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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003

경인대동보서(庚寅大同譜序) (1770년) - 사하(師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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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寅大同譜序
黃氏之貫平海古矣與吾東方名門世家德業文章非不儷美聯輝而但兵燹 之餘譜牒無徵以錦溪先生之博洽而猶未詳焉以海月先祖之草定而只傳 疑焉譜牒之未入梓者此也國內諸宗惟知學士公爲鼻祖而中間世次不能 繼承故各派修錄自成一家譜而己矣洎乎今譜始完盖自丙壬以來 國家 昇平己久兵燹中韜晦文字之發見者有若孔傳古文之始出於大航頭而錦 陽之設譜所也主幹鎰氏暨潤德甫窮于譜學搜索信藉多矣於是乎參互考 證遂成合譜此錦溪先生之所未詳而洽其詳也海月先祖之所傳疑而破其 疑也主幹之功何如也吾宗之幸孰大馬雖然凡天下之事之成自有期運之 至耳豈人事之所能及耶譜成之初若序若跋己發於洪相之巨筆則以余蔑 識非敢架屋下之屋子而譜所宗議以謂貫鄕不可無一語故書以識之
  歲庚寅陽月裔孫師夏謹識


경인대동보서
 황씨(黃氏)의 본관(本貫)을 평해(平海)로 정(定)한 역사(歷史)는 오랜 옛날이다. 우리 동방(東方) 명문세가(名門世家)들과 함께 덕업문장(德業文章)이 아름다움을 짝을 하여 빛남이 연면(聯綿)하지 아니치 않으나 다만 병화(兵火)로 보첩(譜牒)을 실소(失燒)하고 그 증거(證據)할 문적(文籍)이 없어 금계(錦溪) 선생(先生)같이 학식(學識)이 많고 세상(世上) 사물(事物)에 넓게 통달(通達)하신 어른으로서도 오히려 미상(未詳)하심이었었고 또 해월(海月) 선조(先祖)의 초보(草譜)에도 의심(疑心)으로 전(傳)함을 탄식(歎息)하신 바 있어 보첩(譜牒)을 즉시(即時) 인판(印版)에 붙이지 못한 이유(理由)도 여기 있었다. 그러나 국내(國內)의 제종(諸宗)들이 오직 학사공(學士公)이 비조(鼻祖)가 되는 것만은 모두들 잘 알고 중간(中間) 세차(世次)를 능히 계승(繼承)치 못하는 고로 각파(各派)에서 수록(修錄)한 것이 자연(自然)히 일가보(一家譜)를 이루는데 불과(不過)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것을 금차(今次) 경인보(庚寅譜)로 완성(完成)한 것은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치룬 후(後)로부터 국정(國政)이 바로 서고 민심(民心)이 순화(順和)하여 태평세대(泰平世代)로 계속됨이 이미 오래인고로 병화(兵火) 중(中) 산실(散失)되고 잠적되었던 문자(文字)를 발견(發見)한 것이 흡사 공자(孔子)께서 전하신 고문(古文)이 큰 뱃머리에서 나온 것 같아 금양(錦陽)에 보소(譜所)를 설치(設置)하고 보학(譜學)에 능통(能通)한 주간(主幹) 일(鎰) 및 윤덕(潤德) 양씨(兩氏)의 많은 신적(信籍)을 수색(搜索)하여 서로 토론(討論)하고 고증(考證)하며 참작(參酌)하여 드디어 합보(合譜)를 이룬 것이다. 이로써 금계(錦溪) 선생(先生)의 상세하지 못한 바를 그 자세한 것으로 이루고 해월(海月) 선생(先生)의 의심(疑心)으로 전(傳)한 바를 밝히게 된 것이니 주간(主幹)의 공(功)이 어떠하다 하겠으며 오종(吾宗)의 다행(多幸)이 이에 더할 것이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무릇 천하(天下)의 일을 성취(成就)함에 있어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으로 되는 것이지 어찌 사람의 능한 바라 할 것인가? 보사(譜事)가 완성(完成)된 처음에 서(序)와 발(跋)이 이미 큰 문장(文章)들의 솜씨로 붙였으니 부족(不足)한 나로서야 감히 생각조차 할 일임을 잘 알고 있는 바인데 보소(譜所) 종의(宗議)가 평해(平海)로서도 무언(無言)일 수는 없다 하며 권고함으로 부득이(不得己) 사피(辭避)치 못하여 두어 줄 글로 기록(記錄)하노라.
  세(歲) 경인(庚寅) 양월(陽月) 예손(裔孫) 사하(師夏) 근지(謹識)

b-003.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25/06/01 23:28 저자 ssio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