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헌황명하행장략(懈軒黃命河行狀略)
해헌(懈軒) 황명하(黃命河)의 행장(行狀)을 략기(略記)함
공(公)의 휘(諱)는 명하(命河)로 자(字)는 자윤(子潤)이며 호(號)는
해헌(懈軒)이니 평해(平海)사람이다.
중세(中世)에 휘(諱)가 서(瑞)이며 익대공신(翊戴功臣)으로 문절공(文節公)의
시호(諡號)를 받은 어른이 있고 조선시대(朝鮮時代)에 들어와서 휘(諱)가
옥숭(玉崇)이며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낸 분이 공(公)에게는 7대조(七代祖)가
되신다.
증조(曾祖)의 휘(諱)는 도일(道一)이니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상의원(尙衣院)의
별제조(別提調)의 행직(行職)을 지냈으며 조부(祖父)의 휘는 중식(中寔)이니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品階)에 올랐고 아버지의 휘는 석건(石建)이니
통덕랑(通德郞)이었으며 어머니 안동권씨(安東權氏)는 시경(是經)의 따님이요
대사성(大司成) 벼슬을 지낸 종(悰)의 후예로서 효종(孝宗) 2(二)년
신묘(辛卯)(서기 1651(一六五一)) 3(三)월 22(二十二)일에 온계리(溫溪里)의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천품(天禀)이 영특하시어 나이 겨우 7~8(七·八)세에 가정에서 배움을 받았는데
글을 들으면 곧 외울 수 있었고 말을 잘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소재(小宰) 강공(姜公) 석규(錫圭)가 본군에 와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에
공을 한 번 보고 여남(汝南)의 안자(顔子)라고 칭찬했다.
그리하여 공이 경전(經傳)과 사적(史籍) 등을 강구(講究)하고 재능을 갈고 닦아
학문(學文)에 능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서파(西坡) 오공(吳公) 도일(道一)이
문장가(文章家)로서는 당할 사람이 없었는데 공이 지우고 또한 공과 더불어
정자(程子)와 주자서(朱子書)를 논(論)하고 토의(討議)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한 그 당시의 고관대작(高官大爵)들이 기꺼이 더불어 시(詩)를 주고 받았으니
동리(東里) 이공(李公) 은상(殷相)1)과 정승 이공(李公) 태좌(台佐)2)와
옥천(玉川) 조공(趙公) 덕린(德麟)3)과 병와(甁窩) 이공(李公) 형상(衡祥)4)과 지촌(芝村)
김공(金公) 방걸(邦杰)5)과 보한(保閒) 안공(安公) 연석(鍊石)6) 등은 모두
문장(文章)과 도의(道義)로 맺은 교분이었다.
불행하게도 열두번의 향시(鄕試)와 두 차례의 과거(科擧)에도 끝내 뽑히지
못했으니 그 당시 사람들이 그를 애석해 했었다.
아! 공이 대해(大海) 해월(海月) 두 선생의 가문에서 출생하여 선대(先代)가
물려 준 규범(規範)을 계승하여 상제(喪制)와 조상(祖上)을 받드는 범절을 다하여
향중(鄕中)에서는 모범이 되고 후학(後學)들에게는 본보기로 존경받아 족히
세상에 크게 쓰여질 인물(人物)이었는데 불우(不遇)해짐에 감정이 고조(高調)하여
곧 국조고사(國朝故事) 일곱 권 책을 편집하고 퇴계선생(退溪先生)이
금계선생(錦溪先生)에게 주신 수필(手筆)을 서첩(書帖)을 만들어 장미 이슬로 손을
씻고 장중히 완독(玩讀)하며 현자(賢者)를 추존(追尊)하는 정성을 기울였다.
그 때 마침 흉년이 들었는데 사가(私家)의 곡식 150(一百五十)섬을 내어 빈민을
구휼하니 감영(監營)과 본읍(本邑)에서 포상(褒賞)이 내려지고 조정(朝廷)에서는
특별히 높은 품계(品階)를 내렸지만 여러번 사양했다.
상감(上監)의 명을 받은 어사(御史) 오명준(吳命峻)이 또 문학(文學)과 행의(行義)가
특출한 사람이라고 공을 천거(薦擧)하니 조정에서 장계(狀啓)를 받고
특별히 참봉(參奉)을 제수했다고 한다.
물러나서는 하정(霞亭)을 짓고 계당(溪堂)에서 마음을 수양하는 바른 성정(性情)을
길렀으니 하정(霞亭)은 곧 천석(泉石)을 즐기는 곳이요 계당(溪堂)은 즉
후학(後學)을 장학(奬學)하는 곳이었다.
산수(山水)만 아름답던 고장을 문헌(文獻)이 성(盛)한 지방으로 변화시켰는데
을미년(서기 1715(一七一五)) 정월 11(十一)일에 침방(寢房)에서 천명(天命)이 다하여
운명(殞命)했으니 향년이 65(六十五)세였다.
아! 공이 평일에 남긴 저술(著述)과 제현(諸賢)들과 주고 받은 시문(詩文)이
모두 화재(火災)를 당해 소실(燒失)되었는데 공의 증손(曾孫)인 염(琰)이 그
훌륭한 모범과 떳떳했던 행적(行蹟)이 세월이 더 오래될 수록 더욱 없어질까
두려워서 나에게 행장(行狀)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는지라 내가 배움이 없는
후학(後學)으로서 산같이 높이 우러르는 감회가 더욱 간절한데 하물며 세의(世誼)가
이미 깊은 처지로서 행장을 지을 사람이 못된다고 사양할 수 없어서 삼가 받아서
학문에 독실(篤實)했던 뜻 가짐과 행의(行義)가 근칙(謹勅)했던 사적의 요점을
취하여 서술하고 후세의 경계(警誡)가 될 훌륭한 말을 남길 군자(君子)를 기다릴
따름이다.
농와(聾窩) 이형록(李亨祿) 삼가 짓다.
할아버지 이정구와 큰아버지 이명한(李明漢)은 모두 제학 또는 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아버지와 사촌형제들이 모두 문장에 뛰어나 일가가 사림을 이루었다.