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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절공파 파보서문(文節公派 派譜序文) (1996년)
문절공파 파보서문(文節公派派譜序文)
정이천(程伊川) 선생(先生)이 말씀하기를 천하(天下)의 인심(人心)을 관섭(管攝) 함에는 종당(宗堂)이 수족(收族)하고
풍속(風俗)을 후(厚)하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 근본(根本)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으니
계보(系譜)를 닦아 나감이 인륜(人倫)에 관계되는 바는 지대(至大)한 것이다.
우리 황씨(黃氏)가 대장군(大將軍) 상조(上祖)께서 중국(中國)으로부터 도래(渡來)하시어 평해(平海)의 월송(月松) 굴정리(堀井里)에
정착(定着)하신지 2천유여년(二千有餘年)이라 그 후(後)에 시조공(始祖公)께서 3자(三子)를 두시어 기성(箕城)과 장수(長水)와
창원(昌原)으로 분적(分籍)되어 내려왔으니 동근지예손(同根之裔孫)임은 문헌(文獻)으로도 고증(考證)되고 있으며 우리
평해(平海)는 고려조(高麗朝) 때에 금오장군(金吾將軍) 태자검교(太子檢校) 선조(先祖)를 1세(一世)로 하여 여러 번 수보(修譜)를 하였으니 세계(世系)의 내력(來歷)이 상세(詳細)하고 또 명확(明確)하지 않음은 아니나 세대(世代)가 침원(寢遠)하고
자성(子姓)이 식번(寔繁)하여 병진년(丙辰年)의 대동수보(大同修譜) 이래(以來)로 이미 20여년(二十餘年)이 경과(經過)하였으니 수보(修譜)를
해야 됨은 가장 긴절(緊切)한 사안(事案)이다.
그러나 예빈공파(禮賓公派)는 이미 파보(派譜)를 하였으니 대동합보(大同合譜)는 불가능(不可能)한 일이지만 본원(本源)을
추구(推究)하고 돈종의친(敦宗毅親)의 도리(道理)로서는 어떻게 원만(緩晚) 할 수 있겠는가 다만 既存의 譜牒에
記錄된 二十三代祖이신 諱 瑞에서 高麗忠烈王朝에 翊戴功臣으로서 金魚黛僉議
評理門下侍中의 벼슬이 除授되고 諡號는 忠節이라고 記錄된 것을 榮州의 世明
族大夫가 四千年文獻通考한 책을 閱覽한 바 文節諡號欄에 登載되어 있어서 族人
允錫과 日錫등 三人이 서울大學校 및 國立圖書館에 가서 関係史料를 確認한 結果
僉議 朱悦과 左政丞 韓宗愈와 知僉議 黃瑞와 典書 梁思道와 車原類 다섯 분이
同時에 文節公의 諡號를 받음이 確實하지만 先代에서 發見치 못한 事實을 바
로잡기는 僭濫한 處事인 듯 하나 根據가 分明하니 忠節을 文節로 바로 잡음을
譜牒에 詳記되어야 할 것이다.
지난 乙亥年(一九九五) 초에 榮州의 世明 綠成 두 族丈이 文節公派의 派譜를
닦자는 提案을 하므로 宗會席上에서 내가 말하기를 大同譜를 닦은지 二十餘年이
되고 後孫이 各處에 散在하고 그 數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世態가 平穩하지
목하고 倫綱이 頹廢하여 族誼가 疏遠해질까 두렵다고 하니 宗親 모두가 이 때에
修譜함이 마땅하다 하며 同聲相應하여 계획을 수립하고 各派의 有司를 薦望하여
收單이 뜻대로 進行되었다.
譜所를 箕城에 定하고 嚴命의 차가운 날씨에도 編輯에 힘쓴 任員들의 勞苦가
보람이 있어서 陰 十二月下旬에 正書를 完了하고 印刷에 回附하게 됨에 즈음하여
諸宗人이 내가 譜事의 始終을 잘 안다는 事實을 들어 序文을 지으라 하기에 宗事에
關한 일이니 敢히 不文하다는 핑개로 辞避할 수 없어서 大同譜를 한 以後로 있었던
대모한 일 만을 簡略히 記述하는 바이다.
嗚呼라 우리 黃氏가 오랜 歷史를 가진 宗族으로서 우리 先祖 중에는 文章德業과
仕宦功名이 빛나서 世人의 稱頌을 받는 祖上이 많으니 우리 後孫들은 모름지기
본 받아야 할 것이다.
무릇 모든 宗親과 後嗣들은 譜牒을 살펴 봄으로서 宗親相互가 睦族之義를 더욱
敦篤히 하고 先祖의 遺德에 욕됨이 없도록 힘써야 될 것이다. 끝으로 今般 譜事에
八十高齡임에도 不拘하고 都有司를 맡아 指揮監督하신 世明族大夫의 賢勞에 깊이
感謝드리며 아울러 編輯任員 여러분의 勞苦를 衷心으로 致賀하는 바이다.
檀紀四三二九年(一九九六)丙子 孟春節에 後孫德鎭 謹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