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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술대동보발(甲戌大同譜跋) (1934년)
갑술대동보발
본관(本貫)을 같이하는 우리 평해황씨(平海黃氏)가 최초(最初)에 세보(世譜)를 닦을 때 그 계획(計劃)함이 굳고 후사를
염려함이 깊었던 고로 이 일이 마침내 성사(成事)을 하였으나 진실로 이는 우리 종인(宗人)들의
친목(親睦)과 단결심(團結心)이 아니었으면 그 어찌 능(能)히 이룩하였으리요. 가만히 생각(生覺)건대 우리
성씨(姓氏)가 학사공(學士公)이 동해(東海)로 건너오신 이래(以來)로 자손(子孫)이 팔도(八道)에 퍼져 살게되어 그 수(數)가
무려 수십만명(數十萬名)이 되고 연대(年代)가 오래되어 세계(世系)를 고증(考證)할 수 없었더니 다행이
금계(錦溪) 해월(海月) 두 분 선생(先生)이 인멸되고 흩어진 유적(遺蹟)과 문헌(文獻)을 집수하여 소씨(蘇氏)의 고사(古事)를
본떠서 우리 평해황씨(平海黃氏)의 초보(草譜)를 처음 만들어 우리 후생(後生)에게 전해준 것은 진실로
우리 종족(宗族)의 무한(無限)한 아름다운 일이며 또 이 뜻을 계승하여 풍기(豊基)와 청안(淸安)에 덕망(德望)있는 장로(長老)들이 여광(餘光)을 발휘(發揮)하야 수보(修譜)하였음은 후손(後孫)에게 큰 은택(恩澤)을 입힌 일이라
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이 前後三百年間에 大同譜를 三次派譜를 四次나 격것다 그러나 그 後子孫들은
繁衍하고 世事는 多端하야 나라를 등지고 故鄕을 떠나는자 漸漸 많아서 한곳에
살지 못하고 散之四方으로 흩어지니 오래도록 修譜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따라서
世系를 닦을 수 없는 后進이 漸漸 많아지므로 先父老의 積功과 남긴 遺業이 次次
흔터져 감에 平海의 여러 族人들이 이것을 걱정한 남어지 난상토의하여 宗議로
定하고 豊基와 淸安에 傳人하고 嶺南과 關西에 通文을 發送하니 바람이 일고
所聞이 퍼저서 이르는 곳마다 萬水가 東海로 흐르듯 諸宗이 呼應함으로 壬申年
가을에 譜事를 始作하야 不過二年에 譜冊을 刊行케 되었다.
그 入譜한 人員은 八千餘名이요 所要된 經費는 모두 五千圓이 넘었다 이 모두가
우리 宗族의 爲先하는 精神이 마음속에 깊히 새겨져 있어 經濟의 어려움을 꺼리지
않고 義捐金을 辨出한 때문이라 하겠다.
아! 譜事의 意義를 어찌 쉽게 表現할 수 있으리요마는 위로 祖先의 系統이 밝게
나타나 있고 아래로 子孫의 派系가 整列되어 있으니 비록 平安無事할 時代라도
마땅히 各家에 貴重히 保管되어야 할 바이어늘 况次世上變遷이 심한 오늘에 있
어서야 우리 宗族의 觀念이 이번 譜事를 通하여 더욱 깊은 바이었으리라 生覺
한다.
돌이켜 보건데 나같이 無能한 사람이 외람하게도 財政에 關한 일에 참섭하여
다만 一心으로 節約하며 오직 莫重大事인 譜事의 有終의 美를 거두지 못할까
두려워 할뿐이러니 오늘에 完成을 보게 되었음으로 기쁜 나머지 참람하고 분에
넘치는 것도 헤아리지 않고 簡略히 顚末을 서술하여 篇末에 부치노라.
갑술(甲戌) 4월(四月) 일(日) 후예손(後裔孫) 시원(時源) 근지(謹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