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술대동보발(甲戌大同譜跋) (1934년)
갑술보 후지(後識)
우리나라 사족(士族)의 가문(家門)에는 반드시 보첩(譜牒)을 닦아서 그
계통(系統)의 단서(端緖)를 밝힘으로서 친애(親愛)하는 마음이 있게 함을 중요시
하고 있다. 마경(馬卿)주1의 가문에 세계(世系)를 밝힌 것과 소씨(蘇氏)의 족보(族譜)에 서문(序文)주2을 지어 온 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는 일이다.
우리 황씨(黃氏)가 평해(平海)를 관향(貫鄕)으로 한 유래(由來)는 오래 되었으며
금계(錦溪) 해월(海月) 두 선생이 족보(族譜)의 초보(草本)을 처음 만들어서
그 손길이 지나간 흔적이 아직도 남아 수백년에 이르는 동안에 혹은 대동보(大同譜)를 하기도 하고 혹은 파보(派譜)를 하는 등 여러번 수보(修譜)를 했으나 관향(貫鄕)인 평해(平海)에서 수보(修譜)한 일은 아직 없었다.
그런데 지금 대동보(大同譜)를 하기 위해 월송(月松) 선재(先齋)에 보청(譜廳)을
설치했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화수회(花樹會)를 함께 열어 원만하게 모였으나
몇 곳의 종친(宗親)이 불응(不應)한 것은 곧 계해년과 갑자년에
파보(派譜)를 하고 오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안(淸安)에서도 또한 함께 할 뜻이 없는 듯이 핑게 말로 뒤로 물러서며 일이
어떻게 되는가를 관망(觀望)하는 상태였는데 기성(箕城)의 족장(族丈)인 중곤
(中坤)씨가 80(八十)세를 바라보는 노쇠(老衰)한 나이에도 10(十)여일이나 걸리는 힘들고
험한 길을 무릅쓰고 친히 찾아와서 종택(宗宅)에서 한 번 회의를 하자고 부탁하여
공의(公議)가 결정되니 곧 초단(抄單)을 보아 허겁지겁 보소(譜所)에 접수시켰다.
총무(總務)인 만영(萬英)씨는 일을 잘 처리(處理)할 능력이 있기 때문에
모든 준비가 하나도 구애됨이 없이 추진되는 것으로 보아 이에 사람이 있은 후에라야 일이 유종有終)의 미((美)가 있는 것을 알겠다. 하물며 남북(南北)이
합보(合譜)를 한다는 것이 진실로 쉬운 일이 아님에 있어서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또 보규(譜規)에 있어서는 구보(舊譜)의 규칙(規則)과 별로 다를 것이
없지만 종통(宗統)을 이어나가는 일과 문자(文字)를 증가하고 삭제(削除)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공의(公議)에서 결정하였고 감히 내 임의(任意)대로 처리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참람하게 분수에 지나친 죄를 어떻게 면하겠는가. 속보(續譜)에
대한 사실들은 이미 여러 군자(君子)가 서술(敍述)한 글에 다 말했으니 내가
어떻게 감히 더 자세히 말하겠는가.
기왕(旣往)에 이 일을 보아온 처지에 말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어서 갑술보(甲戌譜)를 하게 된 전말(顚末)을
책의 말미(末尾)에 간략히 기록할 따름이다.
갑술년 4(四)월 하순에 후예손(後裔孫) 사흠(思欽) 삼가 지하다.
주1. 마경(馬卿): 명(明)나라의 명신(名臣)이며 자(字)는 경신(敬臣)이었다. 내관(內官)인 유근(劉瑾)의 불법(不法)을 탄핵(彈劾)하여 대명(大名)을 지켰고 소도(蘇盜)의 창궐(猖獗)을 막아 명성(名聲)을 떨쳤다.
주2. 소씨족보서(蘇氏族譜序): 소순(蘇洵)이 지은 소씨(蘇氏)의 족보(族譜) 서문(序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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