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진보서(庚辰譜序) (1880년)
경진보서
무릇 사람이 조상(祖上)을 근본(根本)으로 하는 것이 나무의 뿌리와 물의 근원(根源)과 동일(同一)한 것이다.
나무는 뿌리로부터 가지에 달하며 물은 근원(根源)으로부터 지류(支流)에 이르나니라.
하물며 사람이 어찌 근본(根本)이 있는데 그 싹을 생각지 않겠으며 후세(後世)가 있는데
그 선세(先世)를 밝히지 않겠는가. 이것이 사족지가(士族之家)에 족보(族譜)를 두게 되는 소이(所以)이며
또 족보(族譜)는 선계(先系)가 어디로부터 왔으며 누가 누구의 조상(祖上)이 됨을 밝히는 것이다.
그리고 족보(族譜)의 서문(序文)이 있는 소이(所以)는 후승(後承)이 어디로 말미암아 누가 누구의 자손(子孫)이
됨을 알게 하는 것이다.
우리 성(姓)이 본관(本貫)을 평해(平海)로 한 후(後)에 우리나라 명가세족(名家世族)들과 함께 그 덕업풍절(德業風節)이
아름다움을 가지런히 하여 두루 빛남이 없지 않았으나 여러차례 병화(兵火)를 겪어
보첩(譜牒)을 소실(燒失)하고 전(傳)치 못하였으니 이는 대동지환(大同之患)에 있음직한 일이나 오종(吾宗)의
불행(不幸)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로 말미암아 금(錦) 해(海) 양(兩) 선생(先生)의 박식다문(博識多聞)으로
이루어진 초집(草輯)마져 자세(仔細)하지 못하여 의문(疑問)으로 전(傳)하였으며 이어 남당공(南塘公) 초보(草譜)도
발간(發刊)하지 못함이 오래더니 지난 경인년(庚寅年)에 금계공(錦溪公)의 주손(胄孫) 산오(山梧) 백중공(伯仲公)이 나의 증대부(曾大父) 모고와(慕古窩)와 함께 보소(譜所)를 풍기(豊基) 금양(錦陽)에 설치(設置)하고 서로 증거(證據)를 들어 교정(校正)하되 그릇된 곳을 변증(辨證)하고 의심(疑心)나는 곳을 질문(質問)하여 오래도록 이 보책(譜冊)이 전(傳)해지기를 소원(祈願)하면서 완공(完功)을 이루어 두 권(卷)을 새겨 출판(出版)한 것인즉 그 선대(先代)의 뜻을 받아 이었고 후세(後世)에 물려주는 공(功)이 과연(果然) 무엇으로 비할고?
그 후(後) 신묘년(辛卯年)에 춘천(春川) 종승지(宗承旨) 도(燾)씨(氏)가 서울 화장사(華藏寺)에 보청(譜廳)을 설치(設置)하고 수보(修譜)하여 6권(六卷)을 활판(活版)으로 인쇄(印刷)하였으나
장파(長派) 풍기(豊基)의 불응(不應)이 흠이였었다. 그리고 지난 경술년(庚戌年) 가을에 산남(山南)의 사손(嗣孫) 헌주(憲周)씨(氏)가
먼저 각읍(各邑)에 통고(通告)하고 원근(遠近) 제종(諸宗)들과 합모(合謀) 병력(並力)하여 그 빠진 곳을 깁고 그릇된
곳을 바로 잡아 옛날 한학사(漢學士)를 신적(信蹟)에 의거(依據)하여 당(唐)나라로 고친 것인즉 그 옳은
것이라도 밝아지고 안 밝아지는 것은 또 한때가 있는 법(法)이니라.
그것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힘 부족(不足)으로 겨우 보책(譜冊)을 3권(三卷)밖에 완성(完成)치 못하였다는 것은 후일(後日)에
경솔(輕率)하게 누락(漏落)시킨 한탄을 면(免)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팔도(八道)의 종인(宗人)들이
모여 합의(合議) 협력(協力)한 결과(結果)인데 장차 어찌할 것이리요?
이제 경진수보(庚辰修譜)는 풍기(豊基) 종인(宗人) 범린(範麟) 우진(宇鎭) 두 사람이 주간(主幹)이 되어 매양(每樣) 지난번 보첩(譜牒)이
넓게 수합(收合)되지 못하였음을 한탄하면서 유사(有司)를 정(定)하여 각도(各道) 원읍(遠邑)에 두루 통고(通告)하고
또 평해(平海)에는 사람을 보내어 부지런히 독려(督勵)하였으나 수년간(數年間)을 요(要)하였다. 이것은
지방(地方)에 흉년(凶年)이 들어 모든 일이 뜻과 같이 이루어지지 못함이였다. 비로소 금년(今年) 여름으로 족종(族從) 도(濤)와 정(瀞)으로 더불어 함께 금양(錦陽)에 이르른 즉 장단(長湍)의 예호(禮浩), 경주(慶州)의
응극(應極), 평해(平海)의 재연(在淵), 강릉(江陵)의 병(炳), 청안(淸安)의 필흠(弼欽) 등(等) 각읍(各邑) 제씨(諸氏)가 이미 모여 설역(設役)을 하고 있는지라 함께 수개월(數個月)을 더 격은 후(後)에 서로 감검(勘檢)하여 드디어 몇 권(卷)을 완성(完成)하고
약간(若干) 질(帙)을 인쇄(印刷)하였으니 옛날의 상세(詳細)치 못한 것을 이제 더욱 자세(仔細)하게 다듬었으며
후세(後世)에 의심(疑心)으로 전(傳)한 것을 먼저 깨우쳐 그 의심(疑心)을 풀었노라.
그리고 파계(派系)에 모호(模糊)함이 많은 것과 소목(昭穆) 항열에 분간(分諫)키 곤란(困難)한 점(点)을 밝혔음으로
보책(譜冊)을 한번 열어 살펴볼 때 조선(祖先)이 엄연히 오신 것 같으며 자손(子孫)이 곁에 벌려서
있는 것 같음을 느끼리라. 다시 한번 추상(推想)할 때 한줄기의 가지가 뿌리에 연(連)한
것과 같으니 비록 세대(世代)가 멀고 동서남북(東西南北)으로 떨어져 있는 종친(宗親)들이라 할지라도
합당동석(合堂同席)하여 돈목(敦睦)과 효제(孝悌)를 강론(講論)하며 유연(油然)한 풍속(風俗)을 진작(振作)시키는 같음이 있어
상호돈후(相互敦厚)한 정(情)이 생기는 것 같도다. 이러니 어찌 소씨(蘇氏)와 정씨(程氏)의 족보(族譜)에
사양하겠는가. 무릇 제종(諸宗)은 오늘날 수족작보(收族作譜)의 뜻을 저버리지 말도록 효제충신지도(孝悌忠信之道)를
힘쓸지로다. 보사(譜事)를 종료(終了)하는 밤에 보청(譜廳)에 모인 종친(宗親)들이 우리 해월(海月) 선조(先祖) 서문(序文)도
권두(卷頭)에 있고 또한 장간(掌幹)의 소임(所任)도 맡은 사람이니 일언(一言)이 없어서는 안되지 않겠느냐
하므로 무사(蕪辭)를 무릅쓰고 두어줄 전말(顚末)을 기록(記錄)하여 보책(譜冊) 말미에 붙이노라.
숭정(崇禎) 후(後) 5(五) 경진(庚辰) 단양절(端陽節) 후예손(後裔孫) 면구(冕九) 근서(謹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