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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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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平海黃氏世譜序
黃之著於東國古矣自新羅始建六姓之後根蔓葉布世為大姓分係籍鄉如 鐵原昌原長水箕城是其表表者而其中箕城之黃最遠且久未知其初始於 何人也諺傳羅代上世有黃將軍者與丘將軍同時入來黃則居越松北麓至 今有黃將軍址丘則泊丘尾北浦因名丘尾津皆載於郡誌然世代荒朴文籍 無徵意黃姓始源於此而今未可遽以為證大概昌長兩黃由平而分屬云其 初一祖亦可想也自入麗初歷代隆顯文武相望名公鉅卿至我朝猶班班可 見苟非祖先深仁厚澤培植而積漸曷能數百載傳其閥而世其業耶信乎有 植則有獲有說則有流彼時必有相傳信譜而麗季海寇衝斥竹嶺以南舉為 賊數人皆避亂北徒所有青氈盡燹無餘吁可惜也然我姓之遍於朔方亦始 於此時而其後黃象歸窆文川郡因而又蕃至於散處各邑者僅一髮比而猶 不絕亦幸也顧以失譜無聞之故其城子孫分為兩派各祖其祖實未知其初 一祖者何人互為婚媾而恬無愧恥此豈非大幸中之大不幸耶黃瑞以翊戴 元勳陞郡黃鉉以經明行修稱世近代又有黃瑞黃俊良之博治多聞皆未能 詳其一祖而著其同宗遂為吾子孫無窮之痛鳴呼吾鄉僻郡也吾輩孱孫也 處僻郡為孱孫目見世族之流於氓隸子姓之遠於行路無窮之痛到此又如 何也重以壬癸陽六甚於麗季之蕩盡後日之無徵應甚於今日之無存氓隸 行路之數亦應益甚於今日之孱孫用是大懼有志裒集而疾病相仍耳目不 弘姑依叔父應清平日手所札錄補入余交游間所聞見為一家私傳之覽其 間或詳或略或闊而不書遵前誌也或一名而派不同或同生而名不侔傳疑 傳信俱存而不削尊先代也外孫之外派舅親之舅族一書屢書而不已明士 族也至如為氓為更為擊為賤者亦皆書之重同宗也鳴呼前乎數百載之祖 先安知賴此而或傳於後後乎數百載之子孫亦安知承此而益詳所出圖成 完譜則斯可以無憾矣
  皇明萬歷甲辰上浣裔孫通訓大夫行醴泉郡守汝一謹書


平海黃氏世譜序 黃氏의 東國에 나타난 歷史는 오랜 옛날이며 그 繁榮해온 由來는 新羅朝에서 安鄭朴李金崔의 六姓을 처음세운 後로부터 그 뿌리와 줄기와 잎이 퍼져서 우리 黃氏는 어느덧 大姓이 되어 派系가 나누어지고 貫鄕이 달라서 鐵原 昌原長水 平海等에 가장 많은 편이며 그 中에도 平海黃氏가 멀고 오랜 歷史를 지니고 있다. 그러면 黃氏의 始祖는 누구였던가? 傳說에 依하면 新羅上世에 黃將軍이라는 어른이 丘將軍이라는 분과 함께 들어오셨다는 것인데 黃將軍은 月松북쪽 기슭 에 살아계셔서 지금도 黃將軍의 사신터가 있으며 丘將軍은 丘尾北浦에 배를 대 어 上陸하셨다하여 그 地方名을 只今도 丘尾津이라 부르고 있다. 이 모든 말 이 다 平海郡誌에 登載되어 있으나 世代가 荒朴하고 文籍이 燒失되어 確實히 證憑할 根據는 없다. 그러나 뜻하건데 黃姓이 처음으로 여기에서 根源을 삼은 것은 틀림없는것같다. 그리고 대계 長水昌原은 平海에서 나누어졌다하니 이 三派는 처음한 祖上에서 갈린것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 平海黃氏는 고려 初로부터 代代로 文官과 武官에 宰相의 자리를 바라볼 만한 名望높은 분들이 많았고 또 이름난 宰相과 높은 벼슬자리를 차지한 분들 이 많아서 李朝에 들어와서도 歷史에 班班함을 가히 자랑할만하다. 이것은 진 실로 祖先의 深仁厚澤의 積功이 아니였던들 어찌 數百年동안을 그같은 燦然한 門閥로 家業을 이어 내려올수 있었겠는가? 무릇 世上은 심은바가 있으면 반드시 거두게되고 물은 대면 반드시 흐르는 法임에 歷代의 燦然했던 우리 譜史도 반드시 譜牒을 通하여 서로 믿고 傳함이 있었던 것을 確信하느라 그런데 高麗末에 日本海賊떼가 侵入하여 竹嶺以南은 擧皆가 盜賊에게 쑥밭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北으로 避亂하게 됨에 가졌든 祖上傳來의 물건을 모두 兵火로 燒失하고 또 散之四方으로 흩어져살게됨으로 그 情狀은 진실로 슬 프고 可惜할 노릇이였다. 이것이 우리 黃氏가 北方에 많이 살게된 연유요。 또 처음된 일로 생각한다. 그 다음은 李朝初에 兵曹判書黃象이 文川郡에서 돌아가 葬事함에 그 後孫의 一部가 흩어져 살게 된것이 두번째였다. 그리고 各色各處에 散居하여 繁衍하게사는 이들은 모두가 간구한 生活로 한 터럭에 견줄것이나 오히려 끊이지 않고 살아가는것이 多幸한일이였다. 回顧하 건데 譜牒을 잃고 또 듣는바없이 살아온 고로 平海黃氏子孫들이 三派로 나누워 그 祖上을 各各으로 하였으니 처음에 한 祖上이 누구였음을 알지 못하고 서로 婚姻을 하여 부끄러움이 없이 지냈으니 이 어찌 大幸中大不幸이 아니였으랴!! 黃瑞께서는 翊戴元勳으로써 陞郡 즉 箕城縣을 平海郡으로 올이시고 黃鉉은 經明行修로써 世上에 이름이 높고 近代에 와서 또 黃瑞와 黃俊良 두분의 博洽 多聞으로서도 모두 宗史에 詳審치 못한바 있어 한 祖上으로 그 同宗인것이 드 러남이 없으니 드디어 우리 子孫의 無窮한 슬픔이라 하겠다. 鳴呼라 우리 고울은 僻鄉이며 우리들은 잔약한 子孫이라 이들의 흐름을 살펴볼때 가난하고 賤한 常 民으로 기우러짐이 많으니 진실로 後孫들의 將來가 크게 痛嘆게 되는도다. 果然 이일이 將次어떻게 되어갈까? 이에 거듭한 壬辰癸巳의 災難이 麗末의 海寇의 災難보다 더욱 甚하니 이제까지의 證憑을 後日에 提示치 못할것이 오늘보다 더 할것이 明若觀火하며 또 同族의 賤해짐과 그 將來의 嘆息됨이 오늘의 子孫이 오늘보다 응당더할것이므로 이에 크게 두려움이 있어 宗族의 譜史를 蒐集코져 하였으나 疾病이 잦고 耳目이 넓지못하여 叔父應清 어른의 平日手記한것을 土 台로 나의 交遊間에 듣고 본바를 補入하여 一家의 私私로히 전하는 便覽으로 하였으니 그 間에 혹 仔細함과 혹 簡略함과 혹 빠진것을 쓰지 않음은 前誌에 따른것이며 혹 同名으로서 派가 같지 않고 혹 同生으로서 이름이 가지런하지 않아 疑心으로 전하고 믿음으로 전하여 그대로 두고 깍지않음은 先代를 높인것 이오。外孫의 外派와 舅親의 舅族을 繼續記錄한것은 士族의 根源을 밝힌 것이 오 常民아전庶子賤民이 된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빼지 않은것은 同宗을 重하게 여김이라 嗚呼라 過去數百年間의 祖上이 어찌이로 힘입어 혹 後世에 傳할줄 알았겠으며 또 將次數百年間에 子孫들이 어찌 이로 이어서 더욱 자세할줄 누가 알일이겠는 가? 만든바 計劃대로 族譜가 完成되었으니 이에 可히 유감이 없을지니라。 宣祖甲辰上汽通訓大夫行醴泉郡守汝一謹序 </typo>

b-001.1748056140.txt.gz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5/24 12:09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