려 초에 지금의 이름(평해)으로 바뀌었다.
 현종(顯宗) 때에는 예주(禮州)에 속하였고 명종(明宗) 2(二)년(서기(西紀) 1172(一一七二))년에는 감무(監務)를 설치했고 충열왕 때는 이 고을 사람 황서(黃瑞)가 왕(王)을 따라 원(元)나라에 들어간 것으로 인하여 익대공신(翊戴功臣)이 되었으므로 이 현(縣)이 군(郡)으로 승격되었다.
 조선조에서 이로 인해 책임 관료 이름을 군수(郡守)로 칭하게 되었다. 군(郡) 이름을 척을 어(斥乙於)하였으며 또 군 이름을 기성(箕城)이라 하였다.

시조 황락(始祖黃洛)
 평해지(平海誌)에 적힌 바를 상고해 보면 신라조에 황장군과 구(丘)장군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어 동해로부터 배를 타고 평해 월송까지 이르러 산을 만들고 굴산(堀山) 북쪽 언덕에 살았는데 황씨로 평해에 관향을 한 사람은(평해황씨 사람은) 모두 이 사람 (황락)을 시조로 삼는다. 또 서애(西崖) 문충공(유성룡) 기사(記事)를 살펴보건데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四) 서기(西紀) 28(二八)년에 학사(學士) 황낙(黃洛)이 구(丘)장군 대림(大林)과 더불어 비로소 동국(東國)에 살았다.
 후세에 갑고(甲古) 을고(乙古) 병고(丙古) 삼형제가 있어서 갑고(甲古)는 기성군(箕城君)이 되고 을고(乙古)는 장수군(長水君)이 되고 병고(丙古)는 창원백(昌原伯)이 되었다 등등」이라고 적혀 있다. 또 응교(應敎)였던 호가 초곡(草谷)인 황계옥(黃啓沃)공의 가첩(家牒)에 의하면 당나라 고종(高宗) 용삭(龍朔) 8(八)년(원래 용삭은 3(三)년 밖에 없었다. 오자인 듯(661(六六一) ~ 663(六六三))) 신라 문무왕 8(八)년(668(六六八))에 공(公)과 당(唐)나라 장군 이세적(李世勣)이 함께 동국에 들어왔다고 되어있다. 공은 즉 세적의 사위이다.
 공은 그리하여 예국(穢國)(: 강릉) 기성(箕城) 남쪽 해안에 살게 되었는데 국학진사(國學進士)가 되었다. 근세에 와서 함남(咸南)의 이원(利原) 땅 강성우(姜聖宇) 집에 있는 만성보(萬姓譜)를 살펴보면 황씨 세계(世系)는 학사공으로부터 금오공(金吾公)(: 금오장군) 때까지 중간 5대(五代)의 성(姓)과 이름(諱)과 관직(官職)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고, 그리고 동쪽으로 배를 타고 온 연호 역시 초곡 가첩의 것과 동일하게 적어 놓고 있다.
 대개 한나라에는 학사(學士)라는 칭호는 없고 당나라 조정에서 비로소 있으니 초곡의 자손 집에 가지고 있는 세첩(世牒)은 강씨 집에 있는 연대(年代)와 또한 서로 일치된다.
 당나라 조정 때 동국에 살았다는 것은 믿을 만한 사적인 것 같다. 그러나 중간 세대의 차서(次序)는 즉 학사공(學士公)이 동쪽으로 배를 타고 건너 온 때인 신라 문무왕 8(八)년부터 문절공(文節公) 고려 충열왕 때까지가 600(六○○)여년이 되니 연대의 차가 어찌 9세(九世)에 그치고 있겠는가! (9세(九世)면 약 270(二七○)년 인데) 이는 대충 생각해도 신빙성이 없다. 잠시 세대(世代)의 차서(次序)를 기록하여 뒷날 고증의 근거를 삼아보자.

 시조(始祖) 황락(黃洛) : 벼슬 학사, 당나라 고종 8(八)년 비로소 동국 평해현에 기거. 부인(配)은 이씨이며 당나라 이세적의 딸
 이세(2세(二世)) 곤리(坤离) : 학사
 삼세(3세(三世)) 삼마(三磨) : 문하시랑
 사세(4세(四世)) 인구(仁君) : 학사
 오세(5세(五世)) 수선(守先) : 문하시랑
 육세(6세(六世)) 갑고(甲古)(: 기성군(箕城君)), 을고(乙古)(: 장수군(長水君)), 병고(丙古)(: 창원백(昌原伯))
 칠세(7세(七世)) 온인(溫仁) : 태자검교
 고려 말 이래로 바다 도적들이 몰려와서 묘소(의리지장(衣履之藏)1)) 역시 잃게 되어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고로 월송(月松)(또는 월송(越松))의 옛터에 단(壇)을 건축하고 매년 10(一〇)월 중순에 여러 자손들이 함께 모여 제사를 지내고 늘 상향(尙饗)을 한다.
 그때 축문(祝文)에는 「중국조정에서 벼슬을 하고 바다에 뗏목을 타고 동으로 와서 능히 번창하게 하였으니 만세에 조종(祖宗)이 됨이로세」라고 되어 있다.
 옛날이라 비갈도 없고 재사(齋舍) 전답(祭田)도 없어서 숭정(崇禎) 연호 후 두 번째 갑술년에 청안(淸安)(: 충북에 있음)의 여러 종친들이 비(碑)를 세우기로 의논을 모으고 그 후 기미년 봄에 다시 종회(宗會)에서 의논하여 재사(齋舍)를 건립하고 제전(祭田)을 장만하여 선조의 단(壇)을 수호하기로 했다.
 고래(古來)의 단재(壇齋)가 쇠락해져 여러 자손들이 건의하고 성금을 모아 정미년에 재각 (齋閣)을 증축하고 을묘년에 옛날 재사(齋舍)를 다시 수리하였다.
 가을이 되어 기성군(箕城君)과 금오공(金吾公)과 소윤공(少尹公)의 단(壇)에 위패(位牌)를 설치하고 다음해 봄에 단의 문을 구축함으로 윗분들을 배향(配享)하고 제사를 행했다.

1)
의리지장(衣履之藏): 실제로 묘안에 시신(屍身)을 묻지 않은 장례
a-122.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6/27 11:33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